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부터 가을 끝까지 길에는 풀꽃들이 피어났다. 붓꽃을 좋아하는 나는 붓꽃을 꺾어 들고 집으로 갔다. 예술은 극장엘 가거나 전시회에 가거나 시간을 내어 따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는 일, 지금 당신이 바라보고 하고 있는 모든 삶의 행위가 다 예술이다. 삶의 예술, 그 작은 풀꽃 한 송이의 감동이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당신이 보는 세상을 바꾸는 것은 크고 위대하고 화려한 물건이 아니다. 작은 풀꽃 한 송이가 세상을, ‘그곳’을 바꾼다.
이 세상 모든 풀과 나무가 다 초록의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던 봄여름이 지나 이제 이 세상 모든 풀이 꽃을 다 피우고 열매를 맺는 가을이다. 감이 익고 밤이 익고 수수가 익고 벼들이 샛노랗게 익어 간다. 가을 날씨가 참 잘한다. 높은 하늘 찬란한 햇빛, 조용한 강물, 산등선에서 반짝이는 가을빛, 가을빛이 왔다. 아, 가을이구나. 그렇게 가을이 오는 산을 보면서 문득 나는 지난 봄날 차 안에서 바람에 날리는 벚꽃 잎을 보며 ‘하루’라는 시를 썼던 생각이 떠올랐다.
![](https://oimg3.kbstar.com/bbs/22/918/yt_1_2013_10.jpg)
봄부터 가을 끝까지 길에는 풀꽃들이 피어났다. 그 길은 나의 학교였다. 선생이 되어 결혼하고도 나는 그 길을 걸어 다녔다. 길은 변했지만, 그 꽃들은 변함없이 피어났다. 붓꽃! 나는 붓꽃을 좋아했다. 반쯤 핀 붓꽃과 활짝 핀 붓꽃을 꺾어 들고 집으로 갔다.
집 가까이에 이르면 강변의 내가 심은 느티나무 아래서 놀던 아이들이 나를 보고 달려왔다. 아이들에게 꽃을 주면 아이들은 꽃을 받아 들고 집으로 뛰어가 부엌문을 열고 나오는 엄마를 부르며 엄마에게 꽃을 내밀었다. 꽃을 받아 들고 엄마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아이들과 아이들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아내의 얼굴은 생생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가을이면 나는 구절초 꽃을 그렇게 꺾어 들고 집으로 갔다. 우리 방에는 봄부터 가을 끝까지 꽃들이 꽃병을 떠나지 않았다. 겨울이면 찔레 열매나 장구밥 열매가 그 꽃병에 꽂혀 있었다.
아파트에 살면서 나는 시골에서 꽃을 꺾어 왔다. 어느 날은 내 머리 위에 벚꽃 잎이 몇 잎 얹혀 있었다. 들꽃을 꺾어 들고 집으로 오거나 그렇게 꽃잎을 머리에 이고 오는 나를 보고 아파트 사람들은 “역시 시인은 달라”라고들 했다.
아이들이 자랐다. 어느 봄날 집으로 돌아온 큰 아이가 꽃송이가 서너 개 달린 개나리 꽃가지를 가방 속에서 꺼내 아내에게 주는 것을 보았다. 아내는 환하게 웃으며 그 꽃가지를 유리컵에 꽂아 싱크대 위에 놓아두었다. 직장을 그만둔 뒤로는 꽃을 꺾어 올 수 없어 베고니아를 기른다. 학교에 근무할 때도 나는 일 년 내내 그렇게 꽃병에 꽃을 꽂아놓거나 겨울이면 베고니아를 키웠다. 내가 꽃을 꽂지 못하면 아이들이 얼른 학교 뒤꼍에 가서 개망초 꽃을 꺾어 꽂아 두곤 했다.
예술은 극장엘 가거나 전시회에 가거나 날을 받거나 시간을 내어 따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는 일, 지금 당신이 바라보고 하고 있는 모든 삶의 행위가 다 예술이다. 삶의 예술, 그 작은 풀꽃 한 송이의 감동이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문득, 그렇게 세상이 달라 보이는 힘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힘에서 온다. 당신이 보는 세상을 바꾸는 것은 크고 위대하고 화려한 물건이 아니다. 작은 풀꽃 한 송이가 세상을, ‘그곳’을 바꾼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이 세상을 바꾸는 일은 이 세상 모든 것에 진심을 주는 일이다. 진심을 다해 마음을 줄 때, 내 마음이 다른 것에 가 닿을 때 나와 세상은 변한다. 세상을 얻는 일은 풀꽃 같은 한 송이 꽃을 주는 일이다. 어느 여름날 학교 뒤꼍에 핀 개망초 꽃을 보며 나는 이런 시를 썼다.
![](https://oimg3.kbstar.com/bbs/22/918/yt_2_2013_10.jpg)
출처: KB레인보우 인문학. 국민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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