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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미술, 가장 도래된 것들에서 길어 올린 새로움/ 이선영

sosoart 2014. 11. 20. 23:34

 

추상미술, 가장 오래된 것들에서 길어 올린 새로움

  

이선영(미술평론가)

  

1. 미술사, 근현대미술사, 서양미술사에서 추상


특집 제목처럼 서양미술사를 ‘삼킬 것인가 뱉을 것인가’를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일단 삼켜야 한다고 대답하고 싶다. 창작자와 이론가는 서양미술사를 유일한 전범으로 삼아 신주단지처럼 모실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동서양의 미술인들 모두에게 풍부한 자산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독창성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여 이미 많은 실험과 숙고가 되어있는 사안들을 무시하고 시행착오를 홀로 반복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서양미술사는 잘 차려진 만찬과도 같다. 여기에서 어떤 가능성을 찾아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킬 것인가는 각자의 자질과 능력에 달려있다. 서양 미술사하면 보통 동굴벽화부터 시작되어 현대에 이르는, 일련의 역사적 연속성을 생각하지만, 미술사나 미술이라는 개념 자체는 근대의 산물이다. 그리고 고만고만한 역사적 단계에서 생산력의 진보라는 점에서, 근대라는 결정적 시기를 선점함으로서 주도권을 쥔 세력이 서양임을 생각할 때, 미술사라는 표현은 곧장 서양 근현대미술사와 등치된다. 그것은 서양과 멀리 떨어져 있는 그 누구에게도 먼 담론이 아니다. 근현대에 와서 세계사는 보다 동시대적으로 공유되었기 때문이다. 


미술사는 훌륭한 미술작품에 대한 예들로 풍부하며, 그 이미지들만으로도 포만감을 준다. 역사와 무관한 미학이나 예술론은 공허하다. 유명 철학자의 언명을 응용하며 표현하자면, 미술사 없는 이론은 공허하고, 이론 없는 미술사는 맹목이다. 미술사가 미술작품과 그것을 둘러싼 실증적 자료 이외에 이론에 걸치는 이유는 수많은 미술작품이라는 자료의 선택과 배치에는 단순히 연대순으로 나열하는 것을 넘어선 방법론이 관철되기 때문이다. 제각각의 입자들로 떠돌던 작품들이 어떤 의미를 향해 맥락화 될 때, 보는 기쁨만큼이나 아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 담론이 미술이고 역사인 한, 그자체로 객관적인 진리일 수는 없으며, 현재의 관점에서 매번 재배치될 수밖에 없다. 현재의 관심사에 따라 역사의 주변에 묻혀있던 작가나 작품이 재 발굴되는 예는 많다. 서양미술사에서 많은 사조들이 정의되어 있고, 그 역사적 미학적 인과관계가 줄줄이 연결되어 경중을 가리기는 힘들지만, 가장 중요한 사조를 하나만 꼽으라면 추상미술을 들고 싶다. 


예술에 대해 대중적인 취향을 가진 나로서는 추상미술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뭔가 붓을 놀려본 사람만이 아는 비밀이 있는 듯하고, 때로 자의적이고 과도한 형이상학적 의미부여를 위한 알리바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달갑지 않은 태도나 담론들이 추상미술 주변에 많이 들러붙어 있다. 추상미술은 감수성 그 자체, 또는 지식 그자체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그것이 감수성과 지식의 문제로 간주되는 한, 열린 대화로부터는 차단되어 있다. 말로 환원될 수 없음과 지나치게 말로 가득 차 있음이라는 두 극 사이에 끼어있는 추상미술은 아직도 곤혹스럽게 다가오는 사조이다. 의미와 연결되는 수 있는 최소한의 참조대상이 사라진다면 무엇을 근거로 의미를 논해야 하는가. 의미를 재현된 대상과 연결 지으려는 기존의 태도 자체를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추상미술은 다른 분야와 다른 미술 고유의 언어는 무엇인가를 처음 자의식적으로 탐구했으며, 이 물음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바로 그 점이 현재의 우리가 추상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질만한 이유이다.


