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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컬럼 이선영 -이은주/ 춤추는 우주

sosoart 2013. 5. 6. 21:37

이은주 / 춤추는 우주

이선영

춤추는 우주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은주(레이첼 리)의 작품에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기운이 있다. 거듭된 이어짐과 탈바꿈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서 고립된 형태나 칙칙한 색은 자리를 잡지 못한다. ‘색으로 춤추다’라는 전시부제의 작품들은 유연한 형태와 순도 높은 색으로 가득하다. 형태는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지며, 색채는 이어지는 형태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단파장에서 장파장에 이르는 색의 에너지는 그 추진체인 선과 함께 약동하는 흐름을 만든다. 가는 외곽선에 감싸인 색은 빛이 된다. 색은 명확히 계획되지 않은 방향으로 달려 나간 형(形)을 충만하게 채운다. 잔잔한 흐름을 넘어서 춤까지 추는 요소들은 소외감을 자아내는 회색빛 도시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있다. 이 세계에는 선적 진보와 물량주의적 축적의 결과물인 뻣뻣한 직선도 발견되지 않는다. 반복적 형태도 없다. 상하와 좌우가 따로 없는 이 작품들은 중력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춤추는 색 띠는 뫼비우스 띠처럼 안과 밖의 경계도 무너뜨린다. 색의 띠는 다른 것과 유연하게 결합하기 위해 휘어져 있으며, 다음으로 이어질 운동을 준비한다. 

 


                             blossom, 캔버스에 아크릴, 2013년

 

이은주의 작품에서 사라짐 역시 이어짐의 또 다른 양상이다. 순도 높은 색이 모두 동원되었지만, 부딪힘 없이 평화롭게 공존한다. 거기에는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발견되는 눈이 따가운 원색 풍경처럼, 본질적으로 비슷한 부류이기에 상대와 차이나는 선명한 색으로 자신을 도색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서는 모두 자기만의 색을 가지고 있기에, 한 줄로 서서 뒤따라야 할 길 같은 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곳은 자율이 자유와 자연스럽게 연관되는 이상적 세계이다. 색과 형태는 가느다란 선에 에워싸여 있지만, 그것은 고립과 단절이 아니라, 공존과 조화를 위한 장치이다. 그것은 각자가 될 수 없다면, 결코 하나도 될 수 없는 다원적 우주이다. 다원적 우주에 대한 명백한 상징은 무지개일 것이다. 흑이냐 백이냐, 또는 1이냐 0이냐 라는 양단간의 선택만을 강요하면서 전진해온 현실 세계는 이 무지개빛 세계를 극복해야만 할 유아기의 환상으로 치부했다. 

 

