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김용택의 시 이야기] 서로 외롭지 않게 된 하찮은 가치

sosoart 2013. 10. 18. 16:22

[김용택의 시 이야기] 서로 외롭지 않게 된 하찮은 가치 김용택의 시 이야기 등록일2013.10.11
서로 외롭지 않게 된 하찮은 가치
봄부터 가을 끝까지 길에는 풀꽃들이 피어났다. 붓꽃을 좋아하는 나는 붓꽃을 꺾어 들고 집으로 갔다. 예술은 극장엘 가거나 전시회에 가거나 시간을 내어 따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는 일, 지금 당신이 바라보고 하고 있는 모든 삶의 행위가 다 예술이다. 삶의 예술, 그 작은 풀꽃 한 송이의 감동이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당신이 보는 세상을 바꾸는 것은 크고 위대하고 화려한 물건이 아니다. 작은 풀꽃 한 송이가 세상을, ‘그곳’을 바꾼다.
가을꽃들이 피어난다. 문득 한 소식 전해 오는 선선한 바람이 나의 세상을 새롭게 한다. 새로 보이면 그게 사랑이다. 아니면 이별이다. 달라진 세상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에 구절초 꽃이 피어나더니, 쑥부쟁이 꽃도 피어난다. 마타리 꽃도 피었다. 물봉선 꽃도 피었다. 고마리 꽃이 피었구나. 억새도 피었다. 깊은 골자기에 싸리 꽃도 피었다. 가을이구나! 가을!
이 세상 모든 풀과 나무가 다 초록의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던 봄여름이 지나 이제 이 세상 모든 풀이 꽃을 다 피우고 열매를 맺는 가을이다. 감이 익고 밤이 익고 수수가 익고 벼들이 샛노랗게 익어 간다. 가을 날씨가 참 잘한다. 높은 하늘 찬란한 햇빛, 조용한 강물, 산등선에서 반짝이는 가을빛, 가을빛이 왔다. 아, 가을이구나. 그렇게 가을이 오는 산을 보면서 문득 나는 지난 봄날 차 안에서 바람에 날리는 벚꽃 잎을 보며 ‘하루’라는 시를 썼던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또 하루가 간다./이러다 보면 이틀이 사흘이 되겠지./너의 하루는 어떤 꽃이 지고/또 어떤 꽃이 피어나더냐.//꽃피는 일이 얼마나 힘 드는 일인지./꽃 지는 일은 또 얼마나 힘든 일인지.//하필이면,/이 봄날이/왜 내 일이 되었는지.//오동 꽃은 지고/이러다가 이레하고 여드레/그러다가 아흐레 열흘 그리고 또/하루

그러다가 문득 달라진 계절의 문턱을 넘으며 나는 ‘일자소식’이라는 시를 썼다.

선선해 졌어요./좋아요. 새벽이면/귀뚜라미들이/내 홑이불을 밑으로 발을 디밀고/운답니다./그 곁에, 가는 비가 서서/부슬거려요/부슬대는 소리를/잡아 다녀 덮습니다./한 소식 받아, 한세월 건너 디딜/끝이/따스한 그대 발 밑 온기를/찾아가네요./문득 일어나, 그립다고/일자 소식/받아씀



나는 오랜 세월 시골에 살며 초등학교 6년 동안 강 길을 걸어 다녔다. 차가 아닌 사람의 발길로 낸 길은 좁은 오솔길이었다. 강변 풀밭으로 난 길은 구불구불 휘어지고 굽이가 많았다.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걸으면 쉼 없이 나타나는 오솔길은 내게 늘 신비로운 세계를 가져다주었다. 길을 걸어가다 보면 운동장만 한 호수가 나타나고 징검다리가 나타났다.
봄부터 가을 끝까지 길에는 풀꽃들이 피어났다. 그 길은 나의 학교였다. 선생이 되어 결혼하고도 나는 그 길을 걸어 다녔다. 길은 변했지만, 그 꽃들은 변함없이 피어났다. 붓꽃! 나는 붓꽃을 좋아했다. 반쯤 핀 붓꽃과 활짝 핀 붓꽃을 꺾어 들고 집으로 갔다.
집 가까이에 이르면 강변의 내가 심은 느티나무 아래서 놀던 아이들이 나를 보고 달려왔다. 아이들에게 꽃을 주면 아이들은 꽃을 받아 들고 집으로 뛰어가 부엌문을 열고 나오는 엄마를 부르며 엄마에게 꽃을 내밀었다. 꽃을 받아 들고 엄마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아이들과 아이들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아내의 얼굴은 생생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가을이면 나는 구절초 꽃을 그렇게 꺾어 들고 집으로 갔다. 우리 방에는 봄부터 가을 끝까지 꽃들이 꽃병을 떠나지 않았다. 겨울이면 찔레 열매나 장구밥 열매가 그 꽃병에 꽂혀 있었다.

