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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위한 참다운 나눔, 실천을 통해 나눔정신 구현한 사람들

sosoart 2014. 9. 22. 22:08

공동체를 위한 참다운 나눔, 실천을 통해 나눔정신 구현한 사람들
작성자 문화재청 전화번호
작성일 2014-09-02 조회수 146

공동체를 위한 참다운 나눔, 실천을 통해 나눔정신 구현한 사람들 
공동체 생활에서 나눔은 소수의 뜻있는 사람들이 행하는 예외적인 선행이 아니라 누구나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생활의 일부분이 됐다. 재난이나 재해가 닥칠 때마다 여러 곳에서 자원봉사자들과 성금이 답지한다. 이것은 우리 공동체 문화의 오랜 전통이 이어진 결과로, 가진 자의 의무를 다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람들을 찾아보는 것은 그래서 의미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남달리 공동체의식과 나눔정신에 투철했던 인물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눔의 실천을 통해 가족과 친족, 나아가 공동체의 생활 안정과 평화를 꾀한 인물들이 있었다. 조선시대 ‘주변 1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힘썼던 경주 최부자집, 백성이면 누구나 출입하며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춰 집을 지은 명재 윤증 선생, 흉년으로 궁핍해진 주민에게 아낌없이 가산을 풀어 구제한 제주 김만덕, 구한말 만석꾼이 되어 계몽교육과 빈민구제에 앞장선 김 정부인(貞夫人), 일제강점기 때 교육사업과 소작농 혁파에 재산을 털어 넣은 허만정 등이 이들이다.

이들 인물들의 정신이 지금까지 모범적인 사례로 전해져오고 있고, 지금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나눔도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듯하다. 물론 아쉽게도 개인의 거액 기부는 아직 서구 선진국들에 비해 활발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어려운 이웃의 생계나 교육, 의료 혜택을 위해 전 재산을 기부했다는 기사의 주인공들은 기업가,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이 아니라 대부분 험한 일로 어렵게 자수성가한 보통사람들이다. 한평생 시장에서 장사를 해서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마련한 건물 한 채, 집 한 채를 대학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는 할머니들의 미담은 우리 주변에서 종종 들을 수 있다. 실제로 자수성가한 할머니들은 여성의 사회 참여가 시작된 근대 이후 우리 사회의 나눔 문화를 주도한 계층 중 하나였다. 평양의 사회사업가 백선행(1848~1933)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환갑이 넘어 ‘선행’이란 이름을 얻은 평양 ‘백 과부’

1848년(헌종 15)에 태어난 ‘백 과부’는 이름이 없었다. 외동딸인 그녀는 ‘아가’로 불리길 14년, ‘새댁’으로 불리길 2년, 나머지 70년 성상(星霜)을 ‘백 과부’로 불렸다. 아버지 백지용은 평양에 살던 가난한 농민이었다. 그나마 딸이 7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어릴 적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어렵게 성장한 백 씨는 14세에 가난한 농민에게 출가했다. 그러나 남편은 결혼 직후 병석에 누워 불과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16세에 과부가 된 백 씨는 친정으로 돌아와 청대(쪽으로 만든 검푸른 물감) 치기와 간장 장사, 베 짜기 등 닥치는 대로 일해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를 생활신조로 삼고 열심히 일하다보니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다. 20여 년을 하루같이 근면과 절약을 실천하다 보니 50여 석 추수의 땅문서가 생겼다. 그때부터 백 씨의 재산은 해가 다르게 불어났다. 생활비는 일해서 생긴 돈으로만 충당하고, 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는 땅을 불려 나갔다.

백 씨는 키가 크고 몸집이 벌어진 억센 여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억세다 해도 조선시대 여성이 남편도 없이 홀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고단한 일이었다. 백 씨가 재산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탐관오리부터 강도까지 온갖 사내가 그녀의 재산을 집어삼키려고 달려들었다. 강도의 침입으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백 씨는 목숨과 목숨보다 귀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대문·중문·방문·부엌문·들창·장지 등 집안 곳곳을 굵은 철창살로 에워쌌다. 백 씨는 그 철창살 속에서 돈 궤짝을 부둥켜안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백 씨가 그렇게 모은 돈은 현재가치로 약 300억 원, 이것을 사회에 환원하기 시작한 것은 1908년 백 씨가 환갑을 맞으면서부터였다. 백 씨는 환갑잔치를 하는 대신 3천 원의 사재를 털어 대동군 객산리의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낡은 나무다리를 헐고 돌다리를 지었다. 객산리 사람들은 백 씨의 음덕으로 준공된 다리를 ‘백 과부 다리’라 불렀다. 동네 유지들은 그처럼 착한 일을 한 사람을 ‘백 과부’라 부르기 민망하다 하여 ‘과부’ 대신 ‘선행(善行)’이라 부르고, 다리 이름도 ‘백선교’라 고쳐 불렀다. 윤리와 법도가 아직 굳건하던 헌종 시절 태어난 백 씨는 환갑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름을 얻은 것이었다.

