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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관념화가 야기하는 난점에 대해/ 이선영

sosoart 2014. 4. 25. 11:12

 

미술의 관념화가 야기하는 난점에 대해

이선영

미술의 관념화가 야기하는 난점에 대해

  

이선영(미술평론가)

  

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자기 자신만을 지시하는 경향이 생겨난 이래, 예술의 진정한 자율성이 확보되기 보다는 추상적 관념이나 미술계 제도에 의지 하는 경향이 더 강해졌다. 자신이 원래 비롯되었던 세계를 괄호 친 채 자기 언어에만 집중하는 함으로서 생겨난 밀도나 강도는 충만하면서도 공허이다. 가뜩이나 비좁은 지구에 뭔가 더 추가하지 않는 ‘개념 있는’ 미술도 창안되었지만, 한 작가의 관념적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제도적 시스템에서 출연된 공공 재원으로 타인의 노동력을 대거 동원하는 장황한 스펙터클 또한 무수히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일시적인 시공간만을 점유한 후 사라지는 것이 다행인 시각 공해도 적지 않다. 미술계라는 제도에 의해 선택된 주체의 무한 확장은 ‘주체’와 ‘재현’이라는, 현대예술에서는 그자체가 문제시될 수 있는 범주들을 간과한다. 선택된 주체가 되기 위해 제도가 움직여지는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 또한 필수가 되었다. 

 

그러한 전략의 결과물로서의 작품은 기회를 잡고자하는 모든 이들이 벤치마킹을 해야 할 시스템의 결정체로 보이기도 한다. 예술이 사회에 부차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사회일수록 전략가들은 힘을 발휘한다. 전략가들은 제도가 제도를 유지하는데 전력을 기울이는 제도의 관성, 곧 제도의 맹점을 잘 활용한다. 미술 또한 광고를 따라 소소한 것을 뻥튀기하는 기술을 내면화한다. 개념미술이라 불리는 유파 말고도, 예술에 있어 관념화는 적지 않은 부작용을 부른다. 지구상에는 처치곤란의 물질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강요된 의미 또한 폭주하며, 예술 또한 이 대열에 끼어든다. 예술가가 본격적으로 몰입해야할 창작 앞에는 추후에는 벗어나야하는 덫을 강제로 또는 스스로 내면화하는 오랜 과정이 있다. 예술가들의 전기에는 이러한 덫을 극복하는 과정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제도로서 ‘예술’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발생되어 정착한 제 1세계 이외의 지역에서 이러한 관념화는 마치 플라톤적 이데아의 세계처럼 서구에 원형을 둔 미술 및 미술사를 재현해야하는 과제에 의해 강화된다. 

 

염성순作.[공복)].Acrylic on canvas.53x45.5cm.  2007 년.


(문학광이기도 한 화가 염성순의 작품은 단순히 문학을 그림으로 번역한 삽화가 아니라, 미술의 언어에 의해 재탄생한다. 작품 사진은 시인 이상의 작품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예술을 전지구적, 전역사적으로 보편화하기 이전에 그 발생과 전개에 있어서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유럽으로 미국으로 예술 유학을 떠나는가? 19세기에는 파리가 20세기에는 뉴욕이 세계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성직자나 귀족 같은 전통적 후원자를 잃고 익명의 소비자를 위해 창작해야하는 근대 미술가는 자본 및 시장의 중심과 밀접할 수밖에 없었다. ‘창조’의 선제 조건으로서의 ‘재현’은 그 어디서도 면제받을 수 없는 중요한 과정이지만, 재현이 지배적 제도와 얽혀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원근법에서 알 수 있듯, 주체의 위치에 따라 재현의 질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주체의 목표 지점이 될 소실점을 마주보는 그 결정적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다. 개념화 또는 관념화된 예술이야 말로 재현주의의 정점에 있다. 난해한 공식 같은 작품들이라고 해서 꽃그림이나 누드화 같은 부류 보다 더 심오한 것은 아니다. 

 

둘 다 확립되어 있는 어떤 것의 재현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사회적 주체로 만들어주는 사회의 지배적 언어, 즉 상징적 우주의 재현을 말한다. 감성과 경험의 문제였던 예술이 압축적으로 재현되어야 하는 지식과 언어의 문제가 되면서, ‘원본’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소수의 미술 지식인들의 그다지 보편적이라 할 수 없는 지식이 중요해진다. 관념화는 무엇보다도 코드화할 수 없는 예술을 전유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현대의 예술 이론에는 ‘해석에 대한 저항’(수잔 손택)도 생겨났다. 관념화는 예술을 더 어렵게 하면서도 손쉬운 과정으로 해소시킨다. ‘권력에의 의지’(니이체)와 무관할 수 없는 지식은 예술을 어떤 유력한 해석으로 환원시킴으로서, ‘재현이 아닌 생성’(들뢰즈와 가타리)으로서의 예술이 가지는 혁명적 잠재력을 순화, 무화시킨다. 관념화는 예술을 관념을 위한 알리바이에 머물게 함으로서 예술 자체를 쓸모없는 몸체로 만든다. 

