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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예일치學藝一致 국왕의 덕성은 백성의 삶

sosoart 2010. 3. 3. 13:00

학예일치學藝一致 국왕의 덕성은 백성의 삶
2010-02-12 오전 11:36




“왕은 새벽 두 시가 되면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고, 날이 밝으면 신하들을 만나 정사를 보았다. 신하를 교대로 만나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물었고, 임지로 가는 수령에게 백성을 사랑하라고 타일렀다. 경연에 나가 학문에 몰두하고, 내전에 들어가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다가, 밤중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여진과 일본을 복종시켜 나라 안이 편안했고, 백성들이 살아가기를 즐거워한 것이 무릇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아 사람들은 해동의 요순堯舜이라 불렀다.”

세종이 사망하던 날 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국왕이 얼마나 정치를 잘 했으면 백성들이 그의 백성으로 사는 것을 즐거워하고 최고의 성인으로 꼽았던 요순과 같은 사람이라고 했을까? 이는 물론 세종이 좋은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지만, 국왕 교육을 통해 길러진 것도 많았다. 그렇다면 조선의 국왕은 과연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효명세자의 입학식

국왕 교육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행사가 있는데, 성균관에서 거행되는 입학식이다. 1817년 3월 11일, 순조의 맏아들인 효명세자의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창덕궁을 출발하여 성균관에 도착한 세자는 학생복으로 갈아입었고, 대성전에 들어가 만세의 스승인 공자의 신주 앞에 술잔을 올렸다. 대성전의 제례가 끝나면 세자는 명륜당으로 가서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했는데, 이날의 스승은 대제학을 지냈던 남공철이었다. 명륜당에서 스승과 제자가 얼굴을 마주하고 앉았다.

세   자 : 어떻게 하면 성인聖人이 될 수 있을까요?

남공철 : 성인이 되실 것을 스스로 기약하시니 이런 마음을 잘 미루어 확충해 나가시면 됩니다.

세   자 : 효도를 하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남공철 : 부모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효도는 자신을 수련하고 집안을 다스리며 나라와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이 됩니다.

이날 입학식에는 수많은 구경꾼이 있었다. 세자의 교육을 전담하는 세자시강원 관리와 성균관 유생들이 모두 참여했고, 창경궁에서 성균관에 이르는 길가에는 수천 명의 백성들이 나와 구경했다. 세자는 스승에게 갖춰야 할 예절을 깍듯이 실천했는데,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며 간단한 예물을 올렸고, 이동할 때 스승에게 격이 높은 동쪽 계단을 양보했다. 강의실에 들어가 스승에게 먼저 절을 올렸고, 수업 내내 책상을 놓지 않고 땅바닥에 엎드려서 책을 보았다.

입학식은 열 살 전후의 세자에게 무척 힘이 드는 행사였다. 그렇지만 상당한 교육 효과가 있었는데, 세자는 이런 수련을 통해 덕망을 갖춘 국왕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백성들은 세자의 시범을 보며 오륜을 실천하도록 자극받았다.




국왕 교육의 네 단계

조선시대의 국왕 교육은 보양청, 강학청, 서연, 경연이라는 네 단계로 구분된다. 보양청 교육은 원자(맏아들)나 원손(맏손자)이 태어난 직후에 있는 교육으로, ‘보양輔養’이란 이름에서 보듯 실제 교육이 이뤄지기보다는 유아의 성장을 지켜보는 의미가 컸다. 원자나 원손이 글을 읽기 시작하면 보양청 교육은 강학청 교육으로 바뀌었고, 보양청 스승은 그대로 임명되었다. 강학청 교육은 기초교육이라 할 수 있는데, 왕자가 성장함에 따라 횟수가 많아지고 강의 시간도 늘어났다.

서연 교육은 세자시강원에서 실시하는 교육인데, 세자 한 사람의 교육을 위해 20명의 스승이 배치되고 강의의 종류도 다양했다. 특히 보름에 한 번씩 있는 회강會講은 시강원 관리가 모두 참석하여 세자의 학문을 중간 점검하는 것으로, 세자는 책을 보지 않고 외우고 책을 보면서 뜻풀이를 해야 했다. 한편, 세손의 교육은 세손강서원이 담당했다.

