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공예 LIBRARY/미술·디자인·공예 자료집

민복기- 유동적 에너지로부터 단단한 체계로/ 이선영

sosoart 2014. 8. 30. 22:04

이선영 

 

민복기 / 유동적 에너지로부터 단단한 체계로

이선영

유동적 에너지로부터 단단한 체계로

 

이선영(미술평론가)

 

민복기는 다양한 색깔과 질감의 돌로 기계적 이동수단을 조각한다. 자동차, 배, 비행기, 로켓 같이 육해공을 막론하는데,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동수단들이 지나간 궤적이나 흔적이다. 이동수단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간단하게 특징만 요약되지만, 흔적들은 더 다양한 형태와 질감으로 구현되어 있다. 작가와 관객의 상상력은 이 부분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발현된다. 실제와 그림자같은 관계에서, 그림자가 실제를 압도하며, 실제는 최소한의 참조점이 되어줄 뿐이다. 그러나 장난감 크기의 최소한이라 할지라도 참조대상은 분명하다. 대상의 뒤에 따라붙은 변화무쌍한 것들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자의적인 형태가 아니라, 이동과 관련된 물질적 상상력의 발로이다. 이동수단 뒤에 나타난 흔적들은 불쾌한 배기가스 같은 오염 물질부터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떠남의 설렘까지 여러 스펙트럼을 가진다. 그것은 수직, 또는 수평의 이동을 추동하는 물질과 에너지 사이의 교환을 말해준다. 

 


 

흔적과 궤적이라는 그들의 위상은 조각이라는 정지된 매체에 시간성을 부여한다. 민복기의 조각에서 시간성은 그자체가 시간성의 상징인 이동수단의 재현 뿐 아니라, 작품의 부분들을 관객의 조작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한 장치에서도 강조된다. 그러나 돌로 제작된 것이라 무게와 크기의 한계 때문에 키네틱 아트나 영상매체 같은 적극적인 움직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잠재적, 실제적 운동감이 있지만 모터같은 기계적 동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관객이 여러 요소로 구성된 작품의 일부를 만지거나 이동을 상상함으로서 운동이 발생한다. 검은 바퀴를 가진 하얀 대리석의 자동차가 등장하는 작품은 이동의 궤적을 나타내는 나선형 덩어리를 통째로 돌려볼 수 있는데, 마치 맷돌을 돌리는 느낌이다. 그의 작품 속 자동차는 첨단장치를 갖춘 날렵하고 차가운 이미지가 없다. 의성어를 많이 사용하는 작품제목과 더불어 발견되는 청각적, 촉각적 속성은 단순한 시각성을 넘어서 관객이 서 있는 현실공간과 나란히 공존하는 조각의 위상을 강조한다. 

 

이동수단이 기계 특유의 직선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면, 흔적들은 곡선적이다. 흔적들은 대상의 재현이라는 부담을 벗어나 보다 유동적이다.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배 위아래에는 동력원의 연소, 구름, 물살이 동시에 연상되는 형상이 함께한다. 비행기나 로켓같은 비행체는 연소된 에너지나 이동의 궤적들이 마치 좌대처럼 아래에서 이동수단들을 받쳐준다. 벽에 거는 행성 시리즈에는 이동의 흔적이 없다. 보다 거시적인 차원의 이동에서 이동의 궤적은 그자체가 응집된 덩어리와 일치된다. 행성이라는 응집된 덩어리는 고체 뿐 아니라 액체와 기체 등 유동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벽에 걸린 행성 시리즈는 둥글게 형상화된 별과 그 위를 궤도처럼 움직이는 이동수단이 있다. 이 이동수단을 관객이 돌려볼 수 있다. 작품 [목성]은 목성의 색과 질감이 나는 오묘한 돌을 사용했으며, [행성]은 분화구가 있는 행성에 로켓과 탐사선이 있는 작품이다. 

