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vard Munch Expressionism Norwegian painter and printmaker 1863. 12.10 ~ 1944.1.23.
Melancholy Oil on canvas 1894-95 81 x 100.5 Rasmus Meyer Collection Bergen Norway
나의 모친의 가계는 농부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들은 강한 의지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 뿌리까지 어지럼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에 감염되어 있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아버지의 선조들은 천재적인 소질을 갖춘 시인이었지만 이들도 이미 타락의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태어났을 때 곧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둘러 세례를 받게 했다. 그때 이미 어머니는 죽음의 씨앗을 몸 안에 갖고 있었다. 6년 후 어지럼병이 다섯 어린 아이들에게서 어머니를 앗아갔다.
그렇게 병과 정신착란과 죽음이 마치 검은 천사처럼 내 요람을 지키고 있었고 일생 동안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동시에 하려 애썼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울하고 신경질적이 되었다. 부담에 겨워 핼쓱해졌고 주기적으로 종교적인 발작을 보였는데, 그것은 하루 종일 방 안에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며 신을 불러대는 광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일찍 이 지상의 삶의 비참함과 위험요소들을 알아버렸고 또 죽음 이후에 오는 삶과 죄진 인간을 기다리는 지옥의 영원한 고통에 대해 들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이러한 종교적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우리와 장난치고 놀며 우리에게 동화를 들려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벌을 줄 때 그 영혼의 고통을 감내하기가 두 배나 더 어려웠다. 나는 아버지의 신경증적인 광포함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 에드바르트 뭉크 -
이 그림을 보자 갑자기 마음이 내려앉으며 스산해 졌다. 나는 어느새 그림 속으로 들어가 뭉크가 되었다. 해진 후의 저녁 어스름, 인적 없는 쓸쓸한 바닷가에 턱을 고인 채 쭈그리고 앉아 말없이 내려 깔은 막연한 시선. 안으로, 안으로 깊이 침잠 하면서 어두운 우울로 빠져 들었다. 갈 곳 없는... 우울하고 울고 싶은 이 심사!
뭉크가 이토록 절절하게 그려 냈다. 애착과 연민으로 출렁이게 한 그림이다.
Evening on Karl Johan Street Oil on canvas 1892 84.5 x 121 cm Rasmus Meyer Collection Bergen Norway
“나의 아버지는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이었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나는 광기의 씨앗을 물려받았다. 공포, 슬픔, 그리고 죽음의 천사는 내가 태어나던 날부터 나의 옆에 서 있었다.”
인간이 갖는 욕망과 질투, 우울, 슬픔, 고독의 감정들을 그는 반복해서 되 뇌였다. 이 같은 강박관념을 이겨내지 못하고 질병에 시달리며 신경쇠약에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했으며 그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행복해 할 수 있었다.
뭉크의 작품으로 인해 당대 표현주의 화가들은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뭉크는 정작 표현주의 화가이기를 거부했다. 인간의 고조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 냈다는 점에서 그는 표현주의 화가들이 쉽게 넘나들지 못하는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Aunt Karen in the Rocking Chair Oil on canvas 1883 47 x 41 cm Munch Museum Oslo Norway
아버지의 우울한 성격, 다섯 살 때 겪은 어머니의 죽음, 썩 좋지 못한 뭉크자신의 건강상태, 두 살 위의 누이 소피아의 죽음 등 뭉크의 유년시절을 가득 채운 죽음의 공포와 죽음에 이르는 불안은 평생 동안 뭉크를 사로잡았고, 이는 뭉크가 자신의 예술세계에서 항상 돌아가는 ‘불행했던 기억들’이다. 1868년 어머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뜨고 난 뒤 이모인 카렌 비욜 스타드가 집안일을 꾸려 나갔다. 그녀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기 자신을 전부 희생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뭉크 가정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Moonlight Oil on canvas 1895 93 x 110 cm Nasjonalgalleriet Oslo Norway
사는데 즐거움이 별로 없었으며, 다른 이들과의 모임을 즐긴 적이 없는 뭉크는 실제로는 삶을 열렬히 사랑하였으므로 결국 자신의 그림들과 하나가 되어 거기서 살기를, 자신을 용해시켜 그 안에 여전히 존재하길 원했다. 그리하여 이 그림들을 통해 사람들 속에서 수백 년이고 살아가며 기쁨을 주고 영향을 미치길 희망했다.
그가 소장하고 있던 모든 작품들은 유언에 따라 오슬로 시에 기증이 되어 지금 뭉크 미술관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그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한 인간 내면의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Death in the Sick Chamber Oil on canvas 1895 150 x 167.5 cm Nasjonalgalleriet Oslo Norway
아버지 크리스티안과 어머니 레우라의 금슬은 매우 좋은 편이었다. 뭉크의 어머니는 8년간의 결혼생활 끝에 결핵으로 죽었을 당시 30세였다. 그녀는 일곱 살의 소피에, 다섯 살의 에드바르드, 세살의 안드레아스, 두 살의 로이라, 11개월 된 잉게르 등 어린 아이 다섯을 두고 갔다.
