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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운 / 공간과 시간을 잇는 나사못-이선영

sosoart 2013. 7. 1. 22:54

한다운 / 공간과 시간을 잇는 나사못

이선영

공간과 시간을 잇는 나사못 

 

이선영(미술평론가)

 

한다운의 전시는 마치 바닷가에 온 것 같이 방파제 구조물로 가득하다. 그가 작품의 소재로 따온 테트라포드(Tetrapod)는 방파제를 만드는 인공적 블록의 하나로, 말 그대로 4개의 발을 가진 구조물이다. 내륙으로 들이치는 파도의 에너지를 감소시킨다는 실제적 기능을 소거하고, 대상만을 바라보았을 때 실제의 기하학적 구조물이 가질 수 있는 정제된 형식미가 두드러진다. 그것은 하나로 있을 때도, 군집으로 있을 때도, 어떤 조합의 형식을 띄고 있을 때도 융통성 있게 어떤 내용과 형식을 말한다. 입체적으로 대칭을 이루는 그 구조물은 어떻게 던져 놓아도 자체의 응집력을 가지면서 그것이 놓여 진 외부를 힘껏 끌어안는다. 그것은 마치 공간과 시간을 잇는 나사못처럼 서로 무관한 것들을 연결시킨다. 작품의 기본 모듈이 되고 있는 테트라포드는 원래는 콘크리트로 되어있지만, 이 전시에서 작가는 시멘트 뿐 아니라, FRP, 철, 금속, 돌 등으로. 크기와 색채, 조합의 방식을 달리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하였다. 

 

 

 

기성의 형식을 차용한 것은 예술의 영원한 주제 중의 하나인 소통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땅과 바다의 경계면에서 양자를 구별하면서도 연결 짓는 방파제는 작가에게 소통에 대한 거대한 상징으로 다가왔다. 구별되는 경계면에 놓이는 테트라포드의 방식 뿐 아니라, 형태 자체가 소통 지향적이다. 테트라포드는 바깥으로 뻗은 4개의 발 자체가 하나의 몸통을 이루는데, 그것은 내부 없는 외부, 또는 양자가 하나가 된 형식이다. 한다운의 작품은 적대적 외부에 움츠러들어 내부로만 내공을 쌓아왔던 이전의 근대적 자아와 달리, 최대한 바깥과의 접면을 늘리고, 그렇게 확대된 접면 자체를 또 다른 자아로 간주하는 젊은 세대의 자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원본만큼이나 무거운 물질로 만들어져 있지만, 인터페이스의 비중이 날로 높아져 본인을 대체하기에 이르는 세대의 무의식이 깔려있다. 그것은 구와 달리 외계와의 접면을 최대화하는 구조이다. 즉 유아독존이 아니라 타자와 얽히기 위한 구조이면서, 군집으로 기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소통이라는 화두를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납작한 둥근 돌 판에 크고 작은 테트라포드 수백 개가 수북이 쌓여 있는 작품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방파제에 가장 가까운 모습으로 설치되어 있다. 방파제의 원래 재료인 무색 콘크리트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부서지고 침식된 모습 또한 그대로 남겨두었다. 수직 수평을 축으로 증식, 조합되는 레고 블록과도 달리 자연스럽게 얽키고 설켜 규모를 확장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다. 연두색과 주황색으로 칠해진 큰 작품은 거의 실제 크기와 비슷한 규모이다. 그것은 회색 방파제에 비해 밝은 색으로 처리되어 있어, 다리 하나를 바닥에 놓고 세워 놓았을 때 마치 희망의 불빛을 반짝이는 등대 같은 느낌도 준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굴려지고 예쁜 색에 땡땡이 무늬까지 입고 있는 그것은 육지와 바다간의 소통 뿐 아니라 예술적 소통으로 거듭나기 위해 변신했다. 파스텔 톤으로 칠해진 8개의 구조들을 의자처럼 배치한 작품은 소통의 화두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것들은 실제로 관객이 앉을 수 있는 스트리트 퍼니처도 될 수 있다. 

