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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형식을 둘러싼 불투명성/ 이선영

sosoart 2014. 10. 4. 20:06

이선영 

 

투명한 형식을 둘러싼 불투명성

이선영

투명한 형식을 둘러싼 불투명성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상적인 수와 비례를 갖춘 미술작품에 대한 전통은 고대 이래 유구하다. 신이나 인간이라는 기준이 모호해진 현대미술에도 보이지 않는 기준으로 작동하는 형식미가 있다. 분업화된 근대사회는 다른 분야나 다른 예술장르와의 차이점이 찾아가면서 미술작품 고유의 형식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가져왔다. 형식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은 미술작품의 미술외부에 있다고 가정되는 것들을 하나하나 삭제해 나가면서 순도를 높인다. 그러나 이러한 순도의 확보는 미술이 전하는 메시지를 약화시키기도 한다. 오히려 형식 자체가 메시지라고도 주장된다. 그러나 순도 확보를 위해 현실을 괄호 치려는 노력은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실패를 통해 형식의 잠재력을 드러낼 수 있는 점은 역설적이다. ‘--주의’로 불리는 모든 사조들처럼, 형식주의도 좋은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특히 어떤 형식이 형성되는 시기가 아니라, 구조로 고착화 물신화되는 단계에서 더욱 부정적이다. 


 

장용선, [Particle 431022 V], stainless steel, 63x63x22cm, 2010년.

; 유한 속에 무한을 담은 예술작품은 닫힘 속에 열림을 예시한다.


시간이라는 변수가 개입될 때 형식주의는 더욱 취약하다. 형식에서 형식이 파생되는 것은 아니다. 형식은 실재로부터 나오고, 이 형식을 통해 또 다른 실재가 생성될 수 있다는 역동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것은 동일자를 동일자로서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며, 구조를 구조로서가 아니라 생성과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예술은 동일한 것의 복제가 아니라, 반복 속에서도 차이가 가능한 어떤 변화를 필요로 한다. 20세기의 형식주의는 19세기의 낭만주의나 세기말의 유미주의 또한 극복하지 못했던 신화, 종교, 역사 같은 전통적인 서사 대신에 조형언어에 집중한다. 현대 언어학이 공표하듯이, 지시대상과 기호의 관계는 임의적이다 못해 단절되어 있다. 고삐 풀린 기호들은 자율성을 구가하며, 본격적인 현대예술의 출범을 알린다. 현대예술에서 실험이란 어느 때 보다도 멀찍이 떨어진 말과 사물 의 거리 감 속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실험이 실험으로만 끝날 때, 그 혁명적 힘은 약화되고 만다. 실험은 언어의 변화를 낳지만, 이러한 언어의 변화가 현실의 변화 또한 야기하지 못할 때 무의미한 유희에 머문다. 이러한 무기력함은 예술자체를 외적인 힘에 휘둘리게 한다. 예술은 장식과 잉여에 머물며 제도로 보장된 주변부에 떠돌다가 극히 일부만이 희귀한 창조물인양 호출되곤 한다. 형식주의는 미술을 미술이게끔 하는 독특한 질이라기보다는, 근대사회의 보편적 방식이다. 어떤 역사적 국면에서 형식은 현실을 구성하기는커녕, 현실을 반영한다. 그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시장경제의 논리부터 자율적으로 가동되고 있는 관료제에 이르기까지, 계층구조가 있는 곳에 편재한다. 형식은 단지 이데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결합하여 현실이 된다. 형식을 갖추는 것은 합법적 자격을 갖추는 것이며, 그 유효성과 생산성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점차 내용과 분리된 형식은 형식자체만을 지시하고 재생산하는 자기 지시적 국면에 이를 수 있다. 형식의 자족성은 불모성이 된다. 