뭉크의 어머니는 자신이 잉게르를 출산하기 전에 자신이 죽을 것을 예상하고 아이들에게 작별의 편지를 써놓았다고 한다. 에드바르드 뭉크가 다섯 살의 나이로 경험한 어머니의 죽음은 최초의 크나큰 상처였다.
“나는 너무나도 일찍 이 지상의 삶의 비참함과 위험 요소들을 알아 버렸고 또 죽음이후에 오는 삶과 죄지은 인간을 기다리는 지옥의 영원한 고통에 대해 듣고 말았다.”
뭉크의 여동생 중 한 명은 어린 나이에 정신병 진단을 받았으며, 5형제 중 유일하게 결혼했던 남동생 안드레아 마저 결혼식을 올린 지 몇 달 만에 죽었다. 뭉크 또한 류머티즘, 열병, 불면증 등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런 성장 환경은 뭉크를 죽음의 미학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Eye in Eye Oil on canvas 1894 136 x 110 cm Munch Museum Oslo Norway
Melancholy, Laura Oil on canvas 1899 110 x 126 cm Munch Museum Oslo Norway
“나는 인류의 가장 두려운 두 가지를 물려받았는데 그것은 병약함과 정신병이다”
닥터 뭉크(뭉크의 아버지)가 고독을 선호했듯이, 에드바르드 뭉크도 타인들과 가까이 지내며 살 수 없는 듯 했다. 그에겐 사랑하던 이를 잃은 경험이 너무 잦았다. 그래서 새로이 무언가를 잃는 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는 움츠리고 의심을 품는 사람이 되었으며, 애정을 보이는 일을 죽도록 두려워하게 되었다. 누군가 그에게 다가 오려 하면 그는 그것을 일종의 협박과 박해로 간주했다.
View over the Rover at St. Cloud Oil on canvas 1890 46.5 x 38 cm Munch Museum Oslo Norway
인상파 양식의 그림으로 뭉크가 1885년에 처음으로 파리를 여행했을 때, 그 당시의 프랑스 미술은 그의 표현 양식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켜, 1890년경에는 아르누보 디자인만이 아니라 폴 고갱과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렠 같은 프랑스 화가들의 후기 인상주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린 그림이다.
Separation Oil on canvas 1896 96.5 x 127 cm Munch Museum Oslo Norway
하얀 드레스의 신비로운 느낌이드는 여인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면 떠나고 있다. 남자는 가슴에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으며 괴로워하고 있지만 표정은 질투의 낯빛보다는 부드럽고 체념한 듯...슬프다.
언제나 깊은 상처로 끝나버린 뭉크의 사랑이었다.
Starry Night Oil on canvas 1923-24 139 x 119 cm Munch Museum Oslo Norway
“내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종의 병이요, 도취이다. 그 병은 벗어나고 싶지 않은 병이요, 그 도취는 내게 필요한 도취이다.”
북구의 신화와 전설을 보면 유난히 음습하고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 동안 피요르드와 빙하들로 둘러싸여 있고 오로라가 밤도 낮도 아닌 북구의 하늘에 빛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곳에서 태어난 뭉크는 회화라는 양식을 통해 자신의 인생과 질병을 표현한 화가이다. 이를 위해 그는 강열한 색채와 형태의 왜곡을 일삼았다. 그는 시대의 불안과 공포, 하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희망을 추구했던 세기말의 천재화가였던 것이다.
The Sick Child Oil on canvas 1885-86 119.5 x 118.5 cm Nasjonalgalleriet Oslo Norway
뭉크가 23세 때에 그린 그림이다. 죽음이 임박한 자신의 누이 소피에와 그의 이모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독일전시회 당시 신문에선 이 그림에 대고 ‘가재소스를 뿌린 생선죽 같은 그림’이라고 혹평했다.
그 젊은 날의 뭉크 안에 잠재해 있던 검은 그림자의 아픔을 보는 듯.... 나약하고 처연한 표정의 병든 소녀, 어쩔 수없는 현실 앞에 고개 숙인 여인, 더 무엇이...! 어두운 무게에 따라 처연해 진다.
Self-Portrait, The Night Wanderer Oil on canvas 1923-24 121.5 x 118.5 cm Munch Museum Oslo Norway
스스로 ‘예민한 지식인 파멸자’라고 지칭하듯 정신의 병듬과 그로인해 따르는 몸의 병으로도 자신을 표현한 화가이다. 주변 상황에 민감했으나, 당시의 문화적인 흐름에 등 돌리지 못하였기에 상처도, 공격도, 물론 사랑과 관심도 많이 받지만, 그래서 그 안에서 타락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아파하고, 다시 매일 태어나듯 다시 시작하고, 계획하고, 또 죄절 하면서......그의 인생 자체가 하나의 표현주의 작품 같다.