 

정사각형 액자 안에 안치된 한 쌍의 구조는 큰 작품의 축소판처럼 보이며, 예술의 형식을 직접 차용한다. 여러 크기의 둥근 스테인레스 미러 위에 덩굴처럼 뻗어나간 물의 파장을 표현한 작품은 세계에 대한 축소모델로, 한정 지워진 틀에 세계를 반영하는 예술고유의 어법을 활용한다. 거울의 가장 자리에는 3D로 출력된 작은 구조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파장의 시작을 알린다. 이 작품에 특별히 3D 프린트 출력물이 사용된 것은 작을수록 정확하게 각을 맞추기 힘들다는 실제적 이유 뿐 아니라, 기하학적 구조라는 것이 결국은 재현과 관계된 것임을 예시한다. 창을 연상시키는 액자나 세계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은 재현이 가능하기 위한 구조적 틀이다. 액자에 하나씩 안치된 작품과 달리, 금속 거울 위에서 물살과 함께 있는 테트라포드는 정확한 구조와 길항관계에 있는 혼돈의 세계를 보여준다. 혼돈은 다양한 각도로 구불거리는 선 뿐 아니라, 염산을 처리해서 시퍼렇게 부식시킨 동의 표면에서도 발생한다.  

 



 

복잡한 공간성에 시간성이 추가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 리드미컬하게 만들어진 선은 파도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매끄러운 거울 표면 위로 역동적으로 선이 갈라지는 모습은 필립 볼이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언급한 ‘비 평형 성장’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자연적인 모양이다. 필립 볼에 의하면 살아있는 세포 역시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비하고 폐기물을 만들어내면서도, 정체성과 기능을 유지하는 동적 정류(定流)상태에 있다. 비 평형 정류상태는 소용돌이, 달리는 자동차,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비롯하여 어디에나 존재한다. 일리야 프리고진의 예측에 따르면 연속적인 가지치기의 점들을 통해서 비 평형 정류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각각의 가기치기 점에서 계는 두 가지 길 중의 하나를 선택한다. 이러한 가치치기 점은 역사의 개념을 물리학에도 도입시켰다. 겉으로 보이는 무질서에도 질서가 내재되어 있으며, 그 역도 성립된다. 

 