 


 

 

행성들은 돌이 가지는 색이 최대한 활용되었다. 그것은 대우주와 닮은(유사한) 소우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민복기의 작품은 흰 대리석, 분홍대리석, 오석, 녹사암, 청석, 화강석, 적사암, 현무암 등을 사용해서 흰색, 분홍색, 검은색, 녹색, 주황색, 회색, 적색, 노란색 등을 낸다. 작품 [목성]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겉에서 칠해진 것이 아니라, 물질 내부로부터 나오는 원래의 색이다. 여기에 추가된 다양한 질감은 단색으로 전형화 된 돌조각의 이미지를 벗어난다. 촉감은 작품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돌을 쪼거나 그라인더로 찍거나 광을 내서 여러 질감을 낸다. 돌마다 다른 물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다양성을 꾀한다. 구멍 송송 뚫린 현무암 위에 지프차는 울퉁불퉁한 길 위의 긴 장정에 오른 여행자를 즉각 연상시킨다. 작품 [초록별]은 한 덩어리의 돌의 질감 차이만으로 육지와 바다를 구별했다. 그것은 초록 빛 지구를 형상화한 것인데, 광을 내서 짙은 바다처럼 보이게 한 부분과 육지의 거칠거칠한 지형을 형상화한 부분의 대조가 절묘하다. 

 

다양성은 돌의 선택이나 질감 구현 뿐 아니라, 여러 구성요소로 조합된 작품의 형식에서도 기인한다. 붙여서는 안 되는 돌조각의 금기를 어기고, 그는 여러 가지를 섞는다. 그러나 이전 작품과 달리 주로 돌만 활용한다. 돌은 다른 것과 섞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민복기의 작품 소재인 탈 것은 그 아기자기한 분위기에 실린 즐거운 여행의 기분이 내재해 있지만, 이러한 이동수단은 시공간을 정복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떠남은 자아를 확장시키는 또 다른 방식이다. 인류 역사를 보면, 더 빠른 속도를 내는 이동수단이 발견될 때 마다, 자국의 영토를 확장하려는 움직임 또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폴 비릴리오는 [속도와 정치]에서 속도가 가져온 역사의 가속화와 공간의 축소화를 말한다. 자동차나 버스 이외에 로켓 같은 이동수단은 그 어마어마한 속도를 통해 시공간을 정복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민복기의 작품에서 속도는 그것들이 뿜어내는 흔적들의 상대적 규모로 가늠된다. 

 

행성 시리즈에 나타나있듯, 여기와 저기, 지금과 그때의 차이를 말소해가는 이동수단의 속도는 지구 궤도 차원을 넘어선다. 동시에 구름이나 만화의 말풍선처럼 달린 이동의 흔적은 속도나 그 속도에 내재된 정복과 파괴를 지연시킨다. 산뜻한 색채와 따뜻한 질감, 깔끔하게 마무리된 외곽선이 특징인 민복기의 작품은 전쟁 같은 현실주의적 상상력보다는, 동화 같은 상상적 분위기가 강하다. 그가 주로 다루는 미디어인 돌 자체가 속도와는 거리가 있다. 보통 돌은 반석이나 초석같은 이미지와 연결된다. 여기에서 이동이 야기할 수 있는 속도감은 외연적이기 보다는 내포적이다. 그것은 한 점에서 또 다른 점으로의 연장적 이동이라기보다는, 어떤 위치에서든 분출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반 중력의 방향을 향해 솟구치는 민복기의 로켓은 그것을 알려준다. 여기에 새로운 궤적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따라가기 보다는 정처 없는 이동의 자유와 관련된다. 

 


 

돌로 되어 있지만, 형상자체는 유체적인 작품에는 자유롭고 우발적인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임계점에서의 응축된 힘이 있다. 배출된 후 시공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동의 흔적은 이동수단만큼이나 실재적이다. 이동수단과 함께하는 구름을 닮은 형상들, 그것의 굴곡 면과 가장자리는 구름만큼이나 변화무쌍하다. 이 에너지의 집적체는 자동차를 비롯한 모든 체계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 뭉글거리는 형상들은 에너지처럼 연속 질량체를 이룬다. 미셀 세르가 [헤르메스]에서 말하듯이, 세계의 형성은 고립된 사건, 순간적인 작용이 아니다. 세계의 형성은 끊임이 없는 연속적 형성이다. 미셀 세르는 우주발생론의 예를 들면서 최초의 불타는 성운에서 생겨난 세계의 체계가 냉각되고 굳어짐을 말한다. 그리고 오늘날 행성은 견실한 핵 위에 바다의 옷과 기체성의 외투를 걸치고 있다. 이것들은 행성의 역사를 말해주는 표적이다. 여기에 일반 물체의 형성법칙이 있다. 