이 자화상의 표정 또한 다를 바 없다. 기력이 없어 보이는 구부정하고 겅중한 키에 시선 잃은 퀭한 눈의 우울한 인상! 방황하며 고뇌하는 뭉크의 어두운 내면이 그대로 보인다.
Jealousy Oil on canvas 1895 67 x 100 cm Rasmus Meyer Collection Bergen Norway
Four Ages in Life Oil on canvas 1902 130.4 x 100.4 cm Rasmus Meyer Collection Bergen Norway
1893년 베를린에서 열린 전시에서 뭉크는 [시리즈의 연구: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여섯 작품을 출품했는데 이는 그가 후에 [생의 프리즈 - 삶, 사랑, 그리고 죽음의 시]라고 부르는 연작의 시작이 되었다.
뭉크는 그의 작품세계를 대변하고 있는 [생의 프리즈]를 1888년부터 스케치하기 시작하여 30여 년 동안 작업을 이어갔다. 부분적으로 소개되었던 [생의 프리즈]는 1902년 베를린 분리파 전을 통해 처음, 체계적으로 완성된 형태를 갖추어 발표되었다.
이 연작 시리즈에는 <마돈나(Madonna)>, <흡혈귀(Vampire)>, <절규(Scream)> 등이 포함되어 있다.
Moonlight on the Shore Oil on canvas 1892 62.5 x 96 cm Rasmus Meyer Collection Bergen Norway
“천만 다행이야. 이제 올해는 그림 파는 일이 다 끝났어. 예술가가 자신의 그림을 팔아야 한다는 건 정말 끔찍해. 내가 원하는 건 평화롭고 조용하게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내 그림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돈을 갖는 걸세. 나는 비겔란이 아니라구. 나는 존재하기 위해 팔아야만 하네.”
자기의 이야기로 그림 그릴 때가 가장 행복해 했던 뭉크. 자기 자신과 세상과의 소통의 도구로서 그림을 그린 화가로 말보다 글보다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 좋다고 하던 뭉크이다. 그래서 본인의 그림을 파는 것을 조심스러워했고 매우 인색해 심지어는 팔았던 그림을 웃돈이나 다른 그림을 주고 되찾아 오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Puberty Oil on canvas 1894 151.5 x 110 cm Nasjonalgalleriet Oslo Norway
소녀는 뭉크를 응시한다. 그림을 그리는 뭉크도, 지금 이 그림을 감상하는 우리도 그런 그녀를 마주보고 있다. 발랄해야 할 사춘기이건만 이 소녀의 슬픔과 기쁨이 보이지 않는 무표정함. 아니면 긴장감일까... 앳돼 보이는 그녀는 벌써 어울리지 않게 철이 든 어른의 상징인 가면을 쓰고 있다. 그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가면, 그 가면을 발견한 뭉크는 그녀의 뒤를 검고 커다란 그림자로 채웠다. 이 그림자는 성에 눈을 뜬 소녀의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초경의 상징일까?
무엇을 위해 이런 모델이 되어야 했을까. 오들오들 떨듯 숨은 내면의 이 소녀의 소리 없는 비명을 뭉크는 들었을 것만 같다. 이 작품의 제목이 의미하는 사춘기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사춘기 소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서적 가면을 상징한 것은 아닐까. 불안에 떠는 소녀를 보는 마음이 측은해 진다.
Red and White Oil on canvas 1894 93.5 x 129.5 cm Munch Museum Oslo Norway
“자네는 아직 젊은 청년일 뿐이네. 지금부터 몇년 지난 다음 자네를 그리고 싶네. 자네에게 어떤 특징들이 나타나게 될 때 말일세. 지금 자네를 그리면 한 젊은 남자의 그림 이상은 될 수 없을 것이네. 담배도 피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는 청년. 육상선수 ... ”
심연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본 뭉크는 사람의 '특징'을 부각시켜 그리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캔버스 앞 대상의 형태보다는 내면의 모습을 끄집어내어 표현했다.
Moonlight Oil on canvas 1893 140.5 x 135 cm Nasjonalgalleriet Oslo Norway
뭉크는 요람에서부터 죽음을 안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하곤 했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누이의 죽음마저 지켜봐야 했다. 정신적으로 나약한 형제들, 신경질적인 아버지. 유년 시절의 어두운 기억은 뭉크의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그의 삶이 불행하고 어두웠던 만큼 그의 작품이 갖는 주된 테마는 죽음과 사랑이었다. 뭉크는 자신의 생애 동안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끊임없는 갈등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뭉크를 ‘절망의 화가’라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뭉크의 그림에는 절망적인 인간의 모습만이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통해 평생 동안 끊임없는 생명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의 절망 속에는 언제나 희망이 예견되어 있었다.