 

그러나 예술 전문가들의 지식의 소통구조는 한정되어 있다. 안정된 ‘자리’만을 겨냥한 지식 활동은 그들이 공유하는 아카이브의 섭렵과 요약, 그리고 소개에 머무는 계몽의 장을 채워줄 뿐이다. 그것은 ‘교육전문가’의 양성과 확보를 위한 필수적 검증과정이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학자의 길’ 또한 그 계의 많은 구성원들에게 지속가능하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고독한 학자나 예술가의 길을 운운하기 전에, 우리가 몸 담그고 있는 계의 억압적 기제를 생각해 봐야할 것이다. 자신도 동의하고 합세하는 과정이 나를 억압하는 거대한 소외로 되돌아온다. 이러한 자기 지시적 과정에 의해 원래 어렵지 않았던 것도 필연적으로 어려워진다. ‘예술 전문가’만이 다룰 수 있는 뭔가가 계속 궁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냥 한 번에 가도 될 것을 한번 꼬고 두 번 꼬고, 거듭해서 꼬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 전문가들만의 방법이라는 것이 예술과 학문 자체 내재한 심오함과 같은 것일 수만은 없다. 

 

이해와 전달과정에 거의 대부분의 에너지가 사용되면서, 진정한 창안에 이르기 전에 해소되어 버리는 현대미술에 대한 지식의 생산/유통과정을 생각해 볼 때, 대중들 또한 현대 미술을 일종의 지식으로 받아들이며 어려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미술작품에서 가장 많이 주제로  체택되는 ‘소통과 치유’는 쓸데없이 난해해진 미술에서 나름의 쓸모를 찾아내기 위한 고육지책인지도 모른다. 소통과 치유란 지배적 언어, 즉 상징계의 요구이다. 그러나 원초적 현실—언어학과 심리학에서 실재계, 현실계, 기호계 등으로 불리우는—과 깊숙이 접속하려는 현대미술은 손쉬운 소통 및 치유와 관계가 멀다. 미술은 사회에 유통되는 정보로서의 소통,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기 전에는 치유할 수 없는 근본적 상처를 봉합하는 화해의 미봉책이 아니다. 현대예술이 소통과 치유를 위한 수단이 되기 힘들다. 그것은 현대예술이 돈이 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현대예술은 무엇보다 무엇인가를 반영하거나 전달하는 그 도구적 역할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임선희, [사랑해. I love you] .2013 acrylic on canvas. 24 x 24. 

( 임선희의 작품에서 작고 사랑스러운 분홍 캔버스는 글자--‘사랑해’--가 씌여지기 위한 중성적인 바탕에 머물지 않는다)

 

미술이 소통도 치유도 아니면, 유익한 교양인가? 독특한 창안보다는 확립된 것을 따라가기에 바빴던 급성장의 국가에서 미술은 알면 유익한 그 무엇의 축에 낄 수도 없었다. 모두가 욕망하기에 보편적 환금성과 호환성이 보장되는 명품이나 학벌은 많이 추구되었지만, 예술은 그렇지 못했다. 예술에서의 지식은 속도라는 면에서 나름대로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매개 과정이 본체가 됨으로서 예술가들은 영원한 학생이 되었으며, 그 자신 또한 성공적인 선생이 되기를 바란다. 자기지시성의 거대한 완성이다. 물론 예술가들도 평생 배워야하지만, 거기에는 정해진 코스워크라는 것이 없다. 스스로 배워야 한다. ‘배움에 왕도가 없다’는 말은 예술가들에게 가장 잘 해당되는 격언이다. 그러나 그 기원과 도달점에 있어서 타자를 향해 활짝 열려 있어야할 예술은 동일성의 논리에 갇혀 있음으로서, 대안의 삶이 아니라 지배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수단이 되고 만다. 

