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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와 쓰기 사이의 괴리 / 인선영

sosoart 2015. 3. 21. 22:02

말하기와 쓰기 사이의 괴리

 

이선영(미술평론가)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라는 말을 낳는 것은 훌륭한 작품(텍스트)일 것이다. 이렇게 긴 말이 필요 없는 지경에 도달하기 위해 많은 예술가들은 작업에 열중한다. 작품이 한 번 발표되면 작가가 일일이 따라다니며 보충 설명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작가는 작품 안에서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충분히 포화되는 지점을 마련해야 한다. 표현되지 못한 내용은 부실한 내용만큼이나 무의미하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작품이라는 한 경계 안에 메시지를 접어 넣어 펼쳐질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더라도, 말하기의 의무는 사라지지 않는다. 음으로 양으로 계속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 인간의 모든 의식적, 무의식적 사고와 행동이 날로 촘촘한 제도의 그물코에 엮이고 있는 시점에서 미술 또한 예외가 아니다. 작업환경 및 작품발표, 그리고 그것에 대한 소통과 유통 등, 작업의 시작과 지속가능성을 위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 속에서 원활하게 말하기는 적지 않은 위상을 차지한다. 

 

더구나 미술이 작품이라는 몸통으로 소통되기 보다는, 교양이나 교육으로 소진되다보니 대중 앞에서 잘 말하기는 거의 생존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고통은 소통의 전제조건’이라는 프로이트의 언명은 말하기의 압박에서 실감난다. 말이 선택 아닌 필수가 된 상황에서, 작품보다 말을 강화하는 쪽으로 선회하려는 움직임도 생긴다. 그러나 독백을 증폭하기, 확립되어 있는 것을 잘 재현하기로서의 말은 대화나 작품과도 차이가 있다. 작품은 말하기보다는 쓰기와 더 밀접하다. 훌륭한 작품을 하는 작가가 대체로 말도 잘하지만, 그 작품만큼 말을 잘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작품 뒤에 숨고 싶은 생각도 들 것이다. 말과 글의 괴리가 덜 할 듯한 이론 또한 마찬가지이다. 말하듯이 쓰면 중언부언이 된다. 쓰듯이 말하면 우물쭈물하게 된다. 말은 잘해도 못해도 문제다. 본인의 작품보다 더 잘 말했다면 그것은 사기이고, 본인의 작품과 똑같이 말했다면 굳이 작품이란 것을 따로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말을 잘 못했다면 중요한 기회를 망쳐버렸다는 자책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를 방어하고 때로 포장하기 위한 노력들은 짧은 인생을 충만하게 살려는 이들에게 결코 만족스럽지 못하다. 예술에서도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을 위해 가장 하기 싫었던 것을 해야 하는 어두운 역설을 피해 가기 힘들다. 왜 작품을 작품 그대로 봐주지 못하고 꼭 설명을 들어야 하나? 그래서 이론이라는 역할들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들의 ‘추가’ 작업들이 작품에 또 하나의 장벽을 쌓아온 것은 아닌가하는 반성도 해야 할 것이다. ‘현실적인 것이 논리적인 것이다’는 류의 오래된 인생의 지혜(?)가 아니더라도, 말이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된 이유는 있을 것이다.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에 요점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 단지 잘 만들기를 넘어선 현대예술의 개념적 경향, 개별성과 특수성을 넘어서 획득해야할 보편성 등이 그렇다. 작품은 말로 환원될 수 없고 환원되어서도 안 되는데, 문제는 말의 비중이 작품보다 커지는 경향이다. 

 