흑/백, 그리고 그것의 변주인 무채색은 생산과 진보, 의식과 형식, 심각함과 공식성, 깊이와 금욕 등을 상징하며, 이 침울한 현실 세계를 재처럼 뒤덮는다. 이러한 세계에서 살아있음이란 진정한 차이의 표시일 것이다. 불현 듯 떠오른 영감처럼, 어디선가 살짝 불어오는 바람은 잿빛 표면의 이면을 언뜻 보여 주는데, 그것은 태양아래 빛나는 세상의 진정한 주인인 무지개빛이다. 이은주의 작품에 현실이 담겨있다면, 그것은 무채색 현실도 무지개빛으로 가득 찼으면 하는 바램일 것이다. 강한 희망은 현실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종교와 마찬가지로, 예술이 현실과 맺는 강렬한 방식이다. 이 원초적인 힘에 순응하는 작가는 작품 제목에 빠지지 않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지향한다. 상투적으로 보이는 두 단어의 조합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이 영원히 지속될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인류 보편적인 가치는 이루기 힘든 것이어서 그런지, 쉽게 괄호쳐지고, 심지어는 현실을 기만하는 부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사막이 현실이 되고, 오아시스를 환상으로 치부하는 격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세계시장주의를 지배하는 자본만이 인간의 규칙을 넘어 자연의 법칙에 버금가는 무엇이 되어 무늬만 다원주의인 세계를 연출한다. 일찌기 코스모폴리탄이었던 이은주는 다양성의 진정한 모델인 자연과 예술(그리고 예술보다 더 긴 전통을 가지는 민속공예)에 매혹된다. 미술의 자기동일성을 향한 현대미술의 무거운 발걸음은 저 뒤편에 남겨두었다. 교조주의로 빠지기 쉬운 예술에 대한 형이상학은 몸의 언어와 밀접한 신비주의에 자리를 물려주었다. 지금도 외국인 남편과 국립국악원의 공연을 즐기는 작가의 작업실 책상에는 한국의 춤 전통에 대한 두터운 책자가 놓여있다. 이은주의 작품에는 자연 및 자연에 순응하여 살아온 민속적 전통에 보편적인 때깔—가령, 단청이나 색동, 그리고 여타의 이국적인 무늬들에 고유한 활력—이 있다. 이 보편적인 미의식은 또 하나의 보편적 가치인 사랑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화사하면서도 약동하는 세계는 생물학적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맞은 새로운 인생의 봄과 관련된다. 세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살아왔던 20대를 보내고, 30대도 지나가려는 즈음, 작가는 ‘순간적인 깨달음처럼 인생의 봄’을 표현하고자 했다. 꽃과 나비, 꿈같은 것은 봄을 상징한다. 장자의 글귀가 연상되는 작품 [dream of butterfly]는 살짝 앉은 나비가 어떤 내부를 감싸고 있는지 모호한 색 띠 뭉치를 한 떨기 꽃으로 간주하게 한다. 그것은 꽃처럼 빈 중심에서 밖으로 뻗어나가면서 회귀하며,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흐름을 이룬다. 다른 작품에 비해 미색이 더 많이 들어있는 작품 [eternal beauty_new spring]은 춤추는 색의 띠가 무채색--이은주의 작품에서 주조를 이루는 원색과 대조되는 미색은 흰색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허공을 차츰 뒤덮어간 것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러한 뒤덮음은 공간공포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끝없이 이어지는 생성과 관련된다.

 

하트 문양이 들어있는 그것은 작품 [eternal beauty_pray]와 더불어, 만물이 생성하는 봄과 피어오르는 사랑을 중첩시킨다. 이은주에게 봄, 또는 인생의 봄은 무엇보다도 사랑이다. 봄과 사랑은 영원한 발생의 상태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발생하고 성장하고 연결되며 하트 모양으로 열매를 맺는 그녀의 작품은 사랑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작은 원들이 화면 곳곳에 뿌려있고, 상호적인 연결선을 이루는 작품 [eternal beauty_ blossom]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하얀 면은 밑바탕이기보다 다른 색과 동등한 요소로 참여한다. 여기에서는 현대물리학의 가설처럼, 공간도 물리적 사건의 주인공이 됨을 보여준다. 그것은 배경/형태라는 이원적 관계라기보다는 부드럽게. 또는 거세게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이다. 작품 [eternal beauty_metamorphosis]에서 흩어진 중심들을 이어주는 색 띠는 더욱 강력하다. 큰 규모의 작품에는 좀 더 큰 몸의 움직임이 드러난다. 

                          

작가는 작품을 시작할 때 미리 그려놓은 드로잉 없이 폭발적으로 진행한다. 거의 퍼포먼스처럼 나아가던 작업을 나중에 다듬고 정리한다. 아름다운 색만을 사용하면서 조화를 이루려면, 색칠에는 좀 더 계산적인 요소가 따른다. 작품 [eternal beauty_ mythology]에서 같은 크기의 캔버스는 모듈이 되어 벽면으로 확장된다. 이은주의 작품에서 색을 춤추게 하는 힘은 구성에 있다. 거기에는 점과 점이 만나서 선을 이루고, 우연과 필연이 복합되어 꽃을 피우는 듯한 방식이 있다. 마치 만(卍)자처럼 움직이는 점에서 사방으로 펼쳐지는 모양이 바로 춤인 것이다. 한 점에서 끊기 지 않고 곡선을 그리다 보니까, 이 유기적 연결 형태는 꽃 모양이 되었지만, 꽃이라는 구체적 도상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꽃이라는 자연의 외관보다는 우주의 본성을 표현한 것에 가깝다. 이 우주로서의 꽃에는 세상을 번성하게 하는 힘이 있으며, 보이지 않는 중심에 비밀을 품고 있다. 