The Ladies on the Bridge Oil on canvas 1903 203 x 230 cm Thielska Galleriet Stockholm Sweden
The Day After Oil on canvas 1894-95 115 x 152 cm Nasjonalgalleriet Oslo Norway
“나는 카메라와 경쟁하지 않으며, 카메라가 천국이나 지옥에서 사용될 수 없는 한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뜨개질을 하는 여인들이나 책을 읽는 남자들을 그리는 습관은 이제 끝내야 한다.
나는 숨 쉬고 느끼며, 사랑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인간들을 그릴 것이다. 사람들은 내 그림 앞에서 나의 노력의 신성함을 이해해야만 하고, 교회에서처럼 그들의 모자를 벗어야 한다.”
Night in St. Cloud Oil on canvas 1890. 64.5 x 54 cm Nasjonalgalleriet Oslo Norway
The Death Bed Oil on canvas 1895 90 x 120.5 cm Rasmus Meyer Collection Bergen Norway
“열세 살 되던 크리스마스 날 밤 나는 피를 토했었다. 열이 온몸을 흔들고 끔찍한 쇼크가 나를 삼켰다.”
“네가 최고의 심판자 앞에 서게 되다니, 넌 영원한 저주받을 거야.”
병약했던 이 소년은 단지 죽고 싶지 않아서 맹세했다. 그는 신과 계약을 맺었다. 신에 봉사하기로 약속을 한 것이다. 그가 다시 건강해진다면, 어지럼증이 없어진다면,,,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뭉크는 건강을 회복한다. 그러나 그의 누이이자 그 동안 어머니를 대신해 어머니 역할을 해 오던 소피에가 결핵에 걸렸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나고 만다.
The Wave Oil on canvas 1921 100x120 cm Munch Museum Oslo Norway
The Kiss Etching, aquatint and drypoint 1895 32.9 x 26.2 cm Munch Museum Oslo Norway
화가로서의 출발
뭉크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공학, 물리학, 화학, 수학 등을 공부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학업을 중단한다. 학교를 떠나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뭉크는 1881년 크리스티아니아에 있는 예술학교(Royal School of Art and Design of Kristiania)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1년 후 학교를 떠나 젊은 동료들과 함께 도심의 칼 요한 거리에 스튜디오를 빌려 작업실을 차리고, 1883년 산업미술전에서의 전시를 시작으로 뭉크의 화가로서의 인생이 시작된다.
Snow Falling in the Lane Oil on canvas 1906 80 x 100 cm Munch Museum Oslo Norway
그런 와중에 젊은 작가들을 후원해오던 화가 프리츠 탈로(Frits Thaulow)가 뭉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파리로 보낸다. 이 때 파리에서 머문 3주간의 경험은 뭉크로 하여금 그의 모든 감각을 기민하게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Spring Oil on canvas 1889 169 x 263.5 cm Nasjonalgalleriet Oslo Norway
뭉크는 파리에서의 수업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해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지만, 이때 접한 고갱, 반 고흐, 로트렉을 비롯한 유럽 작가들의 작품에 매료당하기도 했다. 그해 겨울 뭉크의 아버지가 무일푼인 상태로 죽자 뭉크는 가족의 생활비를 담당하게 되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Fertility II Oil on canvas 1902 128 x 152 cm Munch Museum Oslo Norway
1886년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의 악명 높은 리더이자 허무주의자인 한스 예거(Hans Jaeger)를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뭉크는 자신의 ‘영혼의 일기’에 생각들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성장기의 기억, 사랑, 죽음 등에 관한 기록들은 작품들의 모티브가 되었다.
Ashes Oil on canvas 1894. 120.5 x 141 cm Nasjonalgalleriet Oslo Norway
1892년에는 독일 베를린 미술협회의 초청으로 열린 개인전에 55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그것들은 초기의 애수 어린 서정적 성격을 더욱 내면화하고, 생(生)과 사(死), 사랑과 관능, 공포와 우수를 강렬한 색채로 표현하고 있었는데 베를린의 언론들은 뭉크의 그림을 혹평했고, 개인전을 지속할지를 놓고 회원 총회의 찬반 표결까지 벌어졌다. 결국 뭉크의 개인전은 8일 만에 중단되었고, 후에 ‘뭉크 스캔들(Munch Affair)’이라고 불리게 된다. 뭉크는 정작 이 ‘뭉크 스캔들’ 덕분에 유명해지고, 이후 4년을 더 베를린에서 지내며 ‘생의 프리즈’와 관련된 스케치를 하게 된다.
