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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윤- 싱그러운 그때 그곳으로/ 이선영

sosoart 2015. 3. 13. 23:04

김리윤 / 싱그러운 그때 그곳으로

이선영

싱그러운 그때 그곳으로

 

이선영(미술평론가)

 

김리윤의 아련한 그림들은 좋은 꿈꾸기를 바라며 잠을 청하는 이의 작은 소망 같은 것이 느껴진다. 누구에게도 되돌아가고 싶은 시공간이 있다. 작가란 존재는 사진이나 영상 등, 몇 가지 빈약하게 남아있는 단편적 단서만으로 그때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보통사람과 달리, 자신에게 익숙한 표현 수단을 통해서 그것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자일 것이다. 보고 싶은 때, 곳, 인간을 작가는 그림을 통해 호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의 때, 곳, 인간 보다 더 근사한 것일 수 있다. 실제는 대체로 실망감을 준다. 회귀는 예술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기능은 누군가에게 그림을 그리고 싶고 그려야하는 이유, 그림을 보고 싶고 알아야 하는 이유를 제공해 준다. 기억하고 싶은 행복의 순간이 그렇게 많지 않은 현실에서, 추억 한가운데로 다시 진입하여 눈앞에 그것을 펼쳐놓는 예술가의 능력과 자질을 보통사람들은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부엌, 112x145cm, Oil on canvas, 2011

 

만약 무엇을 기억하려는 자가 작가가 아니더라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추억을 되돌릴 수 있는 방식을 안다면 그 또한 예술에 범접하는 무엇일 것이다. 상실되고 부재한 것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단편들 사이의 간격은 멀찍이 벌어져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언어는 결코 투명하지 않으므로, 무언가가 첨가되고 변형되기 마련이다. 기억을 그리기는 작업은 최초의 지각과 경험만큼이나 또 다른 강렬한 과정을 경유한다. 그래서 기억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심지어는 자율성을 가지게 된다. 기억은 이미 아는 것을 넘어서 미지의 것으로 도약한다. 유년시절이든 젊은 시절이든, 뜨겁고 강렬한 또는 고요하고 신비로운 경험을 했던 어떤 또 다른 시기이든, 그때는 질적으로 다른 시공간으로 격상된다. 최초의 체험만큼이나 반추의 과정은 중요하다. 작품은 기억을 통해 사라진 시공간을 차이 속에 거듭나게 한다. 김리윤은 희미해지는 기억을 그림으로 되돌린다. 사진을 참조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참조점일 뿐이다. 

 

얼마 전에 열린 개인전 ‘회상(reminiscent)’에 걸린 작품들을 보면, 그녀의 그림은 상상 속 풍경처럼 분명치가 않다. 거기에는 따뜻한 햇살과 신록의 느낌이 가득할 뿐, 장소나 시간, 등장인물 등이 특정되지는 않는다. 시공간의 간격이 커질수록, 그때 그 사건이 과연 내게 실제로 일어났던가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최초의 진실은 모호해진다. 김리윤의 작품에서 햇살 가득한 충만의 순간은 10여년에 갔던 배낭여행에서 왔다. 작가는 러시아의 시골 마을에서 한 달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곳은 유년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최초의 지각은 이미 기억에 물들어 있었고, 러시아의 어떤 마을도 어린 시절 그자체도 아닌 중간 단계의 시공간이 작품에 반향 되고 있다. 전혀 새로운 것의 발견이라기보다는, 기시감을 주는 광경은 그때의 지각을 더욱 강렬하게 했고, 기억을 강화 했다. 강한 인상을 주는 광경이 기시감과 관련된다는 것은 대상과 주체의 밀접한 상호작용을 전제한다. 특히 주체의 비중이 크다. 