 

소우주로서의 꽃이 기하학적 형태를 갖춘다면 만다라가 될 것인데, 이은주의 작품은 그것이 풀려나가는 듯한 모습이 있다. 선의 흐름은 형태이자 궤적인 것이다. 하나의 중심으로 조여진 세계가 확장되면서 발생하는 에너지가 작품의 활력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것은 작가가 ‘차가운 붉은 색’이라는 슬픈 대사가 나오는 서편제의 예를 든 것처럼, 죽음과 가까워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몸에서 벌어지는 사건과도 유사하다. 작가는 우주의 에너지와 교우하는 요가의 요법에 오랫동안 몰두해 왔다. 요가를 계속하면서 몸과 마음을 일치시켰다. 요가의 경험은 스스로가 건강하고 깨어있을 때 에너지가 형성된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요가는 나무 포즈를 취하면 내가 아닌 나무가 될 수 있도록 한다. 되기는 현실성보다는 잠재성에 방점을 찍는 것이고, 그것은 변화무쌍한 선과 색의 흐름으로 이루어진 작품에 나타난다. 작가는 전 우주에 기도를 하는 힌두교는 우리의 민속신앙과도 닮았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고립된 존재는 없다. 만물은 존재가 아닌 되기를 통해 엮여진다. 

 

작가는 ‘나는 내 몸으로 신이 보여주는 것을 만드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동남아 민속 공예가의 말을 기억한다. 작가 또한 자신의 심신을 관통하는 힘을 표현하는 매개자에 불과한 것이다. 이은주의 작품은 만물의 영장, 사물의 보편적 척도가 되려는 서구중심의 인간론이 아니라, 우주자체가 기준이 된다. 그녀에게 우주는 거대한 차원을 가지지 않는다. 한 송이 꽃에 우주가 있고, 그것들이 피고 지는 것에 우주의 원리가 있다. 꽃으로부터 출발한 상징적 우주는 자연을 앞세우며 서구문명에 도전했던 1960년대 청년들의 플라워 파워(flower power)를 떠오르게 한다. 히피문화의 포스터를 장식했던 알록달록한 색의 흐름은 이은주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무늬를 넘어서 대안의 세계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꽃-몸-우주가 교차되는 유기체적 곡선에는 경쟁과 전쟁을 지향하는 경직된 문명을 대신하는 자유와 평화에의 갈구가 있다. 또한 술이나 향수, 환각제의 재료가 되었던 식물은 도취적인 아름다움과 관련된다. 고정됨 없는 움직임의 세계는 환상적으로 다가온다. 거기에는 고정된 현실원리를 대체하는 쾌락원리가 지배한다. 

 

그것은 지금 여기의 현실로부터 여행을 떠나게 한다. 이은주는 비행기로 떠나는 여행 못지않게 예술을 통해 정신의 여행(trip)을 떠난다. 물론 정신의 여행 또한 작가가 몰두하는 요가처럼 몸이 배제되지 않는다. 요동치는 형태와 자극적인 색깔은 기성의 언어와 형식, 기호 등으로부터 탈주하며, 개념화로 지친 현대미술의 어법에 몸의 감수성을 복권시킨다. 이원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몸은 다분히 도구적인 역할만을 부여받아, 기계적인 노동이나 쾌락적 소비와 연관된 마케팅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었다. 몸은 다시금 자연과 근본적인 연결을 꾀한다는 점에서, 발랄하면서도 다소 느긋해 보이는 이은주의 작품에는 우회적인 문명비판이 있다. 거기에는 우울과 침체, 무기력을 낳는 억압적 힘이 제거되었을 때 튕겨 나와 발산되는 에너지가 있다. 그녀의 작품은 세계대전 전야에 종말론을 직감했던 초기 추상 화가들을 고무시켰던 것과 같은, 자율적 색과 형태에 대한 강한 긍정이 발견된다. 그것은 모순과 질곡에 가득한 세상을 단순히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는 회화의 가능성이다. 

