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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신과 우주의 코드를 풀어낸 예언가, 미셸 드 노스트라다무스
sosoart
2014. 2. 20. 18:49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신과 우주의 코드를 풀어낸 예언가, 미셸 드 노스트라다무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등록일2014.02.14
- “오늘 어떤 색의 옷을 입으면 되지?”,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지금 당장 눈앞의 일도 모르는 우리는 늘 내일을 궁금해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도 우리의 불안과 호기심까지 해결해주진 못했다.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 다운로드 순위에 오늘의 운세나 사주, 토정비결 등이 상위권이 올라가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미래가 궁금했던 것은 과거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에겐 미래를 읽어주던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가 있었다.

과학기술의 발전도 ‘미래 예측 산업’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낮추진 못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집안은 그리스계 세파르디 유대인(지중해·중동계 유대인을 지칭하는 용어)으로 본명은 가소네(Gassonet)이다. 이 가계는 유럽 종교재판 시대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 마라노(Marano)’다. 마라노는 교권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형식적으로만 개종했지 가정에서는 계속 유대교 계율을 지켰다. 그래서 당시 마라노를 진정한 기독교도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호기심과 상상력이 많았던 노스트라다무스는 아비뇽 대학에서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수학, 약학, 물리학, 점성술 등을 배웠다. 이후 몽펠리에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지만, 중도에 퇴교당했다. 약제사 전력이 학칙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이후 툴루즈 근방 아쟁(Agen)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약제사로 활동하면서 당시 유럽 전역에 퍼진 페스트의 특효약인 ‘ 장미 환약’을 개발해 많은 사람을 구했다.
방랑벽이 심한 노스트라다무스는 1540년부터 약 20여 년간 프랑스와 이탈리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이적(異蹟)을 행했다. 1553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중 그는 우연히 만난 청년 수도사 펠리체 페레티 디 몬탈도 앞에 무릎을 꿇었다. 1585년 교황 식스토 5세가 되는 인물을 미리 알아본 것이다.
프랑스로 돌아온 노스트라다무스는 마르세유 부근 살롱 드 프로방스에 정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예언서를 집필했다. <제세기(諸世紀, Les si?cles)>와 <예언집(Les proph?ties)>이다. 이 예언서들은 고대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쓰여졌고 4행시와 난해한 운문(韻文)의 형식을 빌렸다.

미셸 드 노스트라다무스
노스트라다무스는 고향에서 의술과 예언으로 여생을 보내다 1566년 통풍의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죽는 날짜와 시각까지 예언했으며 매장 방법과 함께 도굴에 대비한 이장(移葬) 시기와 장소 등을 지정한 유언장을 남겼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시공을 초월했다. 프랑스 앙리 2세의 죽음, 프랑스 대혁명과 루이 16세의 처형, 나폴레옹의 부상, 러시아 공산 혁명, 히틀러의 등장, 2차에 걸친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 히로시마 핵폭탄 투하, 케네디 암살, 유럽 공동체 태동, 공산권 붕괴, 9·11 테러 등을 예언했다. 그리고 그의 2012년 지구 종말론의 진위(眞僞) 해석을 두고 노스트라다무스 연구자 간 열띤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타고난 영기(靈氣)와 초인적인 통찰력으로 500년 이후의 세상을 내다봤다. 혹자는 그가 천사장 미카엘의 환생이었다고도 주장한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천체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영감을 얻은 후 청동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치면서 신의 계시를 받아 신통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대체로 신빙성이 뒷받침됐다. 다만 몇 가지는 후세 사람들이 결과를 놓고 역으로 추적해 작위적으로 해석했다는 지적도 있다. 예언 대부분이 난해하게 압축된 선문답 형이므로 예언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의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데도 어려움이 따랐다. 프랑스와 일본에서는 아직도 노스트라다무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그의 예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담은 책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1568년 출간된 <예언집> 옴니버스판 일부의 표지
출처: KB레인보우인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