The Kiss Oil on canvas 1897 99 x 81 cm Munch Museum Oslo Norway
뭉크는 베를린의 예술계에서도 유명한 인물이 되어 보헤미안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도 친분을 쌓는다. 베르린에서 스트린드베리와의 만남은 그림의 깊이를 더하게 하였고, 파리에서는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 스칸디나비아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등과 사귀게 되었으며, 이런 환경은 인습의 굴레에서 그를 해방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뭉크의 미술은 성(性)과 사회적 상황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명작 《생명의 프리즈》 연작(聯作)을 완성한다.
어둡지만 그래서 더 격정적으로 짙게 다가오는 그림이다. 서로의 마음이 하나처럼 엉킨 고조된 감정의 극적인 표현!
Trees on the Shore Panel from the Linde Frieze Oil on canvas 1904 93 x 167 cm Munch Museum Oslo Norway
현대인의 내면적인 갈등과 불안, 공포, 애정 등의 감정을 격렬한 색과 왜곡된 선으로 표현한 새로운 미술운동의 선구자 에드바르드 뭉크. 81세라는 짧지 않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생의 과업이던 '생의 프리즈' 연작 속에 뭉크는 불안, 고통, 사랑 그리고 죽음을 주제로 하여 마치 변주곡을 써나가듯이 다양한 매체와 수많은 작품을 완성해낸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고독과 불안 그리고 몇 번이나 재발되는 정신분열증으로 인한 뭉크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Frieze(연작)이다.
The Hands Oil on board 1893 91 x 77 cm Munch Museum Oslo Norway
1937년 나치스는 독일에 있는 그의 모든 작품을 퇴폐예술이라 하여 몰수해버렸다.
그러나 뭉크는 판화가로서도 근대의 대작가이며 표현주의의 선구자이자, 노르웨이 근대회화의 이재(異才)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화가다.
Stormy Night Oil on canvas 1893 91.5 x 131 cm The Museum of Modern Arts New York NY USA
Girls on a Bridge Oil on canvas 1901 136 x 125.5 cm Nasjonalgalleriet Oslo Norway
The Three Stages of Woman (Sphinx) Oil on canvas 1894 164 x 250 cm Rasmus Meyer Collection Bergen Norway
The Lonely Ones Oil on canvas 1935 100 x 130 cm Munch Museum Oslo Norway
허약 체질로 태어나 잔병치레가 잦았던 뭉크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변해가는 아버지와 계속되는 가난 때문에 더욱더 고통스러웠다. 뭉크의 아버지는 슬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려 하며 점점 더 광적으로 변했고 종종 아이들을 꾸짖으면서 어머니가 천국에서 지켜보며 슬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이런 영향으로 뭉크는 악몽을 꾸거나 무시무시한 환상을 보기도 했다.
The Murderess Oil on canvas 1906 69.5 x 100 cm Munch Museum Oslo Norway
Summer Night (Inger on the Shore) Oil on canvas 1889 126.5 x 162 cm Rasmus Meyer Collection Bergen Norway
뭉크의 여 동생 잉게르다. 생후 11개월 되었을 때 어머니를 결핵병으로 잃은 막내 동생, 동생에 대한 사랑이 가득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The Sun Oil on canvas 1912 163 x 205.5 cm Munch Museum Oslo Norway
어둠에 가득 찬 세계와 자신의 정열에 희생당하는 개인을 묘사한 초기작품은 자기 소모적이고 내성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1908∼1909년 신경병으로 코펜하겐에서 요양한 후부터는, 즉 후기 작품에는 문학적 심리적인 정감이 두드러지면서 색채가 밝아지고 삶의 기쁨과 자연의 풍요로움 및 인간과 자연의 친화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 뭉크에게는 자연과 직접 접촉하는 것이 항상 중요했고, 이러한 접촉은 자유롭고 대담하며 힘찬 화풍으로 그린 수많은 풍경화에 표현되어 있다.
The Dance of Life 1899-1900 Oil on canvas Nasjonalgalleriet at Oslo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겨가며 보면 한 여인의 삶이 그대로 담겨있다. 왼쪽에는 흰 옷을 입은 여자는 순결한 젊은 날을 의미하는데, 가운데 빨간 옷을 입고 남자와 춤을 추고 있는 여자의 모습으로 점점 나이 들어간다. 정열적인 젊은 날의 모습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에는 검은 옷을 입고 혼자 서있는 여성이 있다. 빨간 옷을 입고 춤을 추던 바로 그 여성의 말년 모습이다. 남편이 먼저 떠나고, 더 이상 젊음도 없는, 검정 옷을 입고 쓸쓸한 모습으로 서있다.