아파트에 살면서 나는 시골에서 꽃을 꺾어 왔다. 어느 날은 내 머리 위에 벚꽃 잎이 몇 잎 얹혀 있었다. 들꽃을 꺾어 들고 집으로 오거나 그렇게 꽃잎을 머리에 이고 오는 나를 보고 아파트 사람들은 “역시 시인은 달라”라고들 했다.
아이들이 자랐다. 어느 봄날 집으로 돌아온 큰 아이가 꽃송이가 서너 개 달린 개나리 꽃가지를 가방 속에서 꺼내 아내에게 주는 것을 보았다. 아내는 환하게 웃으며 그 꽃가지를 유리컵에 꽂아 싱크대 위에 놓아두었다. 직장을 그만둔 뒤로는 꽃을 꺾어 올 수 없어 베고니아를 기른다. 학교에 근무할 때도 나는 일 년 내내 그렇게 꽃병에 꽃을 꽂아놓거나 겨울이면 베고니아를 키웠다. 내가 꽃을 꽂지 못하면 아이들이 얼른 학교 뒤꼍에 가서 개망초 꽃을 꺾어 꽂아 두곤 했다.

예술은 극장엘 가거나 전시회에 가거나 날을 받거나 시간을 내어 따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는 일, 지금 당신이 바라보고 하고 있는 모든 삶의 행위가 다 예술이다. 삶의 예술, 그 작은 풀꽃 한 송이의 감동이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문득, 그렇게 세상이 달라 보이는 힘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힘에서 온다. 당신이 보는 세상을 바꾸는 것은 크고 위대하고 화려한 물건이 아니다. 작은 풀꽃 한 송이가 세상을, ‘그곳’을 바꾼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이 세상을 바꾸는 일은 이 세상 모든 것에 진심을 주는 일이다. 진심을 다해 마음을 줄 때, 내 마음이 다른 것에 가 닿을 때 나와 세상은 변한다. 세상을 얻는 일은 풀꽃 같은 한 송이 꽃을 주는 일이다. 어느 여름날 학교 뒤꼍에 핀 개망초 꽃을 보며 나는 이런 시를 썼다.

매미가 운다./매미 소리에게 내 마음을 준다.//개망초 꽃이 피었다./꽃에게 내 마음을 준다. //살구나무에 바람이 분다./바람에게 내 마음을 준다.//날아가는 나비에게/가만히 서 있는 나무에게 마음을 주면/나비도 나무도 편해지고/내 마음이 편안해 진다.//흘러가는 저기 저 흰 구름에게/마음을 실어주면/이 세상 처음이었던 내가 보인다./처음은 늘 환했다.//생각이 끝나는 곳에서, 새는 난다/내가 이 세상의/처음이다.



그리고 어느 늦가을 날 서울에 갔다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 산모퉁이를 지나면 나타나는 이름 모를 작은 마을을 지나며 ‘이 하찮은 가치’라는 시를 썼다.

텅 빈 들 끝,/산 아래 작은 마을이 있다./어둠이 온다./몇 개의 마을을 지나는 동안/지나온 마을보다/다음에 만난 마을이 더 어둡다./그리고 불빛이 살아나면/눈물이 고이는 산을 본다./어머니가 있을 테니까. 아버지도 있고,/소들이 외양간에서/마른 풀로 만든 소죽을 먹고,/등 시린 잉걸불 속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며/고구마가 익는다./비가 오려나 보다./차는 빨리도 달린다. 비와/낯선 마을들,/백양나무 흰 몸이/흔들리면서 불 꺼진 차창에 조용히 묻히는/이 저녁/지금 이렇게 아내가 밥 짓는 마을로 돌아가는 길, 나는/아무런 까닭 없이/남은 생과 하물며/지나온 삶과 그 어떤 것들에 대한/두려움도 비밀도 없어졌다./나는 비로소 내 형제와 이웃들과 산비탈을 내려와/마을로 어둑어둑 걸어들어 가는 전봇대들과/덧붙일 것 없는 그 모든 것들에게/이렇게 외롭지 않다./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지금의 이 하찮은, 이유가 있을 리 없는/이 무한한 가치로 /그리고 모자라지 않으니 남을 리 없는/그 많은 시간들을 새롭게 만들어 준, 그리하여/모든 시간들이 훌쩍 지나가버린 나의 사랑이 이렇게/외롭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너무 크고 위대한 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저녁을 먹은 부부가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볼 시간도 없다. 가족들이 모여 앉아 밥 먹을 시간도 없다. 아이들과 나란히 누워 책을 읽는 시간도 사라졌고, 아이들의 고민을 들을 시간도, 아내와 남편의 고민을 들을 시간도 다 사라졌다. 잘살아보자는, 돈을 많이 벌어보자는 시간에 우리는 우리의 ‘이 하찮은 가치’들을 다 빼앗겨 버린 것이다. 빼앗긴 하찮은 가치를, 우리의 가치를, 정말 ‘서로 외롭지 않은 가치’를 찾아야 한다. 그 하찮은 가치를 찾지 못한다면, 서로 외롭지 않은 그 가치를 누리지 못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가치를 어디서 찾는다는 말인가. 가을이 간다.

출처: KB레인보우 인문학.  국민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