경연 교육은 국왕을 위한 교육으로 세자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시작되었다. 세자가 국왕이 되면 이전 교재를 그대로 배우지만 책을 보지 않고 외우는 부담은 면제되었다. 국왕들은 말년까지 경연을 계속했는데, 끊임없이 학문을 연마하고 인격을 수양해야 성군聖君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네 단계로 이루어진 국왕 교육은 모두 기록으로 남았다. 각 관청의 관리들이 매일 일기를 썼기 때문인데, 보양청일기, 강학청일기, 강서원일기, 동궁일기, 경연일기가 그것이다. 조선에서 원자로 태어나 정상적인 교육을 거쳐 국왕이 된 사람이라면 그가 받았던 교육의 내용을 오늘날에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지성과 감성을 발달시키는 교육

유아기에 이뤄지는 강학청 교육에는 한글이나 체조 수업이 있었지만, 세자로 책봉된 이후의 교육은 유교 경전과 역사서가 기본 교재였다. 사서와 삼경을 위주로 하는 경전 교육은 덕성을 함양시키는 교육이었고, 중국과 한국의 역사서를 익히는 것은 역사적 지식과 안목이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역사서로는 『조감』, 『자성편』, 『국조보감』, 『갱장록』, 『모훈집요』 같은 책이 있었는데, 이는 조선의 태조부터 정조까지 역대 국왕들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조선은 성리학에 학문적 바탕을 둔 국가였으므로 성리학 교재도 많았다. 성리학 교재에는 중국 책이 많았지만, 이황이 편찬한 『주자서절요』, 이이의 『성학집요』, 정조의 『주서백선』 같은 책도 활용되었다.

국왕이라면 신하들이 올리는 각종 문서를 읽고 처리하는 능력이 있어야 했다. 또한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려면 유교 경전을 인용하며 자신의 정치 이념을 밝히고, 중국과 조선의 역사적 사례를 거론하며 자신의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는 학문적 기반을 갖추어야 했다. 따라서 국왕 교육에는 이런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교재들이 사용되었다.

조선의 국왕은 시인이었다. 국왕 뿐 아니라 유학자가 모두 시인이었다. 국왕은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신하들과 어울려 시를 지었고, 궁궐에 혼자 있으면 혼자서 시를 지었다. 아끼는 신하가 사망하면 그의 영혼을 위로하는 글을 지었다. 국왕이나 유학자의 문집에서 시집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시 짓는 일이 그만큼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국왕은 서예나 그림, 음악에도 일정한 수련을 쌓았다. 국왕의 글씨는 어필御筆이라 하는데, 선조, 효종, 숙종, 영조, 정조의 글씨는 예술작품이라고 할 정도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국왕이 그린 그림도 상당수가 남아 있으며, 세종과 정조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는데 정조는 『악통』이라는 음악이론서를 편찬할 정도였다. 조선의 국왕 교육은 학예일치學藝一致라고 하여 학문과 예술을 일치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지성과 감성을 고루 발달시키는 교육을 받았다고 하겠다.

 


덕성을 갖춘 성군聖君

국왕 교육에서는 무엇보다도 덕성이 강조되었다. 왕자의 스승을 선발할 때 덕망이 첫째 조건이었는데, 제자가 스승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배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자가 처음 배우는 『소학』에는 기본예절로 채워져 있었는데, 이는 국왕이 되어서도 실천하는 예절이었다. 국왕은 아침에 일어나면 왕실의 어른께 문안 인사를 올렸고,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감했다. 부모님이 식사를 하시면 음식 맛을 미리 보았고, 병환을 앓으면 한약을 달이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오늘날의 교육이 지식 위주의 교육이라면 조선의 국왕 교육은 덕성의 함양을 중시했다.

국왕의 덕성은 백성들의 삶으로 이어졌다. 국왕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비판하는 신하들의 건의를 경청하는 아량이 필요했고, 어려움에 빠진 백성들의 고통을 보살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씨가 필요했다. 어릴 때부터 궁중의 안락한 생활에 젖은 국왕이 이런 아량과 마음씨를 갖추려면 무엇보다 덕성이 필요했다. 세종이 요순과 같은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덕성을 중시하는 국왕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글·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사진·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