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과 실재 / 윤석산
어렸을 적 내가 살던 신당동에는 "일산 배추"라고 외치며 다니는
야채장수가 있었다. 아무도 그 아저씨가 파는 배추가 일산에서
재배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일산이 여기서 어딘데, 정말 저 배추를 일산에서부터 가지고
왔을까, 하고 의심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 아저씨가 일산에서
키운 배추라고 외치면, 우리는 모두 한 조각 의심도 없이
그렇다고 믿었다.
영광굴비, 흑산도 홍어, 강원도 더덕, 영덕 게라고 외치는 소리
앞에서, 실상 이들 모두가 그곳이 진정한 산지가 아니라는 건
우리 모두 잘 안다. 이들이 비록 중국 산둥반도를 지나, 또는
칠레를 지나, 러시아 해협을 지나, 어느 농가의 비닐하우스를
지나 그들이 우리에게 왔다고 해도.
우리는 영광이라는, 흑산도라는, 강원도라는, 영덕이라는
상징을 먹고 산다. 오늘 우리는 다만 상징으로만 남아 있는,
상징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상징은, 상징은 곧
오늘 우리의 실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 淸韻詩堂, 시인을 찾아서
글쓴이 : 동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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