Attraction Lithograph 1896 47.4 x 36.3 cm Munch Museum Oslo Norway
Vampire 1893 National Gallery Oslo Norway
툴라 라르센과의 사랑
파리에서 다시 지금의 오슬로인 크리스티아니아(Kristiania)로 돌아온 뭉크는 또 한 번의 상처를 안겨준 여인, 툴라 라르센(Tulla Larsen)을 만난다(1899). 34살이 된 뭉크는 상류층의 툴라 라르센과 깊은 관계로 발전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황금기를 맞게 되지만, 그녀의 끈질긴 결혼 요구에 못 이겨 결별하고 만다. 이에 툴라 라르센은 꾀병으로 뭉크를 불러 권총으로 위협하였고, 마침내 총이 뭉크의 손가락을 관통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둘은 완전히 갈라선다. 이에 뭉크의 여성혐오가 더욱 심해지고, 몇 년 후 <마라의 죽음(The Death of Mara)>과 같은 작품을 탄생시킨다. <살인녀(The Murderess)> 또한 이 사건과 관련된 작품이다.
The Death of Mara 1907
툴라 라르센과의 사랑에서도 상처를 받은 이후 과도한 음주와 싸움 등으로 인해 불안 증세는 더욱 심해졌고 환각 증세까지 겪던 뭉크는 의사 야콥슨(Dr. Daniel Jacobson)의 병원에 입원해 8개월 동안 요양을 하면서 치료를 받았다.
환각 증세 등, 극에 달한 정신 분열증으로 고통받을 때의 작품이다. 보는 마음도 힘이 든다.
Train Smoke Oil on canvas 1900 84.5 x 109 cm Munch Museum Oslo Norway
“며칠을, 심지어는 몇 주를, 전혀 그림을 그리지 않고 버틸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럴 때에도 나는 내 그림들과 계속 씨름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내 목탄과 붓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걸 견딜 수 없네. 난 그것들이 대기 중인 걸 확신해야만 하네. 어떤 때에는, 아침에 내가 밤새 그렸던 그림을 발견하지.”
“사실 제일 괜찮은 그림들 중 많은 작품은 거의 그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그린 것들이네. 나는 불면증 환자야. 그래서 침대에서 몸부림치는 것보다는 그림 그리는 것이 나아.”
Anxiety Oil on canvas 1894 94 x 73 cm Munch Museum Oslo Norway
그들의 눈이다. 그들의 초점을 잃은 듯 퀭한 시선은 혼란스럽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은 나를 주시하고 있다.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다.
뭉크의 분열 증세가 심화될 때 그린 작품으로 불안한 표정, 굳어있는 인물들, 그에 따른 색감마저 어둡고 무겁게 주변에서 일렁인다. 핏빛 하늘이 휘몰리고...
Melancholy (Jappe on the Beach) Oil on canvas 1892-93 72 x 98 cm Nasjonalgalleriet Oslo Norway
내성적이고 과민한 뭉크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걸 참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라디오를 밤낮으로 틀어놓아 목소리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뭉크는 밤낮으로 서로 다른 채널이 고정된 두 대의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았는데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소음이었다. 음악이나 뉴스가 아니라 오로지 라디오에서 나오는 다양한 목소리들이었다.
낯선 군중 속에 홀로 있을 때가 가장 편했으므로, 그는 기차역과 역 구내식당을 사랑했다. 미지의 것에 이끌림을 느꼈기에 여행도 역시 좋아했다. 그의 극도의 수줍음은 애정을 향한 강한 갈망과 지식에의 크나큰 욕구에 대한 방어막 구실을 했다.
Madonna Oil on canvas 1894-95 91 x 70.5 cm Nasjonalgalleriet, Oslo Norway
뭉크가 생각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그림으로 겉모습은 아름다운 마돈나이지만 한편으로는 마녀, 혹은 메두사(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자 괴물)의 성질을 갖고 있는 존재이다.
뭉크의 첫사랑
1885년 여름 뭉크는 프리츠 탈로의 형수인 밀리 탈로(Milly Thaulow)에게 빠지게 되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사랑이었다. (뭉크의 일기에서 하이베르그 부인으로 회상됨). 뭉크는 밀리에게 매우 순정적인 사랑을 바치지만, 그녀는 매우 자유분방한 보헤미안 기질의 여인이었다. 1889년 26살 무렵 파리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이런 그녀와 연애를 하면서 뭉크는 끝없는 의심과 질투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첫사랑 이후 연거푸 경험한 사랑은 아름답기는커녕 여성 혐오증을 악화시킬 정도로 우울한 기억들이다.