무엇을 위한 형식인가에 대한 대답이 궁극적으로 ‘형식을 위한 형식’을 벗어나지 못할 때, 이러한 구조적 한계가 극복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분명해진다. 어느 사회나 지배적 형식과 그에 대한 변화를 촉구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안팎을 촘촘히 둘러싼 정보망에 의해 점차 바깥이 사라져 가는 현대에 경화된 형식을 변모시키는 힘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형식에 대한 가장 엄격한 정의가 이루어졌던 수학 분야는 그 참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수학은 근대의 합리주의적 사고를 이끈 이래, 현대적 삶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는 정보혁명을 추동해왔기 때문이다. 레베카 골드스타인은 수학자 괴델의 전기 [불완전성]에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비롯한 17세기의 철학자들은 수학자들의 기준과 방법을 적절히 변형하고 일반화하면 과학과 윤리는 물론 신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품은 모든 문제들에 대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말한다. 그들의 사고는 과학의 고전주의를 구가하던 시대의 터무니없이 낙관주의로 보이지만, 그것은 현대의 지배적 사고인 실증주의(positivism)부터 모든 것을 코드로 환원하여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기술만능주의까지 면면히 흐르는 가정이다. 



 

 위세복, [나르시소스의 연못], 스테인레스 스틸, 53x45x52cm, 2011년.

; 이 작품은 ‘기하학적 금속 구조체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프랙탈적 자기복제’(위세복)가 있는 정교한 구조체를 보여준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사실들을 모두 무의미한 것으로 배제한다면 가능하다.  실증적 사고에 의해 과학의 승인을 받은 것만이 인식가능성, 즉 의미의 한계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술은 심지어는 과학도 무의미하다고 배제된 것들에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발견해왔다. 진정한 예술은 형식주의가 배제하고자 했던 모순과 역설의 무대인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틀 지우고, 자기 논리의 선명성을 위해 삶을 배제까지 하는 형식이란 무엇인가. [불완전성]에 의하면 형식체계(formal system)에서 기호들의 의의는 오직 각 기호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규칙에 의하여 정의될 뿐이다. 형식체계는 규칙들로 구축될 뿐 형식체계는 그 어떤 것에 관한 것도 아니다. 이 규칙들은 그 계의 기호를 규정하고 이 기호들을 어떻게 결합하여 일정한 문법적 구조를 만들 것인지에 대해 규정한다. 여기에서 배제되는 것은 현실 뿐 아니라, 직관도 있다. 레베카 골드슈타인은 직관을 추방할 수 있고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초수학적 견해를 형식주의(formalism)라고 말한다. 


이러한 형식주의에 따르면 규정된 규칙이 모든 진리를 엮어낸다. 그 정당성을 따져보기 위해 외부의 다른 어떤 진리와도 비교할 필요가 없다. 형식주의의 옹호자인 힐베르트(1862-1943)는 ‘수학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무의미한 기호를 나열하는 게임이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순수미술을 위한 정의가 되어버린 모리스 드니(1870-1943)의 언명, 즉 ‘회화작품은 나부라든가 전쟁터의 말이라든가 기타 여러 일화적인 것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어느 일정한 질서 하에 모여진 색채로 덮인 평탄한 면이다’와 유사한 논리를 발견할 수 있음은 흥미롭다. 기호의 조합과 추론규칙(변환규칙)에 따라 결론을 유도하는 형식주의적 사유는 기존의 형이상학을 비롯하여 애매한 신비주의를 일소하고, 언어적 투명성을 부각시켰다는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형식체계 자체가 자폐적인 것이 되면서, 그것은 또 다른 신비와 불투명성에 빠진다. 형식은 의미도 모른 채 외워야 하는 수학 공식 같은 것이 된다. 