말은 상징적 차원에 머물지만, 작품은 상징계를 둘러싼 다른 차원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말을 넘어선 차원이 필요한 이유는 말의 주 무대인 현실 뿐 아니라, 가능성의 세계에 열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설명되어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다시 만들어져야할, 그리고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의 장’(프랑시스 퐁주)이다. 이 ‘가능성의 장’을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은 말을 위한 말에 머무는 한 번에 뱉어지는 말이 아니라, 말과 사물 사이에 벌어진 틈을 좁히려는 지속적인 사유, 그리고 이러한 시도를 위한 수많은 수정의 흔적들, 즉 쓰기(작품)이다. 한편 말에 대해 너무나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다보면 신비와 침묵 속에 잠겨버릴 수도 있다. 로고스라는 단어가 이성과 말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은 이성적이다. 서구의 로고스중심주의를 형이상학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해체하려는 야심을 가진 철학자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이성이 가지는 유아론적 구조가 독백을 낳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로고스는 이성의 일관성 있는 담론이며, 지독한 자기애에 빠져서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들을 뿐이다. 데리다는 말과 이성의 복합체에서 동일자의 전체주의와 압제를 본다. 보는 것과 아는 것, 가지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동일자의 압제 속에서만 전개된다. 동일자로서의 자아는 소유관념에 충실하다. 이성적 말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는 저편에 남아있다. 자신을 무언가 확실한 토대로 생각하며, 모든 의미들이 수렴되는 곳도 자아라고 생각하는 유아론적 이성에서 타자와의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하다. 말하기와 달리, 쓰기는 홀로 진행하는 것이지만, 타자와의 유대는 더 절실하다. 의식(정신) 뿐 아니라 무의식(몸)이 총 동원되는 쓰기는 동일성의 재현이 아니라, 이질성의 생성과 관련된다. 데리다는 글이 말에 현전하는 진리의 단순한 재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본다. 글은 차연이라는 운동을 특징으로 하는 무한한 놀이의 장으로 현시된다.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정원은 말이고 사막은 글쓰기’(야베스)라는 문장을 인용하면서, 글쓰기가 사막 같은 바깥의 공간에 있음을 암시한다. 사막에는 길이 없다. 거기에서의 길은 미로와 같아서 무한한 방황 속에서 찾아내야 하는 미지의 것이다. 어딘가 도달하였을 경우에만 자신이 걸어온 길을 가늠해 볼 수 있을 뿐이며, 똑같은 길을 다시 찾아낼 수도 없다. 반면 재현이란 이미 닦여진 길을 점유하고, 그 길 위에서 정해진 지점에 빨리 도착하기 위한 경쟁에 머문다. 사막에서의 쓰기, 즉 미로 속 방황은 기존 현실을 단순히 재생산하는 것을 넘어서 좀 더 광대한 지평을 열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평의 확대를 위해 얼마나 많은 불확실한 과정을 견뎌내야 하는가. 쓰기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데리다는 작가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은총 없이 출발한 최초의 항해라고 비유한다. 이러한 사유는 작품이 단지 사상 또는 내면적 의도를 단순히 표현하기만 할 뿐이며 사상이나 의도가 작품보다 앞서 있다는 선입견을 불식시킨다. 

 

지식이나 정보처럼 어떤 것에 소용되지 않은 ‘기호들을 무한정 증가시킬 의도만을 가지고 있는’(데리다) 작가에게, 그리고 ‘존재하는, 그리고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작품’(블랑쇼)에 세상이 그토록 야박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확실한 것을 전달하는 유용한 도구로서의 말이 아니라, ‘본래의 경험 속에서 완성되려고 애쓰는’(블랑쇼) 쓸데없는 언어가 예술이다. 이러한 언어는 의미를 투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자체의 물성을 가진다. 작가는 말이 전제하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여러 목소리들이 섞여들며 수많은 중심과 방향성을 가진 다층적 텍스트를 다룬다. 이성으로서의 언어가 소유와 지배가 목적을 가진다면, 모든 방향으로 확산을 지향하는 상호텍스트성은 유희과 생성만을 목적으로 한다. 차이의 유희 속에서 몸과 무의식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몸과 무의식은 강고한 상징의 질서에 균열을 내고 변형을 야기하는 원동력이다. 몸에 뚫린 구멍들이나 무의식에 내재한 불연속성은 텍스트들 사이의 간극처럼 변화의 지점들이 된다. 

 