The Scream Oil, tempera and pastel on cardboard 1893 91 x 73.5 cm Nasjonalgalleriet Oslo Norway
이 작품은 근심과 공포와 비관적인 생활태도를 표현 했으며 실존의 고통을 형상화한 초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검은색과 붉은색을 강렬하게 대비시키고 일그러진 공간과 얼굴의 형태를 왜곡함으로써 불안감과 공포감을 극대화 시킨 이 작품을 처음 전시했을 때 관객들에게 큰 공포감을 주게 되어 전시회 도중 전시장을 폐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두 친구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처럼 붉게 물들었고 나는 한 줄기 우울을 느꼈다. 마음이 갑자지 힘들어져 다리 난간에 기대어 섰다. 친구들은 여전히 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나만이 공포에 떨며 홀로 서 있었다. 마치 찢어지는 듯 커다랗고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대자연을 가로질러 끊임없이 울리는 것 같았다.”
-에드바르트 뭉크-
그의 일기에 쓰여 있는 구절이다.
뭉크가 이 작품에 대해 얼마나 많은 애착이 있었는지는 변형시킨 작품의 수가 50종이 넘는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같은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 잠재의식에 관한 관심, 자아에 대한 발견은 뭉크가 평생에 걸쳐 심혈을 기울인 주제들이다.
소리 지르면서 절규하는 뭉크 자신의 내면적인 고통을 그린 것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 뭉크는 인물을 S자 모양으로 비틀어 입을 크게 열고 눈을 크게 뜬 채 경악하는 자신과 현대인의 불안한 모습을 담고 있다. 배경은 다리 위의 거리이지만 내면세계를 활보하는 자아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내재된 감정을 표출하기 위해 과감한 선과 색을 사용한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긴장감과 불안함, 어두움이 우리에게 짙게 다가온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그의 강렬한 색채를 사용한 표현주의적 화풍 속에서 감정의 정화와 감동을 받게 된다. 어쩌면 그의 불우한 인생이 뭉크 자신에게는 슬픈 삶이었겠지만, 작품으로 남겨진 그의 그림들을 보노라면 그 삶이 예술가로서는 축복이었을 런지도 모르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 이기적인 생각의 연장선상에는 평생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분노와 불안을 정화하고 싶은 카타르시스의 욕구가 있다. 우리 안에 깊이 감춰져 있던 불안, 고뇌 등이 그림을 통해 들어나면서 아픔을 확인하고 이를 극복하고 싶은 욕망 같은 것 말이다.
삶의 비극과 슬픔 그리고 불안의 표출이라는 정서적 감정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어야 하는 우리들의 세계와 과연 무어가 다를까!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을까. 갈수록 편리한 첨단의 기계화 되어가는 현대라는 굴레 속에 휩쓸려서 무엇에 쫓기듯 자신을 소진시키며 살아가는 오늘 날의 우리이다.
각박한 삶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 굽어보며 따뜻하게 안위하는 시간이 과연 있었을까... 공허한 마음, 왠지 모를 불안함이 시시각각 우리 안에서 춤을 추듯 맴돈다.
무겁고 어두운 그림자 같은 깊은 우울 때문에 외면하고 싶었던 그의 그림이었는데 깊은 이해와 감동으로 그의 그림 앞에 선다.
내 자신이 거울처럼 투영되는 뭉크의 그림 안에서 내 모습, 나의 진정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 순간만이라도 드높고 맑은 푸른 하늘을 우러러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아직도 많은 길...부족하자만 나의 소중한 삶이기에....
온 누리가 봄꽃들로 꽃물결을 이루고 여린 잎들이 초록으로 물드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이 감격스러운 자연은 여전히 싱그러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살아있고 또 영원할 것이다. 나 또한 그 안에서 아름다운 삶이기를 믿어 본다.
<절규>의 모티브가 되었던 시이다.
에드바르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노르웨이의 뢰텐(Løten)에서 의사인 크리스티안 뭉크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군의관인 아버지와 이지적이고 자상한 어머니를 둔 뭉크는 누나와 3명의 동생들 사이에서 자랐다. 그가 잘 따랐던 누나 소피에(Sophie)와 뭉크는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아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허약 체질로 태어나 어린 시절 경험한 가족의 죽음과 이로 인한 공포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뭉크는 노르웨이가 낳은 가장 위대한 화가로서 사랑, 고통, 죽음, 불안 등을 주세로 하여 내면세계를 시각화 하였으며 ‘영혼의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독창성 있는 작품세계를 통하여 미술사의 흐름에 한 전환점을 제기 하였다. 노르웨이 태생의 작가였지만 뭉크는 후진적인 19세기말의 북유럽을 탈피하고자 했다. 그 결과 독일 미술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그 또한 독일의 미술, 특히 표현주의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등 독일에서 화가로서의 꽃을 활짝 피웠다. 16세기 이래 4세기 간 불모의 공백으로 지속되었던 독일 회화 계를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은 뭉크의 힘이라고 한다. 그래서 현대 ‘회화의 아버지 세잔’을 본 따서 ‘북구의 세잔’이라고 하기도 한다.
