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계의 과제
(99)문화의 힘
윤진섭
묵은해를 보내고 희망에 찬 계사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많은 미술인들이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설계했으리라 믿는다. 마침 국내 최대의 미술단체인 미협도 새로 당선된 이사장을 중심으로 새 집행부를 꾸렸으니 새해에는 더욱 신뢰받는 미술행정이 펼쳐지길 기대한다.
돌이켜 보면 작년 한 해 동안 한국 미술계 역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역시 경제 문제다. 글로벌 경제가 어려운 데다 설상가상으로 국내 경기마저 부진하여 미술시장은 침체의 늪에 빠졌다. 이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사람들은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전업작가들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 전업작가 중 연간 5백만 원 이하의 소득자가 약 70%에 해당한다고 하니 이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월평균 40만 원 정도의 수입으로는 생계는 고사하고 작품제작에 필요한 재료도 사기 힘든 형편이니, 만일 이대로 간다면 우리의 미술은 고사하고 말 것이다.
현재 한국의 전업작가들이 겪고 있는 이런 참담한 사정은 다른 예술분야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음악, 무용, 연극, 영화 등 이 땅에서 예술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대다수는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재작년,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다 차가운 방에서 죽어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의 죽음이 대표적이다. 어디 그뿐인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지 않았을 뿐 내가 아는 미술인 몇몇은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다 세상을 떴다. 공교롭게도 그들 모두가 전업작가였다. 그중에서 가장 비참한 죽음은 K의 경우이다. 그는 추운 겨울에 우사를 개조한 작업실에서 가난을 비관하여 천정에 목을 매 죽었다. 그의 시신은 죽은 지 한참이나 지나서야 한 우체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문화는 우리 삶을 고양시킨다
매우 아쉽게도 이번 대선에서 문화예술에 대한 공약을 내건 후보는 여야를 막론하고 없었다. 경제, 사회, 정치, 복지, 건설 등 허다한 공약들 가운데 문화예술에 대한 것은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발견되었다. 이는 문화예술에 대한 명백한 홀대요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정치권은 말로만 ‘문화의 세기’를 외칠 뿐, 정작 정당의 명운이 걸린 선거를 앞두면 문화는 어느새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왜 이런 현상이 되풀이되는 것일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문화예술 자체의 특성 때문이다. 알다시피 문화와 예술은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사람은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하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지만, 문화와 예술이 없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속담이 그래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는 삶에 대한 우리의 빈곤한 의식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살림살이는 옛날보다 훨씬 나아졌지만 삶의 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식은 여전히 후진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의 대다수가 미술관에 문턱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정치인이 문화예술에 대한 공약을 내걸 것을 기대하는 것은 차라리 미망에 가깝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자. 편안한 돼지가 될 것인지 아니면 향기 있는 인생을 꿈꾸는 자가 되길 바라는지를. 문화와 예술의 향기는 마치 숲의 정기와 같아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옷에 스며들어 그 그윽한 훈향이 우리의 마음을 살찌게 한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 스밈의 속도가 매우 느리고 은근하다는 점이다. 또한, 그것은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운동경기나 정치적 집회처럼 사람들의 관심과 열광을 이끌어내지는 못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문화와 예술을 논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고양시키고 반성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국민들이 문화와 예술을 각별히 기억하고 이의 중흥에 힘을 실어주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국민들이 문화예술에 관심을 갖고 힘을 실어줄 때 정치권도 이를 무시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백범 김구 선생이 그토록 강조해 마지 않았던 ‘문화의 힘’이 우리 삶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한 해이길 소망해본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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