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살던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은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밤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성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
- 『2013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작가,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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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는 지난해 문예지에 발표된 많은 신작시들 가운데 120명의 시인, 문학평론가, 출판편집인이 좋은 시로 가려 뽑은 80여 편을 묶은 책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작품이「창작과비평」가을호에 발표한 공광규 시인의「담장을 허물다」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동료문인들로부터 지지받은 2012년의 가장 좋은 작품인 셈이다. 시가 비교적 조금 길다 싶은데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한 감동을 자아내면서 읽는 사람을 덩달아 신나게 하는 작품이다.
자본주의 체계 아래 늘 문제를 야기했던 소유 개념에 대해 ‘담장 허물기’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한 성찰로써 내 것만을 소중히 여기는 배타적 소유욕을 시원하게 전복시키고 있다. 인위적인 소유의 경계를 허물었더니 새로운 소유의 영역이 기분 좋게 확대되어 펼쳐진다는 유머와 위트, 시적 낙관들로 가득하다. 담장을 허무는 행위는 스스로 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나의 소유를 내려놓고 비우고 경계를 지워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실로 옹졸하고 협량한 소유욕에서 벗어나 통 큰 우주적 자아로 거듭나고 있음을 본다.
박노해 시인은 ‘나쁜 사람’을 ‘나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적어도 세상을 나쁜 놈으로 살아가지 않으려면 제 것만 알고 제 것만 귀하게 생각하는 극단적인 이기심만은 버려야겠다. 이 시는 좋은 시 읽기의 미적 쾌감과 여운을 배가시키면서 그 대목을 명랑한 화법으로 가르치고 있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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