 


                       metamorphosis, 캔버스에 아크릴, 2013년.

 

이러한 경향은 원래부터 추상예술인 음악과 춤, 그리고 정신의 세계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비극적 세계로부터의 도피나 도약의 필연성은 낭만주의 시대나 모더니즘 시대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칸딘스키나 몬드리안 등, 추상회화의 선구자들은 추상의 언어로 엄밀한 상징적 의미가 있는 대안의 세계를 건설하였으며, 곧 근대회화의 진보는 세계 시장화처럼 동질적 세계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몸은 결코 하나의 차원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일상적 경험에서, 특히 세계를 돌아다닐 때 차이의 표시가 가장 확연한 것은 바로 몸이다. 몸은 동질적 우주에 이질성을 도입한다. 항상성만을 중시하는 보수적 입장에서, 이질성은 질병의 요소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이질성이 없다면 변화는 불가능하다. 변화의 현상형태가 바로 다채로움이다. 이 다채로움이 평화를 낳는다. 그렇기에 예술가들은 대체로 평화주의자이다. 진정한 다원성의 조건이 부재한 곳에서 강한 진리는 있을지 모르지만,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은 없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지혜는 회색빛이다. 그러나 삶과 종교는 색깔이 풍부하다. 신이란 자연계의 무한성을 닮는다. 형식적 측면에서 이은주의 작품은 어디에나 중심을 가지는 편재(omnipresence) 성이 특징이다. 그 또한 신비로운 체험을 낳으며 근본적으로는 종교적이다. 종교학자 니니안 스마트는 [비교 종교학]에서 신비경험은 순수의식, 개인의 해탈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거룩한 요가 승들은 수행과정을 통해서 일상적인 대상으로서의 세계가 사라지는 초탈과 평정의 상태에 도달한다. 진정한 정적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을 일상세계로 돌아올 수 있으며, 사물과 사람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와 하나 되는 만유재일적(panenhenic) 체험이다. 요가 수행자들에게 주체와 객체 사이의 구분은 의식의 높은 단계에서 소멸한다. 동양의 불이(不二), 서양의 숭고(sublime)는 강렬한 종교적 경험이자 미적 경험이다. 현대 예술은 이와 같은 보다 근본적 경험과 상호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대양(大洋)적 만남에서 예술의 오랜 짝인 자연은 그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에 저질러 놓은 죄 때문에 위험에 빠져 경직된 문명은 자연의 힘으로 느슨해지고 생명을 고양시키는 힘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갱신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쾌락은 열락(jouissance)이다. 역사의 끄트머리에서 신화로의 복귀가 이루어지고, 원점으로의 복귀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근본적인 여행이다.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 편협한 자기중심주의는 부드럽지만 강력한 흐름에 그 취약한 경계선을 흩어트린다. 복잡하게 꼬여 있는 듯 하지만 풀면 풀릴 수 있을 것 같은 다채로운 색 띠로 만들어진 이은주의 곡선의 우주는 쏜살같은 시간이 아닌, 샘솟는 시간을 예시한다. 색과 형태의 끝없는 유출은 무덤덤하게 흐르는 기계적 시간을 환상의 시간으로 도약시킨다. 추상적 이성과 노동의 세계를 지배하는 시점과 종점을 가지는 선적 시간과 달리, 샘솟는 시간은 강렬한 현재로의 회귀를 촉구한다. 그리고 회귀는 영원히 계속된다. 그것은 그토록 많은 문화에서 발견되는, 영원 회귀하는 순환적 시간이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