그것은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상징계, 그리고 그것이 생산하는 정체성에 틈과 균열을 만들어낸다. 사회는 ‘상징적 체계들의 결합’(레비 스트로스)으로 간주 된다. 가장 강력한 상징적 질서는 법의 차원에 있다. 말이란 가장 강력한 차원에서 법의 재현인 것이다. 사회가 체계화될수록 법에서 시작해서 법으로 끝나는 경향은 강해진다. 사회는 재현적 활동만을 생산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한 재현적 활동의 중심에 말하기가 있다. 예술을 포함한 다채로운 인생의 활동들을 교육-교양의 계몽/소비로 변형시킴으로서, 예술에 내재된 혁명적이고 위험한 힘을 기성관념의 원활한 기능을 위한 한 요소로 축소시킨다. 생성을 위한 실험들, 다양한 가능성을 위한 유보적 침묵들은 소모적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예술은 생산이 아닌 소모에 바쳐진 삶이다. 위반의 철학자 바타유가 말했듯이, 소모를 통해서도 교환은 일어난다. 그것은 소유나 축적을 위한 교환이 아니라, 남김없이 소통되는 것만을 위한 교환이다. 이때 예술은 그것이 비롯된 축제를 닮는다. 잠시 열리는 무질서의 기간인 축제는 기존질서의 총아인 상징계가 위반되는 불온하고도 신성한 시기이다.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그 안에서 태어나는 인간에게 상징적 질서는 자율적 구조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화 사슬을 내면화하면서 인간은 주체가 된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기 정립을 하는 과정은 동시에 언어의 틀 속에 갇히는 것을 의미한다. 의사소통에서 언어는 주체가 활용하는 도구인가. 라깡은 말하는 주체의 통어력 결여를 주장한다. 오히려 주체는 언어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되며, 언어를 통해 세계를 전유한다. 인간은 언어에 포박된 그리고 언어로 고문당하는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라깡은 말한다. 그것은 의사소통이 정신에서 정신으로의 개념의 이동이라는 생각을 무색하게 한다. 여기에서 주체는 기표가 기표를 지칭하는 구조의 미궁 같은 체계에 갇혀있다. 현대사회의 가장 특징인 소외된 주체란, 이처럼 의미화의 사슬에 갇힌 주체를 말한다. 승화를 요구하는 상징계는 억압적이다. 특히 언어로 결정화된 주체는 승화를 방해하는 외상적인 것을 억압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외상적인 것은 성, 죽음, 폭력, 비의미 등이다. 그러나 예술은 이미 있는 것을 확실하게 말하거나, 그 주변을 장식하는 것을 넘어서 원초적으로 억압된 것, 의식에 한 번도 도달해 본적이 없는 것을 표현코자 한다. 마단 사럽의 [알기 쉬운 라깡]에 의하면, 주체가 머뭇거림이나 생략, 모호함이나 부정, 꿈, 환각, 공포와 같은 상상적 형성물, 그리고 일관성 없는 순간 등을 통해서 스스로를 설명해주는 방식은 개인의 정신적 삶을 드러내는 현상이다. 특히 기표를 다루는 존재인 작가는 실재와 기표를 동일하지 않음을 매순간 느낀다. 이러한 간극은 창작의 주된 고통이긴 하지만, 동시에 예술이 세상에 존재해야할 필연성을 알려준다. 작가란 누구나 느끼고 있었지만, 명확히 표현될 수 없었던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자이다. 언어에 의해 결정화되는 주체를 강조하는 현대 정신분석학도 존재와 사고의 불일치를 말한다. 존재는 상징계 외부의 것에, 사고는 상징계에 상응한다. 

 

주체는 사고할 때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존재할 때는 사고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라깡은 자신을 남김없이 파악하는 의식에 관한 이론인 데카르트의 코기토 이론을 뒤집는다. 이러한 괴리는 자유를 위한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예술가들의 언어는 억압적인 상징계의 자율성을 깨는 또 다른 자율적 언어이다. 예술가들의 언어는 상징계에 동화되지 않는 이질성(heterogeneity)이 있다. 그들의 언어는 사회질서의 근간이 되며 초자아의 역할을 맡고 있는 상징계를 혼란에 빠트리는 몸과 무의식을 중시한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몸과 무의식은 언어의 생사회적(bio-social) 요소로 의미와 표상을 초과한다. 이 언어는 충동을 표상하지 않고 충동을 활성화시킨다. 충동은 이질적 물질의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은 상징계의 통일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과정 속의 한 순간임을 드러낸다. 예술가들의 언어는 사회의 지배적 의사소통 기구를 부연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많은 언어들 중의 하나로 상대화한다. 

  

 

차소림, 다층적 실재 Multi -reality, 130.3 x 162 cm oil on canvas, 2010

 

 

차소림, 다층적 실재 Multi -reality, 130.3 x 162 cm oil on canvas, 2010

; 풍경화 된 언어가 등장하는 차소림의 작품은 주체와 언어, 존재와 사고 간의 괴리를 시적으로 표현한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