 

훌륭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 어떤 정보가 효과적으로 제공되어야 하겠지만, 그 역시 ‘네이버 지식인’의 시대에는 강조점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술 역시 정보화 과정에서 면제될 수 없다면, 정보 그자체 대신에 정보를 찾게끔 하는 동기 부여와 핵심 키워드를 암시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의미도 모른 채 외워왔던 교과과정이 궁극적으로 어떤 지식 보다는 그때에 주어진 체제에 순응적인 이들을 키워내기 위한 복제 과정은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 교육은 재현이다. 잡다한 또는 임의적으로 편집된 ‘체계적’ 지식이 아니라, 작업에 열중하는 이가 진정한 선생도 될 수 있다. 작업에 열중하는 이야 말로 작업을 위해 모든 가능성 또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품이라는 하나의 수렴점은 무수한 원천을 활용하며 정신과 육체를 놀려 꾸준히 진행한 결과이지 어느 순간의 돌연한 영감의 산물만은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창조의 유일한 법칙은 구성물이 혼자 힘으로 버텨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는 광인이나 아이들의 데생들을 보고 감탄하거나 감동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저 홀로 유지되기란 드문 일이다. 예술은 구조 또한 필요로 한다. 영감은 분명히 있겠지만,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장은 따로 있는 것이다. 논문이나 과제물을 가득 채우는 ‘공동 아카이브’의 코드화된 지식(정보)가 아니라, 작업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나 해법이 진정 전수되어야 할 지식이다. 훌륭한 작가이자 선생은 동등한 위치에 놓일 수 없는 상대, 즉 타자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는다. 자기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전수하려는 것은 가학 피학적이다. 많은 돈과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소요되는 학업은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외재적 과정이 아니라, 한 꺼풀, 아니 될 수 있으면 주체를 감싸는 수없는 꺼풀들이 탈피될 수 있는 진정한 변형의 장이어야 한다. 한편 실제로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의 열악성 또한 관념화를 부추킨다. 

 

‘공부’란 제대로 된 작업 환경이 갖추어질 때까지의 영원한 준비 및 대기 상태에서 그나마 할 수 있는 ‘보람된’ 일일지도 모른다. 굼떠진 몸과 돈이 많이 드는 물질적 과정보다 관념은 보다 분명한 진보(진도)를 가능할 법하다. 그러나 작업(손)이 따라가지 않는 관념의 경도는 작가 또한 몽상가에 머물게 한다.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고서라도 자신의 관념을 현실화하는 이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작가 아닌가? 작업구상이 담긴 스케치나 실험이 작품으로 고양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정을 거친다. 단번에 완수될 수 있는 작업이란 드물다. 대부분 오랜 지체와 도약의 거듭된 과정이 바로 작업이다. 시작이 곧 결과라는 식의 생각은 작가의 천재적 창조성을 신화화 하려는 물신, 또는 예술적 상품일 뿐이다. 기껏해야 작업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일 뿐이다. 그것도 유의미한 결과물이 있어야 완성되는 시나리오이다. 제대로 현실화되지 못해서 원래의 의도와 목적 등을 운운해야만 할 대상이 작품이라 할 수 있는가? 작품이란 작가 없이도 스스로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작가 스스로 작품이 되든지. 

 

1.최우람, consept sketch

2. 최우람, uram-opertus-sk02-draw

3.최우람,Opertus Lunula Umbra (Hidden Shadow of Moon), 2008

(최우람의 작업과정은 최초의 아이디어가 기념비적인 결과물로 완성되기 까지 무의식에서 길어 올린 영감과 치밀한 합리적 과정이 동시에 요구됨을 알려준다)

  

예술작품은 해석에 열려있어야 하지만, 열림을 가능하려면 닫힘 또한 요구된다. 열림이 너무 강조되면 무의미해지고, 닫힘이 너무 강조되면 맹목적 신비주의로 기울어진다. 여기에도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고, 그 역시 작가의 자질과 능력이다. 예술작품은 생명과 같이 열림과 닫힘을 조절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가진다. 무한을 접어 넣을 수 있는 유한, 무한한 게임의 수를 가능케 하는 규칙이 작동되는 것이 바로 작품이다. 예술의 관념화는 예술가들이 규칙은 창안하고 그 안에서 신나게 재미있게 노는 것이 아니라, 법칙화 된 규칙을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진정한 작가는 마치 자연과 같은 운명으로 다가오는 사회의 법칙을 그 본래의 자리인 규칙으로 상대화하는 자이다. 모더니즘에서 말하는 견자나 예언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술가는 전체를 볼 수 있기에 진정 지성적이다. 한편 자신의 작업을 정보로 잘 가공하고 포장해야 하는 제도로부터의 요구는 언제 결실을 맺을지 모를 불투명한 작업보다는, 나날이 페이지 수가 증가할 수 있는 지식에의 경도를 낳는 요인이다. 

