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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영 - 인간이 만든 인간 없는 풍경/ 이선영

sosoart 2017. 3. 24. 12:52

이채영 / 인간이 만든 인간 없는 풍경

이선영

인간이 만든 인간 없는 풍경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채영의 회색빛 풍경에는 인적 대신 흔적만 있다. 타자에 대해 좀 더 지배적인 시선을 확보하면서 자기 몸통은 숨기려는 엄혹한 시대, 파편적 단서만이 감춰진 실재를 꿰맞추기 위한 퍼즐조각으로 나타난다. 거기에는 자연과 문명이 적절하게 배분되어 있지만, 부재하는 인간만큼이나 황량하다. 대개 교외의 공장으로 추측되는 낮은 건물들은 폐쇄적이다. 입구와 창문은 바깥으로 활짝 열려있지 않고, 낡은 담장이 처져 있곤 한다. 인간의 출입이 뜸한 관계로 일정 기간이나마 자유롭게 방치되어 있는 식물들은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즉 인간의 소유권을 표시하는 경계들을 넘나들면서 그들만의 삶을 살고 있다. 화면 가득 벽을 담은 작품 [벽](2016)은 건물의 세로줄과 가로줄의 경계—부분만 보면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도 연상시키는—를 무시하며 에이리언같이 맹렬한 기세로 움직이는 듯하다. 땟국물 줄줄 흐르는 건물들로 대변되는 문명은 낡아지지만, 자연은 낡지 않는다. 경계도 없다. 문명과 뒤얽혀 있는 자연은 문명이 잠시라도 빈틈을 보이면 그 자리를 잠식한다. 




empty 128x230cm 장지에 먹 2015



truth 148x140cm 장지에 먹 2015



조우 180x230cm 한지에 먹 2015



문명의 끝 무렵에는 좋은 의미든 아니든 자연이 활개 친다. 건물이 대개 회색이나 회백색이지만, 나무는 진하게 칠해져 있고 그 조밀한 질감이 살려져 있어 강약의 대조가 분명하다. 물론 나무들은 매번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재배치되기 위해 싹쓸이되어야 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대개 풍경 속 건물 안팎의 나무들이 인간이 부여한 사용연한을 새기기라도 한 듯 별로 크지 않다. 막혀 있는 전경은 상대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공간을 침입하는 시점을 암시한다. 이채영의 작품들은 실제로 출입금지 지역을 몰래 가서 관찰하고 그린 것들이 많다. 작품 [truth](2015)처럼, 드물게 인간이 등장하는 경우는 긴장감을 준다. 펜스에 바짝 붙어있는 침엽수의 뾰족뾰족한 실루엣은 정적인 가운데 소스라치는 듯한 놀라움을 표현한다. 풍경이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대개 이러한 부적절한 시점에 의거한다. 최대한의 용적률이라는 경제적 기능만을 탑재한 근대적 건물들은 그 알량한 기능마저 탈각되었을 때 어떠한 상징성이나 장식성도 없이 쓸모없는 몸체로 서 있을 따름이다. 


그곳들은 활성화된 공간이 아니라, 방치되고 유폐된 공간들이다. 그러나 특정 기능을 상실한(또는 파악이 안 되는) 사물들은 초현실주의자들이나 발터 벤야민이 감지했듯이, 환상적으로 나타나곤 한다. 건물이 없는 경우에는 그 터가 남아있다. 오랫동안 짓눌려 딱딱해진 땅 틈새로 풀들이 줄지어 나 있는데, 그러한 배열은 결코 자연스러운 식생의 분포라고 할 수 없다. 자연에는 빈틈이라는 것이 없기에, 그곳은 서서히 자연으로 뒤덮일 것이다. 그러나 [재생](2015)에 나타나듯, 부랴부랴 또 다른 최악의 건물들이 들어서면 잠시 무정부주의적인 자유를 구가했던 자연들은 무자비하게 잘려나갈 것이다. 인적 없는 건물들은 곧 사라지는 것이고, 그 사라짐이 실현된 장소에 줄지은 잡초들은 사라짐을 증언한다. 그것은 ‘사라짐의 현현’--모리스 블랑쇼가 ‘문학의 공간’으로 비유되는 밤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던—이라고 표현해야할 역설적인 광경이다. 무언가 있던 것이 지워졌다. 이러한 지우기는 실제에서 먼저 일어났고, 단서들을 통해 추측된다. 




