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안개낀 초원에서
붉은 깃털의 새떼
김용택
마을 앞 정자나무 아래 들면
숨을 멈추라
바람의 노래를 들을 것이다
울고 왔다 웃고 갔을 인생과
울고 왔다 울고 간 인생들을
그리고 그 사랑을
그리하여 그 세월이 두 팔로도 모자라게
자랐음을
이 나무 아래 들면
눈을 감으라. 수없이 많은
새 이파리들이 새 역사를 쓰고
새 정부를 조각하는 꿈을 꿀 것이다
나뭇가지들이 자라는 동안
달빛이 나뭇잎들을 지나며 전설을 만들고
사랑하는 이들이
물고기들이 물을 차고 뛰어올랐다가 떨어지며
일으키는 파문 속에 갇혀
그대를 기다리다 갔음을 알리라
이 나무 아래 들면 발걸음을 멈추라
이 나무가 한 알 작은 씨앗이었음을
바람과 비와 햇살을 품은
흙 속에 묻혀 돋아난
두 잎
어린 새싹이었음을 눈부셔하라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멈추고
눈을 감고 생각하라
이 나무의 씨가 또 한그루의 커다란
나무를 키울 씨를 이 지상에 떨어뜨릴 것임을 믿으라
그들이 해와 달과 바람을 따르며
이 세상으로 솟아오르는
그 소리를 들으라
아버지가 죽고 그 아들이 죽고
그 아들이 태어나 이 나무 아래 서서
나무를 올려다볼 것임을 믿으라
어둔 밤 별빛이 지상을 지나며 하는 일이 끊임없음을
그 사랑의 노래를 들으며
어느 날 땅으로 내린 나뭇잎들이
일제히 날개를 치며
눈부신 하늘로 날아오를
붉은 깃의 새떼가 될 것을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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