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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은 로마가 될 수 있을까?

sosoart 2010. 3. 3. 12:57

한양은 로마가 될 수 있을까? [오경택]
2010-03-02 오후 04:34

요즘 서울시에서 발견되고 있는 문화재 때문에 언론매체건 시민단체건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난리다. 최근 조사가 끝난 동대문운동장부지, 청계천, 서울시청, 중학천, 서울성곽, 청진지구 등 서울시내 도처에서 조선시대의 각종 유구와 유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과연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중심가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문화재계통에 종사하는 사람이건 문화재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건 대부분의 사람들은 콘크리트 빌딩 숲을 이룬 서울 중심가에 있는 문화재에 대해 묻는다면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등의 궁궐에 대해서만 떠올린다. 여기에서 조금 더 외곽으로 확대시킨다면 암사동 선사유적지와 최근 대규모 무덤들이 발견되었던 은평 뉴타운 정도만 인식하고 있다.


고지도를 살펴보면 조선의 수도 한양에는 여러 궁궐과 각종 관청건물, 일반 백성들이 이용하였던 시전과 여러 건물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현대화과정에서 고스란히 사라졌을까? 아니다 서울의 도처에 조선은 살아 있다! 정확히는 조선시대 600년의 역사가 곳곳에서 제발 나를 알아봐 달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서울 중심지의 매장문화재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은 지난 2004년 최초로 종로1가 북측 청진동 일대의 청진6지구(현재 르메이에르 종로타운)에서 조선시대 600년에 걸친 건물터가 층층이 쌓인 채 발견되어 많은 놀라움을 주었다.

 

조선 600년 동안 퇴적된 많은 유구와 유물들이 약 4∼5m깊이까지 각 시대별로 떡시루에 쌓여있는 떡처럼 한겹 한겹 쌓여 있었다. 조선시대 600을 대별하고 있는 문화층은 총 5겹으로 확인되었는데, 즉 조선왕조 600년의 역사가 각기 100년을 이야기해주는 1m남짓한 두께의 흙에 담겨져 있는 것이 총 5겹으로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어떻게 이와 같은 형태로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을 수 있었던 것은 현재도 마찬가지로 건물을 짓기 위해 가장 중요한 기초공사를 하는데 있어 기존의 건물기초를 재활용하였던 점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것 같다. 기초공사를 위해 터를 닦는 과정이 기존의 건물을 부수거나 현대의 공법처럼 흔적도 없이 도려내고 다시 쌓는 것보다는 기왕에 닦여진 터 위에 약간 정리만하고 짓는 것이 편했을 것이다. 여기에 청계천 등 하천의 범람이 일조하였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상황은 건물을 증축하거나 신축하였을 때 각각의 영역(현재의 지적 영역)안에서만 자유로웠을 것이다.

 

조선의 각 시대를 대별하고 있는 이 1m 남짓한 두께의 흙층에는 조선시대 건물이 있었던 흔적인 각종 석재들과 목재, 기와 등과 실생활에 사용하였던 자기, 도기, 유리 재질의 그릇, 장신구 등이 출토되고 있다. 이들을 통해 각 시기별로 건물의 배치나 온돌의 변화과정이랄지 어떤 그릇들을 쓰고 살아왔는지 등 헤아릴 수 없는 무궁한 많은 정보를 케내고 있다.

 

최초로 발굴조사 된 청진 6지구의 예를 살펴보면 대표적인 유구인 市廛行廊과 중상인 계층의 건물터가 발굴되었다. 현대의 지표층인 가장 위쪽의 제1문화층은 근현대층으로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층이다. 이 시기에 지어진 각종 한옥집들과 현대의 콘크리트 건물 등이 각각의 영역안에서 노출되었는데, 이 중 주목할 만한 것은 한 채의 한옥집에서 나무를 연료로 하던 온돌시설에서 연탄보일러, 기름보일러, 가스보일러 등의 순서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이 발굴조사과정에서 나타나 우리의 근현대 생활상의 변화과정이 땅 속에서 고스란히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아래인 제2문화층은 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용되었던 층으로 한옥과 관련된 기초석재와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으며, 개화기와 관련된 서구 및 중국, 일본과 관련된 도자기 등이 수습되었다. 제3문화층은 조선후기에 해당하는 문화층으로 조선후기의 시전행랑 및 피맛길의 흔적과 만드는 방식을 달리한 각종 건물터와 우물 등이 확인되었다. 제4문화층은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중기에 해당되는 시전행랑 건물과 건물터, 도자기 등이 발굴조사되었으며, 제5문화층에서는 조선건국 후 나라의 기틀을 세우며 만들어진 최초의 시전행랑 건물터들과 각 종 건물 및 집터가 확인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임진왜란 등 전란의 피해로 불에 탄 채 노출되었다.

 
 

이밖에도 동대문운동장부지에서는 파괴되어 없어진 줄 알았던 조선시대 관청인 하도감과 이간수문, 서울성곽 등이 육의전빌딩부지에서는 청진6지구와 유사한 시전행랑 및 건물터가 청진1지구에서는 국보급 백자입호, 서울시청부지의 군기시와 관련된 불랑기포 및 각종 무기류가 쏟아져 나왔다. 현재에도 기무사부지, 미대사관사택부지인 송현동, 청진5지구, 청진2-3지구, 청진 12-16지구 등지에서 수많은 유구와 유물이 쏟아져 나와 조선의 수도 한양을 몰라주고 방치해온 것에 대해 유적들이 서운함을 표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서울시내, 특히 그 중에서도 4대문 안의 古都지정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며, 학계와 시민단체들은 그 결과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들 한목소리로 문화재보존에 대한 목소리를 내지만 과연 이것이 내 평생 모은 재산, 본인 개인의 재산권을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개발로 인한 보상금이 한몫 잡는 것으로 당연시되는 이 시대에 말이다.

그렇다면 국가에서 해결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지금도 각종 세금에 치여 사는 우리에게 세금을 더 확보해서 한다고 하면 얼마만큼의 국민이 동의할 것인지 더더욱 의심스럽다.

 

어린 학창시절부터 국사시간을 비롯해 역사를 배우며 항상 들어왔던 말은 선조들의 소중한 유산을 지켜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는 개발이냐 보존이냐의 흑백논리를 떠나 이제는 더 이상 더 우리 선조와 후손들에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개인의 권리도 지키며, 국민 대다수가 만족할 수 있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큰 틀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이다.



▲ 문화재청 김포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오경택 감정위원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