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김용택의 시 이야기] 사랑
sosoart
2013. 6. 19. 22:11

- [김용택의 시 이야기] 사랑 김용택의 시 이야기 2013.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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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들 그런 달콤한 시간들을 보내지 않았을까. 날아가는 새를 보며 누군들 사랑하는 그 여자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누군들 사랑으로 인하여 세상을 배우고,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생각하지 않은 사랑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 아름답고도 애잔하고 애틋한 사랑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아리고 아픔을 다스리면서 말이다.
-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지난 몇 개월은/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하지만 지금은/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생각해보고 있습니다./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그래도 마음속의 아픔은/어찌하지 못합니다./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어디선가 또/새 풀이 돋겠지요./이제 생각해보면/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당신을 잊으려 노력한/지난 몇 개월 동안/아픔은 컸으나/참된 아픔으로/세상이 더 넓어져/세상만사가 다 보이고/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예뻐 보이고/소중하게 다가오며/내가 많이도/세상을 살아낸/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당신과 만남으로 하여/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고맙게 배웠습니다./당신의 마음을 애틋이/사랑하듯/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당신의 어깨에/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한 봄입니다./행복하시길 빕니다./안녕. - ‘사랑’ 전문, 김용택 지음
- 어느 해 새 학기였다. 학년과 반이 바뀌어 다른 반 교실로 옮겨가기 위해 교실과 책상 서랍을 정리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종이, 연필과 볼펜, 칼, 잣대, 온갖 것들이 뒤죽박죽이었다. 나의 1년이 이렇게 어지러워져 있다는 생각을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서랍을 쓰레기통에 대고 왈칵 쏟아버렸다. 시원했다. 서랍을 다시 책상에 끼워 넣고 보니, 흰 편지 봉투가 서랍 바닥에 붙어 있었다.
어라! 이것이 뭐여? 쓰레기통에 던지고 나니, 뭔가 이상했다. 다시 집어 들고 봉투 속을 열어보았다. 편지 종이가 들어 있었다. 편지 종이를 꺼내어 펼쳐 보았다. 연필 글씨였다. 이게 뭐지? 편지를 읽어보았다. 나와 같이 근무하다가 이웃 학교로 전학 간 여선생의 편지였다. 나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슬픈 편지였다. 현실에서 운운하는 현실이라는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잊을 건 잊어야겠다’는 말도 절절했다.- 여선생은 웃는 게 귀여웠다. 어렸다. 수줍어했다. 쉬는 시간이면 우리 교실에 와서 놀다 가기도 하고 내가 풍금이 서툴기 때문에 우리 반 음악을 해주고, 나는 그 여선생 반 체육을 해주기도 했다. 1년이 넘게 같은 학교에 근무했다. 초등학교 선생을 그만두고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친구가 놀러 왔다. 무엇이든지 다 믿을 수 있는 듬직한 친구였다. 예의 바르고 순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나는 여선생과 이 친구를 소개해주기로 하고 전주에서 만났다. 둘이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했다. 친구가 서울에서 내려오면 자주 만나는 모양이었다. 둘이 잘 되어 가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여선생이 우리 교실로 왔다. 마주 앉았다. 여선생이 울고 있었다. 이상한 말을 했다. 잘 이해가 가지 않은 이유로 친구가 헤어지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결혼도 해 보지 않고 어떻게 그런 이유를 대고 헤어지자고 하다니, 나는 그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그냥 헤어지기로 했다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는지 당사자들만 아는 일이 그 사랑이라는 사건(?)이 아닌가.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여선생은 다른 학교로 갔다.
서랍에서 나온 것은 어느 날 여선생이 연필로 당시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본다고 내게 썼던 편지였다. 여선생의 글을 읽어가며 한 편의 시를 생각했다. 편지는 차분했다. 그리고 거짓이 없었다. 그 무렵 나도 좋아하는 여자와 헤어졌던 것이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건 잊어야겠지요.’ 이 문장 뒷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를 써넣었던 것이다. 그 여자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지는 해를 바라보았고, 나는 길가에 피어 있는 풀꽃 한 송이만 보아도 그 여자에게로 이어지던 날들을 보냈던 것이다.
누군들 그런 달콤한 시간들을 보내지 않았을까. 날아가는 새를 보며 누군들 사랑하는 그 여자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누군들 사랑으로 인하여 세상을 배우고,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생각하지 않은 사랑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 아름답고도 애잔하고 애틋한 사랑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아리고 아픔을 다스리면서 말이다.
- 세월이 갔다. 그리고 또 그 어느 봄날이었다. 봄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내 방에서 책을 보고 있었고, 아내는 어머니 방에서 어머니와 도란도란 놀고 있었다. 볼일이 있어 잠깐 밖으로 나오다가 방 안에서 아내가 시를 읽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이라는 시였다. 글자를 모르는 어머니에게 내 시를 읽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길가에 풀 꽃 하나만 봐도 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 그 구절을 읽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가만, 가만있어봐라. 거기가 참 좋다” 하는 것이 아닌가. 아내가 시 읽기를 뚝 그쳤다. 나도 어머니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내가 “왜요?” 그러니까 “아니, 거기가 내 이야기를 용택이가 해 놓은 것 같구나” 하셨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이야기 해 놓았느냐며 나를 칭찬했다.
그러시면서 어머님은 아버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베어 놓은 감나무 밑에 있는 풀 한 줌, 아버지가 가꾸어 놓은 감나무 한 그루, 논과 밭 곳곳의 모든 하찮은 것들을 볼 때마다 아버지가 생각난다는 것이었다. 솔방울 하나, 밤하늘에 떠 있는 달, 아침 안개가 다 아버지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 구절이 글자를 모르는 어머니 마음에 가닿았던 것이다. 사랑은 사람을 키운다. 사랑을 통해 사람들은 큰 사랑을 얻는다. 가는 봄을 잡을 수 없듯 떠나가는 사랑도 잡을 수 없다. 이별 없는 사랑, 상처 없는 사랑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저렇게 봄날은 간다.- 출처: 국민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