질서와 무질서는 그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 간의 역학관계를 통해서 진정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작은 테트라포드 수 천 개를 용접하여 큰 테트라포드 한 쌍을 만든 작품은 다른 것과 달리 안팎으로 바람이 통하면서도 바깥으로 활발한 기운을 뻗치고 있는 색이 칠해져 있다. 그것은 분열하며 증식하는 구조, 자기상사성(self-similarity)을 가지면서 무한 복제되는 프랙탈 구조이다. 지형학적으로 볼 때 테트라포드가 놓이는 복잡한 해안선 자체가 프랙탈 구조를 이룬다. 한다운의 작품 속 프랙탈 구조는 바깥을 반영하며, 동시에 그 스스로를 반영한다. 5개의 테트라포드를 연결하여 꽃처럼 만든 작품은 구조의 의미를 기하학에서 유기체로 확장시킨다. 화강석으로 된 단위들이 DNA의 이중 나선처럼 연결되는 가운데, 말단 부분은 살구 색 대리석으로 만들어 붙여, 양질이 전화되는 순간을 표현한다. 불활성의 구조가 생명이라는 차원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박스에 재료만 넣어 흔들어서는 안 되고 정합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꽃 부분에 새겨진 소용돌이무늬는 유전자의 나선형 구조, 더 직접적으로는 작가가 오마주 하는 로버트 스미드슨의 [나선형 방파제]와 닮았다. 이 작품은 큰 규모는 아니지만, 모듈을 여러 각도로 결합시켜 역동적인 구조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 인공구조물인 테트라포드가 가지는 조합 및 확장의 가능성은 소통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작가는 나선형 방파제 형태를 전시장 벽에도 평면으로 크게 돌려놓았다. 거의 토목공사 급으로 조성된 스미드슨의 원래 작품은 현재 물에 완전히 침식되어 사라지고 없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서 서서히 해체된 것이다. 광대한 대지 위에 새겨진 소용돌이 문양은 무한에의 열망을 상징한다. 그러나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념비는 아니다. 소용돌이 문양이 보여주는 반복적 단위의 누진적인 발전은 단지 주어져 있는 것, 즉 혼돈으로부터의 탈출이며, 우주나 생명이 진화하듯이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진화는 새로운 탄생을 위한 사라짐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통 역시 이미 있는 것의 균질적 교환은 아니다. 그것은 사라짐 또는 도약과 관련되는 사건이다. 한다운이 작품의 모체이자 모듈로 삼는 구조가 구별되는 두 부분을 완전 밀봉시키는 차단제가 아니라, 50% 정도는 투과시키면서 길항작용을 한다는 점은 그것을 잘 알려준다. 그것은 들이치는 파도의 에너지를 막는 것이 아니라, 변형시킨다. 육지와 바다로 대변될 수 있는 구별되는 두 부분은 밀고 밀리면서 소통한다. 그것은 경계라기보다는 접촉면이며, 이런저런 형식의 테트라포드는 접촉면의 확장이라는 상징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융통성 있는 방식으로 하나가 다른 하나로 완전히 흡수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차이(difference)는 보존되며, 오히려 차이의 에너지에 의해 접촉은 보다 극적인 사건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것이 기계적 소통과는 다른 소통의 이상적인 방식, 즉 예술적인 방식이다. 

 

한다운의 작품에서 타자와의 접면을 확장시키는 단단한 구조체는 마치 세포막처럼 다른 것을 투과시킨다. 여기에서 소통은 단지 같은 것이 교환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체계의 바깥에 있는 것을 동화하지 않은 채 끌어들이는 것은 체계 자체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것은 타자를 동질화하고, 동질화를 확장시키려는 제국주의적 욕망이 아니다. 가라타니 고진이 [은유로서의 건축-언어, 수, 화폐]에서 말하듯이, 개념적 사유의 틀, 형식주의, 이론적 체계의 구조 바깥에 있으면서 그 틀 안으로 결코 내면화될 수 없는 타자, 그러나 그 틀의 존립자체가 가능하기 위해서 부단히 소통되지 않으면 안 될 타자인 것이다. 한다운의 작품은 그러한 타자의 존재를 양각화 한다. 그의 작품은 구조자체가 아니라, 소통이라는 사건이 가능하기 위한 구조의 연출에 집중되어 있다. 자동적인 소통이 지배하는 시대, 극적인 사건만이 소통의 계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비트겐슈타인을 인용하면서, 수학조차도 하나의 통일된 기초로 단일화 될 수 없는 다양한 발명들이 가지각색으로 뒤얽혀있는 하나의 묶음이라고 주장한다. 예술은 말할 것도 없다. 고진은 건축의 예를 들고 있지만, 건축을 조각이라고 바꿔놓아도 의미는 성립된다. 즉 건축(조각)은 그것이 제작자의 통제를 넘어서는 제작 또는 생성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탁월한 사건이다. 조각은 공통의 규칙 없이 일어나도록 조건 지어진 의사소통의 한 형태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타자, 즉 동일한 규칙들의 집합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인 것이다. 기계적 반복을 요구할 뿐인 자기 충족적 형식체계, 그것을 해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타자이며, 예술 또한 이렇게 필수 불가결한 타자와의 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예측할 수 없이 밀려드는 방파제 앞의 파도처럼 불균형에 입각해 있으며, 그만큼 ‘운명을 건 도약’(가라타니 고진)을 요구한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