 

햇살이 퍼질때, 145x97cm, Oil on canvas, 2012

 

작가는 같은 곳에 가서 같을 것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사람마다 다 다르게 찍는 예를 들면서, 개인의 감성에 따라 지각과 기억의 패턴도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기억은 그자체가 변형을 의미하고, 그것을 재현하거나 표현하는 과정에도 변형이 야기된다. 그렇게 그림으로 회귀된 비현실적 장면을 어딘가에서 다시 발견한다면, 그처럼 놀라운 경우도 없을 것이다. 마치 상상 속의 인간을 현실 속에서 만난 것처럼 말이다. 작가의 목적은 기억의 정확한 재현 그자체에 있지 않다. 변치 않는 참조대상을 재현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작가는 그때의 경험이 좋아서 이후에 러시아로 유학까지 갔지만, 경험보다는 기억의 과정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지금 여기의 진부함과 고갈, 상실감을 채워줄 수 있는 최초의 신선함으로 되돌리는 원초적 시공간이 있다. 그 원초적 시공간은 역사와 달리, 신화적인 위상을 가지게 된다. 신화는 개인에게 있어서나 인류에게 있어서나 제의를 통해서 회귀할 수 있는 시공간이다. 예술은 이러한 신화를 복구하는 제의적 역할을 수행한다. 

 

마음속에서 그때그곳은 남아서 그 비슷한 분위기의 시공간을 조우할 때, 작가는 단번에 그때그곳으로 회귀한다. 그러한 기억을 가능하게 하는 순간은 매우 순간적이고 우연적이다. 그림은 그러한 현존의 경험을 현전하게 한다. 이때 화가는 실제를 앞에 두고도 보고 싶은 것을 그리게 된다. 김리윤의 작품에서 기억이나 회상이라는 개념은 시공간의 이동을 전제하며, 이는 인생이란 길을 여행하는 이의 관점을 보여준다. 햇빛이 드는 창이 있는 작품 [머무르다]에는 이국적인 실내에 여행자의 가방이 놓여있다. 그곳에 익숙해지기 전의 최초의 낯섦이다. [방]이나, [부엌] 같은 일상적 공간 역시 이국적이다. 여행이란 그들의 익숙함이 내게 새로움으로 다가올 때들로 가득한 특별한 체험이다. 역으로 나의 익숙함이 그들에게 새로움을 가능케도 할 것이다. 타자와의 만남은 늘 완벽한 것도 우호적인 것도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다시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된다. 여행은 다름 아닌 나를 발견하게 한다. 

 

피어오르는 구름과 새들 사이로 호숫가에서 산책하는 가족을 그린 작품 [그곳]이나 물이 고여 있는 숲을 그린 작품 [새소리 아련하다]는 지역적 특수성이 작가의 지각과 기억이라는 필터를 통해 보편적 장면으로 재탄생한 경우이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가보고 싶은 곳이다. 특히 작가는 장면을 꼼꼼히 꽉 차게 그리기 보다는 밀도가 희박한 빈곳을 남겨두는데, 그것은 그곳이 기억의 장면이라는 것을 알려줌과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여백을 채우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산책하는 느낌, 치유의 역할 등이 작가가 관객에게 기대하는 바이다. 이러한 빈 공간은 꼭 필요하다. 고대의 원자론자들이 주장했듯이, 허공이 있어야 원자의 운동과 변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작품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리는 듯한 한 무리의 사람들을 그린 것인데, 건물과 사람들 일부, 도로면을 거칠게 쓱쓱 처리했다. 인적 없는 시공간이 주로 그려진 ‘기억’전에서 인간의 등장은 다소간 예외적인데, 인간 역시 익명적 풍경으로 펼쳐지고 있다. 

 

기억은 시각 뿐 아니라 다른 감각에 깊숙이 자리한다. 맛, 냄새, 촉각 같은 원초적인 감각과 기억과의 유대는 매우 끈끈하다. 그래서 기업은 마지막 식민지로 남은 이 감각을 코드화, 기계화, 상업화하려고 애쓴다. 작품 [익숙한 시간]이나 [여행자의 초대]같은 작품에 나타나는 햇살 가득한 실내외에서의 소박한 상차림은 미각과 기억의 관계를 일깨운다. 특히 화면 가득히 과일과 차, 과자접시가 놓여있는 작품 [마들렌의 추억]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어릴 적에 즐겨한 과자의 맛을 통해 순간적으로 과거를 떠올리는 대목이 연상된다. 작품이란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시간’(프루스트)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작품 [요나의 숲], [초여름]을 비롯하여 이름 모를 꽃과 잡풀이 가득한 장면은 숲 같은 모습이다. 작품 [꿈을 꾼다]에서는 요정이나 인형 같은 크기로 변하여 꽃밭으로 들어가는 여자를 볼 수 있다. 김리윤의 그림은 예술이라는 되찾은 시간 속으로 작가나 관객을 들여보낸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4 가을호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