 

현대미술의 학술화 또는 관념적 경향은 장식이나 상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지만, ‘물질화’가 아닌 개념이나 관념을 중시한다 해서 그로부터 면제 되는 것은 아니다. 개념미술은 주류 미술사의 한 챕터로 자리했으며, 이런저런 정보 뭉치들로 이루어진 개념적 작품들은 중요한 의미의 발원처이자 증거물로서 미술관에 잘 안치되어 있다. 미술의 관념화는 물신주의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물신주의를 최대한 활용하며 그 정점에 있다. 그것은 역사화 되었을 뿐 아니라, 현재에도 반복된다. ‘아카이브’ 전시라고 불리 우는 자료 더미들은 그것이 잘 압축되지 않았을 때 자료 조차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는다. 최초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것들이 계속 튀어나오는 부차적(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진짜 중요한) 과정은 예술적 게임의 정점에 놓여있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벌어진 큰 균열은 관념 1에서 관념 2로 재 서술 될 뿐인 지나치게 의도적인 작품보다 흥미롭다. 

 

그것이 법이나 과학이 아닌 예술을 하는 맛 아닌가. 해마다 대학에서 쏟아져 나오는 논문 또한 마찬가지이다. 왜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결론은 무엇인가가 대해 속 시원하게 투명한 연구업적이 드물고, 작업 현장에도 피드백 되기 어려움은 그들 스스로가 더 잘 알 것이다. 작업은 물론 이론 역시 자신이 깊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실존적 과정이다. 그것은 관념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예술에서 완성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되기 전에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유의미한 과정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도 길을 잃은 채 모호한 의도로 과도하게 집적된 자료들이라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한 언어를 둘러싼 또 다른 언어들의 층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들어야하는지를 방해한다. 주석이 주렁주렁 달린 긴 논문과 중간 길이의 평문, 그리고 축약적인 예술적 메시지가 궁극적으로는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닌데, 그 사이에는 서로에게 스며드는 모세관이 아니라 거대한 철조망이 드리워져 있다. 학계나 예술계나 실제는 그렇게 전문화되지도 않았으면서도 전문화의 난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미술계도 통섭 ‘전문가’가 필요할 지경이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철조망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과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제도 지향적인 이들은 남들은 장애로 여기는 경계에 안정감을 느끼며, 이 경계를 통해 자기 이익을 극대화한다. 철조망을 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은 정작 자신들은 자의적으로 여기저기를 넘나든다. 물론 계에 막 진입한 초짜들도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해야 한다는 점에서 경계 이전에 머물러있다. 계의 구성원들은 스스로 철조망을 치고 있는 사람인지 걷어내고 있는 사람인지를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단순한 이해관계가 아니라, 내적인 관계망의 부재는 각각의 작업을 외롭게 만든다. 익명적인 일반대중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술계를 이루는 구성원들끼리의 소통만 제대로 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최소한의 현실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기에 우리는 그렇게도 이런저런 ‘조직’에 편입되려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관료를 포함한 예술계의 구성원의 조직 편향성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예술은 소외의 극복이라는 아방가르드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외의 결정판으로 추락한다. 

 

홀로 모든 것을 조금씩 갖춰야하는 불가능한 숙제를 안고 있기에 우리의 미술은 참으로 무겁기만 하다. 그 무게는 진정한 창조를 위한 무게가 아니라, 현실의 단순 재생산을 위한 부분이 더 많다는 것이 문제이다. 학자나 평론가, 작가가 풀어나가는 방식만 다를 뿐인데, 서로를 못 알아보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수 있는 공통어가 없다. 각자의 자료들이 작품으로 잘 갈무리 된다면 서로에 대한 장벽은 낮아진다. 예술은 자료가 아니라 구성이다. 아니면 구성의 해체이다. 여기에는 자료 또는 코드로 환원될 수 없는 무엇이 요구된다. 그 무엇은 타자, 소수, 이질성, 탈코드화, 탈주, 숭고, 배리 등 무엇으로 불리던 간에, 예술은 재현과 동일성을 벗어나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폭주하는 정보의 바다에서 어떤 예술적 의미를 갈구하는 관객이나 독자로서는 양이 질로 전화하는 순간을 보고 싶을 따름이다. 이 전화의 순간을 추동하는 것은 개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작업을 시작했고 진행하고 마무리 지으면서 생겨나는 직관이라 믿는다. ‘지각들과 정서들의 복합체’(들뢰즈와 가타리)로서의 예술은 추상적 관념보다는 물질과 육체라는 구체성을 통해 보편성에 다가가야 한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