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기다림/ 이성복
기다림/ 이성복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 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봅니다
나는 팔도 다리도 없어 당신에게 가지 못하고
당신에게 드릴 말씀 전해 줄 친구도 없으니
오다가다 당신은 나를 잊으셨겠지요
당신을 보고 싶어도 나는 갈 수 없지만
당신이 원하시면 언제라도 오셔요
당신이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셔요
나는 팔도 다리도 없으니 당신을 잡을 수 없고
잡을 힘도 마음도 내겐 없답니다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 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보니
첩첩 가로누운 산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집니다
- 시집『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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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산>에 이은 이성복의 제3시집 <그 여름의 끝>을 두고 평론가 남진우는 소월과 만해의 시적 계보를 잇는 연애시의 새 진경이라고 했다. 시집에는 ‘당신’을 향한 사랑노래가 빼곡하여 독자들도 그를 연애시인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남해 금산>의 ‘편지 1’에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라고 이미 토로한 바 있지만, 이 시집의 ‘서시’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 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이처럼 사유는 더 심화되었고 감정은 더욱 절절해졌다.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기본적으로 ‘나’와 ‘당신’의 관계가 바탕 되어 ‘당신’의 실재와 부재 사이에 내재한 삶의 비밀을 캐물어 가는 사랑노래였다. 나의 삶에는 부재하는 당신이라는 그리움의 존재, 그리고 이 같은 그리움이 삶을 흐르게 한다는 사실, 흐르는 삶의 길 위에서 내가 당신을 향해 부르는 사랑노래. ‘숨길 수 없는 노래 2’에서도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며,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고 했다. 사랑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며, 그 그리움은 기다림으로, 기다림은 때때로 서러움의 봉분이 된다.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보니” 기다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일로 망부석이 될 수밖에. 당신의 사랑이 없는 나는 정처 없으므로 의미 없는 삶의 강물 위로 그저 흐를 뿐. 당신 오기만을 기다리며 “첩첩 가로누운 산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집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는 큰 소리로 말했다. ‘사랑이 그대들에게 따라오라 손짓하면 주저 말고 그를 따라가라’ ‘그 길이 비록 험하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감싸 안을 때면 모든 것을 맡기라’ 사랑은 사랑으로 충분하며 완전하리라. 그래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에 사랑의 아픔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진정으로 사랑하였기에 상처받게 되기를’ ‘상처로 피 흘리면서도 사랑을 위하여 마음은 늘 기쁨에 차 있기를’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