뭉크가 베를린에서 첫 번 째 개인전을 열었을 때부터 1908년 신경쇠약에 걸릴 때까지의 16년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 무서운 신경성 강박증에 시달렸다. 구불구불한 선을 사용한 양식으로 인간 실존의 고통과 불안을 표현했다. 뭉크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절규〉는 현대인의 정신적 고뇌를 상징한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의 독일 표현주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격정적 감성과, 현대를 상징하는 강렬한 현실감각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1894년에 판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동판화(Etching), 석판화(Lithograph) 및 목판화(Woodcut) 등을 다룸으로써 가장 중요한 현대 판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판화는 특히 단순하고 솔직한 형상으로 유명하며, 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이 강한 주관성이 두드러졌다.
1910년부터는 고국 노르웨이로 돌아와 정착한다. 만년에는 은둔생활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80세의 생일을 맞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4년 1월 23일 뭉크는 눈을 감는다. 그의 유언에 따라 모든 작품들이 시에 기증되었는데, 유화 약 1,100여 점, 판화 약 18,000여 점, 드로잉과 수채화 약 4,500여 점, 조각 6점, 그리고 92권의 스케치북과 편지, 수많은 석판 원들 등 엄청난 양의 작품과 자료들이었다.
오슬로 시는 뭉크 미술관 개관을 결정하고 박물관 건축공모전을 열어 당선작으로 공사를 시작해 뭉크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에 일반인에게 그 모습을 공개했다. 현재 뭉크 미술관은 뭉크의 작품과 편지, 저서 등 2만 여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 중 500여점만이 상설 전시관에서 볼 수 있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교체 전시해 계속해서 몇 번이고 이곳을 방문하고 싶게 만든다.
<절규(The Scream ; 1895)>
5월 2일 뉴욕의 소더비 경매 사상 최고가인 1억1992만 2500달러(약1355역7200만 원)에 판매되었다. 이 작품은 개인 소장하고 있던 작품으로 파스텔화이다.
뭉크는 모두 네가지 버전의 <절규>를 그렸는데 게시물에 올려있는 그림은 놀웨이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지고 가치가 더 나간다는 ‘화면이 꽉 차고 더 정성을 들인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1994년에 도난당했다가 다시 돌아 온 ‘손을 많이 타는’ 작품이기도 하다.
2012. 5. 13. 편집 하늘 새
조금씩 준비하며 언젠가는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절규> 때문에... 그러나 너무나 어둡고 우울해서 미뤄 가며 세월만 보냈었는데 경매에서 사상 최고가에...! 기회가 주어진 것 같았다.
오랜 시간을 뭉크의 그림세계를 접하다 보니 뭉크의 그림보다는 뭉크의 내면세계가 더 크게 부각되면서 연민 같은 것으로 마음이 아려왔다. 아픈 울림을 그림으로 분출시킨 화가 뭉크! 이토록 처절한 그림을 그려야 했던 뭉크의 심연은 과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가슴 가득 따뜻하게 품어주고 싶은 심약했던 뭉크였다. 애수 어린 서정적 성격은 주어진 암울한 삶이 벅차 점차 내면화하여, 평생 고독 속에서 라디오의 소음만을 틀어놓고 살았다는 뭉크, 낯선 군중 속에서 혼자 있을 때가 가장 편했다는... 상처받을 두려움 때문에 세상을 등지듯 자신을 가두고 살았던 뭉크였다.
어쩌면 내 모습인지도 모른다.
고뇌, 불안, 허무..... 등의 표상 같은 현대인들의 삶이란, 다를 바 없이 각자 외딴 섬처럼 돌아 앉아 살아가는 게 현실 아닐까.
섬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님의 이 짧은 시가 바로 현실인 것을.... 다가가지 않으면서 그리워하는....
그래서 뭉크의 그림이, 사람들의 가슴에든 머리에든 오래 남는 이유일 것 같다. 인간은 뭐든, 자기를 투시하거나 동질감 같은 것에 감동하고 또 자기가 아는 것을 취하게 되어 있기 마련이니까.
뭉크의 그림은 우리가 아는 우리의 깊은 내면의 어두움을 닮았고 슬픔에 찬 고독이지만, 끊임없는 고뇌를 닮았고 또 두려움을 닮았다. 우리는 뭉크를 보면서 자신을 보는 거다. 그래서 다시 일깨워 추스르며 ‘내일’이라는 새날이 우리를 맞는다.
외면하고 싶었던 뭉크가 내 가까이서 따뜻하다.
세상에 가득 내린 봄날이듯 따뜻한 마음으로 내일을 생각해 본다.
봄꽃이 화사하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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