 오후 2시 97-130cm 장지에 먹 2012



오후 2시 97-130cm 장지에 먹 2014



재생 180X230cm 한지에 먹 2015



7월의 공기  130.5x194cm 장지에 먹 2015



그것들은 그저 눈에 들어온 광경이 아니다. 사진은 물론 수많은 드로잉을 거쳐 면밀하게 프레임이 선택되고 편집된 이채영의 풍경은 이러한 지우기와 강약조절을 가속화한다. 작품 [7월의 공기](2015)는 제목이 아니라면 계절을 알기 힘들다. 물론 안마당이 있는 그 건물이 뭐하는 곳인지도 알 수 없다. 이러한 고의적인 삭제는 작가가 사는 동네나 발 닿는 대로 여행했던 한국의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그곳은 어디에나 있음으로 인해 어디에도 없는 장소인 것이다. 모래 폭풍에 의해 매번 이전의 지표가 사라지는 사막에 서있는 듯한 상황이다. 시멘트 빛 삭막함이 편재하는 그곳들은 주거지라기보다는 생산을 위한 곳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낳는다. 산업자본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다수의 인구들을 먹여 살리면서 활기차게 돌아갔을 생산 공장들은 생산력의 진보에 따른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변신을 준비하기엔 기력이 쇠한 몸체들로 나타난다. 산업시대의 전성기를 지나 이제 예술가들이 접수하고 있는 문래동같이, 좀 더 접근성 있는 장소라면 낡음조차 새로움, 또는 대안성을 표시하는 기호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채영의 풍경에는 그 다음의 무엇이 생겨나기 이전의 과도기적인 시공간이 잡혀있다. 현대미술은 이 과도기적인 시공간을 자기 것으로 취해왔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상황은 불안정하지만 자유롭다. 이채영의 풍경에 깔려있는 쓸쓸한 자유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젊은이로서의 자의식이 드러난다. 풍경은 또한 인간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인간을 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주시할만한 것이 없는 장소에 대한 응시만을 보여준다. 굳이 인간적인 비유를 들자면, 인간의 부재나 한 가득 있던 것이 빠졌을 때의 공허함이다. 펜스 안쪽에 줄지어 자란 잡초들이 있는 풍경 [empty](2015)는 말 그대로 공터이다. 무엇인가 새로이 세워지기 보다는 무너지는 것이 더 아름답게 다가오는 시대를 포스트모던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폐허에 대한 감수성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낭만주의와 연결시킨다. 다만 이제는 기술과 결합된 (신)낭만주의이다. 




낮달 97x320cm 한지에 먹 2015



새벽 2시 130x162cm 한지에 먹 2010



새벽3시 30분 71-93cm 한지에 먹 2011



‘오래 묵은 풍경’을 그릴 지언정 원초적 자연을 그리지 않는 이채영의 작품은 기술 이후의 자연을 말한다. 과밀과 밀집을 낳은 근대적 도시는 자체의 무게로 붕괴되어 갈 것이다. 곳곳에 빈 곳이 생겨나고 이 빈 중심으로부터 새로운 것이 생겨날 것이다. 이채영이 즐겨 그리는 공터는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회색조의 풍경이라 날씨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밤풍경이든 낮풍경이든 쨍하게 다가오는 낯섦이 있다. 제목에서 암시될 수 있는 시간대인 오후 2시나 3시는 남 들 일하는 시간에 어슬렁거리는 아웃사이더의 시선을 떠올린다. 썰렁한 낮 풍경은 작가가 발견한 장소의 특징이기도 하겠지만, 초기의 밤풍경의 또 다른 버전이다. 새벽까지 그림에 몰두하다가 귀가하는 길모퉁이의 풍경이 있는 작품 [밤 12시](2014), [새벽 2시](2010), [새벽 3시 30분](2011)은 비루한 일상의 무대가 강렬한 명암대비로 조명된다. 거기에는 먹으로 수없이 쌓아올린 깊이 있는 색감으로 표현된 어둠이 깔려 있다. 


이전의 밤풍경에도 인간은 잘 등장하지 않고, 대신 사물들이 인간의 서사보다 더 설득력 있게 상황을 표현한다. 작가는 사람이 많이 살법한 도시에서는 인적이 드문 시간대를 선택했고, 오후 2-3시의 풍경에서는 낮이면서도 밤의 느낌을 주는 장소를 찾아낸 것이다. 도시의 야경과 마찬가지로 강렬한 가로등 불빛이 공격적으로 사물들을 비추는 곳은 적막하고 고요하지만 밤의 진정한 휴식과 거리가 있다. 휴식은 보다 무위의 장소에서 찾아진다. 서울 인근에서 발견되는 휴지기의 장소는 오후 2시가 되었든 3시가 되었든 밤인 것이다. 그것은 낮같은 밤에서 밤 같은 낮으로의 이동이다. 최근에는 건물이나 건물터는 빠지고 자연만 포착된 작품들을 그린다. 웅덩이나 연못에 비친 나무 풍경은 본래의 모습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반영상이 차지하는 부분이 더 넓게 차지한다. 진실은 하나지만 가상은 여럿이다. 거기에는 위험을 무릅쓴 변화에의 바램이 담겨있다. 이때 자연은 귀감이 된다. 자연은 문명보다  낯설다. 문명이 인간을 중심으로 구축된 것이라면 자연에는 그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응시 72.5-91cm 장지에 먹 2014



소리 97-130cm 한지에 먹 2014



여행자나무. 148x140cm 장지에 먹 2015



새로움을 모색할 때 자연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상상과 상징을 넘어선 실재계의 힘이 감지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작품에는 2015년 포스코 미술관에서의 큰 전시 이후 변화에의 모색이 담겨있다. 나무가 전면에 드러나 있는 작품에서는 무정부주의적 충동이 드러난다. 깊은 산속의 나무라기보다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산책로 등에 서 있을 법한 나무들인데, 특이한 점은 나무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깊이 뿌리를 내리고 태양을 향해 균형감 있게 가지를 뻗은 그런 ‘반듯한’ 나무가 아니라, 가는 줄기에 덥수룩한 가지들로 어수선한 모습이다. 그것들은 인간이 따로 심거나 관리하는 나무가 아니라, 인간 손과 발이 닫기 힘든 우묵한 곳에서 자생적으로 자란 나무들이다. [여행자 나무](2015)라는 독특한 제목은 나무—들뢰즈에게 탈주해야 하는 체계의 상징—라기보다는 리좀에 가까운 야생성을 표현한다. 그것은 한 갈래의 유효한 길이 아니라, 지도 화 할 수 없는 자잘한 선들로 갈라지는 길을 ‘유목하는’ 존재들이다. 인간이 한번 다 쓸고 간 시멘트 빛 사막 같은 곳에서 다시 시작되는 자연은 인간 이후(post-human)의 풍경을 예견한다.       

 

출전; 경기창작센터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