 

사물들의 형성처럼 인류의 역사도 물렁물렁한 것에서 견고한 것으로, 끈적끈적한 것에서 단단한 것으로 나아간다. 실증과학은 견실한 고체역학이다. 그렇지만 이제 유동성이 다시 발견된다. 재단된 모서리가 사라지며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나타난다. 미셀 세르에 의하면 실증주의의 시대에는 절단과 이분법의 과학이라는 모델 아래 고체 역학만이 견실한 상태였다. 그런데 유체 열역학이 등장해서 구름과 불분명한 것들, 불과 순환현상이 입지를 되찾는다. 고체의 역사는 이제 액체로, 기체로 귀착한다. 복잡하게 소용돌이치는 이동의 궤적은 고체의 독단성을 휘젓는다. 그것은 소용돌이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든다. 이 근본적인 소용돌이가 없다면 어떤 것도 형성되지 않는다. 어떤 것도 실재하지 않는다. 미셀 세르적 관점으로 민복기의 작품을 본다면, 이동수단이 흔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흔적이 이동수단을 만든다. 나선형으로 감겨 올려 진 끄트머리나 구불구불 꼬인 긴 장기에서 나온 듯한 자동차는 그러한 면모를 알려준다. 

 

 

이동수단으로 가시화되는 체계는 간단한 기계장치일 따름이다. 반면 그 뒤에 따라 붙는 에너지는 힘을 낳고, 힘은 운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점점이 분산된다. 거세게 분출된 것들도 작은 구름처럼 점점이 사라진다. 고체적 이동수단과 대조되는 유체와 난류의 이미지는 즐거운 또는 괴로운 혼돈과 파국을 예시한다. 새로운 시대의 혼돈의 과학에는 유동적인 이미지가 우세하다. 양적인 변화를 넘어선 질적인 도약이 있다. 민복기의 행성 시리즈에는 이동의 궤적이 야기하는 유동적 요소는 없지만, 여러 굴곡 면을 가지는 둥근 표면에는 이동 또한 자유로운 탈주의 이미지가 있다. 그 위의 배나 자동차, 로켓같은 이동수단은 시계처럼 표면을 돌지만, 행성의 실루엣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원형, 또는 표면은 무한하다. 관객이 이동수단을 돌려볼 때 거기에는 별다른 저항이 없는 매끄러운 표면의 활주가 감지된다. 

 

작가는 이러한 흐름을 활성화하는 자이며, 이때 작품은 하나의 돌파구가 된다. 민복기의 작품에서 돌파는 이동수단보다는 이동의 궤적에서 더 분명하다. 이동수단과 궤적은 원인과 결과, 중심과 주변 같은 관계를 가지지만, 그의 작품에서 그 관계는 역전된다. 현대사회에서 이동수단은 체계적으로 생산되는 대량 상품에 속한다. 그 체계는 속도를 통해 시공간을 더 빠르고 넓게 정복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탈주의 수단도 제공한다. 작가는 이동수단의 재현보다는 변칙적인 무형의 것을 더 강조함으로서 또 다른 기능과 쓸모를 드러낸다. 그것은 체계에 기생하거나 그로부터 파생되었지만, 더 근원적인 요소를 이룬다. 이동수단 뒤에 연출한 다양한 흔적들은 어떤 본성, 즉 명확한 형태와 위치가 없는 ‘현존의 환영(simulacrum)’(데리다)이다. 이러한 환영들은 여기에서 저기로의 물리적 이동이라는 관념적으로 가정된 중심을 해체하고, 보다 자유로운 놀이 즉 진정한 이동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