직관이 배제된 투명한 형식체계는 상상력이나 독창성이 필요 없는 기계적인 과정으로 전환될 수 있다. 골드스타인에 따르면 형식주의가 도래한 이후, 수학적 선험성과 확실성의 본질은 무의미한 형식체계를 운행하는 일정한 기계적 규칙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그 과정은 얼마가지 않아 발명될 전자식 기계에서도 복제될 수 있었다. 형식주의에 따라 수학적 진리에 대한 알고리듬을 갖게 될 것이며, 컴퓨터의 계산과정은 바로 형식체계를 본 뜬 것이다. 이것들은 의미에 의지하지 않고 결론을 이끌어낸다. 현대사회는 특히 자본의 이해관계라는 알고리즘에 지배된다. 그러나 인간은 알고리듬에 따라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의 직관은 형식화될 수 없는 것이다. 무모순성과 완전성은 논리학의 형식체계에서 얻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투명하고 순수한 형식체계가 배격하는 실재계가 있기 때문에, 형식적 규칙만으로는 모든 것이 증명되거나 표현될 수 없다. [불확정성]에 의하면 괴델은 수학이 어떤 공리들을 채용하든 증명될 수 없는 진리가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괴델의 정리는 인간 정신의 계산적 모델, 곧 모든 사고를 규칙전개로 보는 모델에 내포된 한계를 보여준다. 그 정리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극도의 상대주의적 인식론이나 불가지론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일정한 틀로 환원하는 방식을 배격한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의 언어게임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게임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유일한 체계로 자처하는 것들은 이러한 다양한 언어게임을 혼란으로 간주한다. 예술은 궁극적으로 예술을 소외시킬 하나의 언어게임에 저항하며, 형식 한계를 예시하는 역설과 모순에 주목한다. 인식의 한 방식을 영원한 것으로 고정시키려는 태도는 그자체가 이데올로기이다. 기호는 중성적인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무대’(바흐친)이다. 미학사는 형식주의와 리얼리즘 간의 경쟁으로 가득하다. 논리는 물론 역사 역시 독백이 아니라, 대화로 이루어진다.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여러 목소리가 공존하며 경쟁한다. 이렇게 공존하고 경쟁하는 여러 목소리들은 하나의 규칙만이 지배적인 체계에 생기를 부여한다. 그 활기의 정점에 축제와 혁명이 있다. 


M, 바흐친, V.N, 볼로쉬노프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에서 언어활동은 언어형태들의 추상적 체계가 아니라, 발화 속에서 수행된 언어적 상호작용의 사회적 사건이라고 말한다. 규범적으로 동일한 형태들의 안정된 체계로서의 언어는 단지 과학적인 추상일 뿐이다. 언어는 화자들의 사회, 언어적 상호작용 속에서 실현되는 지속적인 생성이다. 형식주의와 체계는 이미 만들어진, 즉 포착된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사고방식이다. 체계의 관점으로 보면 역사는 늘 우연적인 일탈의 계열일 뿐이다. 그래서 형식주의는 공시성과 통시성, 논리와 역사를 구별하려하면서 지금 여기의 지배적 규칙만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역사와 논리가 구별되는 순간, 양자는 모두 부조리한 것이 된다. 그것은 주어진 구성요소들의 이러저러한 조합적 변화를 나름대로 묘사할 수 있을 뿐, 변화의 진정한 동인을 설명하지 못한다. 경합하는 형식들은 형식 자체의 논리가 아니라, 역사에 의해 선택되거나 배제된다.  


미술과 비미술을 분리하는 형식주의적 사고방식은 미술을 초사회적, 초역사적, 더 나아가 초개인적인 현상으로 본다. 미술의 논리를 내재적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외재적인 원인의 결과로만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부조리하다. 형식은 그것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제도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놓여있다. M, 바흐친은 시와 일상 언어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형식주의자의 기본전제를 거부한다. 바흐친은 문학을 연구했지만, 그의 결론은 미술로 전치시킬 수 있다. 시/ 일상 언어의 차이는 예술과 사물 간의 관계로 해석할 수 있다. 양자의 차이는 본질적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미술사를 살펴보면 사물이 예술의 정점에 놓이는 시기도 있었다. 형식적 장치들이 결합하고 변형하는 원리는 형식적 체계 내부에 있지 않다. 형식이라는 경계는 늘 위반을 준비하며 형식에 이질적인 힘에 의해 침범(오염, 범람)되고 변형된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

 

출처: 김달진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