백선행은 한평생 학교는커녕 서당 한 번 다녀보지 못했다. 못 배운 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백선행은 광성보통학교, 숭인상업학교, 숭현여학교, 창덕보통학교 등 평양 시내 사립학교에 수십만 원을 기부했다. 그렇듯 돈을 아낌없이 기부한 덕분에 글조차 읽지 못하는 백선행은 위대한 교육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1928년 백선행은 조만식 등 유지들의 건의에 따라 15만 원의 사재를 털어 평양에 공회당을 세웠다. 개관식 사회를 맡은 조만식은 백선행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새로 지은 공회당의 공식명칭을 ‘백선행기념관’이라 선포했다. ‘백선행기념관’은 지금도 평양에 남아 있다.

백선행은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의 은혜를 입고 그를 어머니, 할머니로 섬기는 사람은 수만, 수십만 명을 헤아렸다. 백선행은 1933년 5월 8일 새벽 여든여섯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최초의 여성 사회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평양 주민의 3분의 2인 10만 여 명이 참여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03. 백선행이 1만3천 원에 달하는 토지를 학교에 기부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동아일보 1225년 2월 28일 자) ⓒ동아일보 04. 통일신보(북한신문) 2006년 7월 1일자에 실린 백선행기념관과 백선행 동상(필자 제공)

‘농민의 어머니’가 된 신천 ‘왕 과부’

황해도 신천의 사회사업가 왕재덕(1858~1934)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의 장모이기도 했다. 안정근은 형의 순국 이후 만주로 망명해 중국, 러시아 일대를 전전하며 형의 유지를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임시정부 내무차장과 대한적십자회 회장을 지냈고, 청산리전투에도 참전했다.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지만, 안정근만은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장모 왕재덕의 경제적 지원 덕분이었다.

왕재덕은 1858년 천석꾼 왕시덕의 둘째딸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언니가 죽어 무남독녀로 자라났다. 왕재덕은 부잣집 외동딸로 자라면서도 여자에게는 글공부를 시키지 않는 인습 탓에 한문은커녕 한글조차 깨치지 못했다. 그 대신 어려서부터 부엌일과 농사일을 익혔다.

왕재덕은 18세에 이영식에게 출가해 큰아들 이승조와 큰딸 이정서를 낳았다. 셋째 아이를 잉태한 29세에 남편이 사망해 과부가 되었다. 이영식은 아내에게 3백 석 추수하는 2만 원 상당의 토지를 유산으로 남겼다. 홀몸이 된 왕재덕은 먹고살 걱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수 농사를 지었다. 한창 때는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지어 추수한 것만 좁쌀 90석, 벼 100석, 기타 잡곡까지 총 250석에 달했다.

왕재덕은 돈이 생기는 대로 땅을 샀다. 박토나 황무지를 사서 구릉진 곳을 깎고 돌과 바위를 뽑아 지면을 고른 후 물 대기 좋은 땅은 논으로, 그렇지 않은 땅은 밭으로 개량했다. 토지를 늘려가다 보니 환갑 즈음에는 신천온천 일대의 토지가 죄다 왕재덕의 소유가 되었다. 유산으로 받은 토지는 30년 만에 1만 석 추수의 50만 원 상당의 토지로 불어났다.

1928년 왕재덕은 40여 년 동안 피땀을 흘려가며 가꾼 서호리 일대 10만 평의 전답과 현금 1만 원을 농민학교 설립 자금으로 기부했다. 왕재덕의 일을 도우면서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던 손자 이계천이 간곡하게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1930년 정식으로 개교한 신천농민학교는 이계천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38년 조선 유일의 사립 5년제 농업학교로 성장했다. 농촌과 농민을 위해 아낌없이 기부한 덕분에 왕재덕은 ‘농민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광수는 왕재덕이야말로 인색한 부호들에게 경종을 울린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극찬했다.

왕재덕은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34년 6월 23일 추적추적 장맛비가 내리는 가운데 거행된 왕재덕의 사회장(社會葬)에는 2만 명의 조문객이 운집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만석꾼 재산을 부둥켜안고 죽었다면 가족 외엔 관심도 두지 않았을 과부의 죽음에 전 조선이 슬퍼했다.

05. 왕재덕의 장례 모습을 소개한 신문기사(동아일보 1934년 6월 27일 자). 당대의 의인이자 명사로 모든 사람들에게 추앙받았던 여인이었다. ⓒ동아일보 06. 영친왕 이은의 보모로 궁중생활을 한 뒤, 전 재산을 희사해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한 최송설당 ⓒ문화재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선각자들이 남긴 과제

진주제일보통학교에 여학생 전용 교실을 기증해 경남 지역 여성 교육의 선구자가 된 김 정부인(貞夫人, 1843~1912), 30만 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출연해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한 최송설당(1855~1939) 등 우리 근대사에서 나눔을 실천한 사람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우연인지 이들은 대부분 일찍 남편과 사별한 과부였고 자식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눔을 통해 ‘모두의 어머니’로 쓸쓸하지 않은 노년을 보냈다.

100여 년 전 시작된 이 여인들의 숭고한 나눔 정신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음은 우리 사회의 축복이면서 또한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들보다 사회로부터 더 많은 혜택을 보았을 ‘진짜 부자들’의 나눔도 최근 늘어나는 추세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서구 선진국의 부자들보다 우리 사회의 부자들이 나눔에 인색하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속은 정당하다. 하지만 부모의 부를 물려받은 자식들이 행복하게 살려면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사회가 지속되어야 한다. 자수성가한 여인들의 나눔에만 의지해서 과연 자본주의의 지속가능한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지 의문이 든다.

 

글 전봉관(KAIST 인문사회과학과 교수)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