 2. 물질, 자연, 정신, 언어  


우리에겐 이미 확립되어 있는 추상미술의 어법보다는, 조형 언어로의 집중이라는 추상미술의 여정을 추동했던 다양한 원동력들이 더욱 흥미롭다. 현재의 언어구조로 정리, 환원되기 이전에 발생기에 경쟁적으로 경합하던 것들을 몇 개 꼽아보자면, 새로운 과학에 의해 다시 정의된 물질개념, 자연의 외관이 아닌 과정에 대한 관심, 정신 특히 인류의 가장 근원적인 정신 자산인 종교라고 볼 수 있다. 과학을 빼 놓고는, 오래된 것들에 바탕을 두었기에 추상미술의 영향력은 지속적일 수 있었고, 역사의 고비마다 갱신되면서 현대미술의 근간을 이룰 수 있었다. 먼저 지적할 것은 20세기 과학 분야에서의 혁명을 반영한 부분인데, 이 부분은 예술가들이 당시의 과학을 문자 그대로 잘 이해한 결과라기보다는, 동시대의 강력한 패러다임이 된 과학적 경향을 시대정신 정도로 받아들였다고 생각된다. 추상미술을 처음 시작한 이 중의 한명인 칸딘스키는 자신의 책 [점 선 면]에서 ‘핵의 붕괴는 완전히 물질주의자적인 세계상의 붕괴와 같은 것이다’고 하였다. 물질은 이제 보이는 것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칸딘스키, [구성 2를 위한 스케치], 1910년.(구겐하임 미술관)

 

과학적 영향은 물리학 보다는 언어적 차원에서 더 결정적이었다. 미술을 이루는 기본 언어에 대한 관심은 다른 것 없이도 미술 스스로 설수 있는 자율성에 대해 생각하게 했고, 그것은 대상보다는 방법에 중심을 두는 합리적인 태도의 발현이었다. 대상에 괄호를 치고 방법에 두는 방식은 미술자체를 또 하나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자연이나 정신의 환영이 아니라 ‘실재하는 하나의 공간 속에 실재하는 재료들’(타틀린)을 주장한 혁명기 예술부터, 전후 추상 미술가들이 추구한 ‘미술 작품에 단단함과 물질적인 깊이를 다시 반영하자’(스텔라)는 경향을 말한다. 형이상학과 미학적 환영을 거부한 일군의 작가들은 결국 회화를 초월하여 ‘재료들, 색채들, 정해진 공간들, 현실’(저드)에 도달했고, 그것은 실재의 세계와 똑같은 리얼리티를 갖는 미술작품으로 간주했다. 숭고나 계시를 외치면서, 정신적 초월성을 주장하는 추상미술에 맞서서, 미술을 ‘못으로 고정된 것처럼 단단하고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는 양상’(스텔라)을 탐험하려는 강력한 ‘물질주의적 태도’(스텔라)는 미술을 환영(illusion)에서 벗어나게 했지만, 3차원의 다른 사물들과 경쟁하는 또 다른 사물로 해소됨으로서 회화의 논리학을 짧게 완결지었다. 


순수의 정점으로서 추상미술의 논리(개념)는 자못 투명하였지만, 예술작품으로 건조하며 평면이나 사물 외에 더 나아갈 논리도 없어 보이는 한계를 낳았다. 추상미술의 또 다른 충동인 비합리주의는 좀 더 다산적이다. 대상에 의존하지 않는 회화의 가능성은 낭만주의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낭만주의를 잇는 19세기말 상징주의에서 음악과 같이 작용하는 자유로운 예술을 상상했다. 마침내 시인 아폴리네르는 ‘전적으로 화가 자신이 창조한 요소로 이루어진 새로운 구조물을 표현하는 미술, 그것이 곧 순수미술’이라고 정의하였다. 낭만주의는 분업화된 현대에 거슬러 총체성 상상력을 중시한다. 초기 추상화가 중의 한명인 칸딘스키는 정신성을 중시하여, ‘이 세계에는 모든 개개의 현상이 지닌 공통 근원이 있다. 세계는 정신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본질의 우주’라고 주장하였다. 칸딘스키는 당시 물질주의적 경향을 띄고 있던 구성주의와 생산주의에 대립해서, 자신의 추상미술이 인간의 의식을 고양하고 고차원의 깨달음을 위한 문을 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연과의 연결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다. 칸딘스키는 ‘추상적인 미술이 자연과의 연결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와는 반대로 이 연결은 어느 때보다도 더 크고 더 강하다’고 말하면서, 가장 좋은 이름은 ‘실재적(real) 미술’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 미술은 ‘외부세계와 나란히 하나의 미술의 세계, 정신적인 성격의 세계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로지 미술에 의해서만 성립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요, 실재하는 세계’이다. 최초의 추상화가가 말하는 실재에는 자연, 정신, 미술 등이 혼재되어 있었다. 칸딘스키는 [점 선 면]에서 예술과 자연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추상예술은 자연형태 없이 이루어 질 수 있지만, 자연의 법칙아래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추상과 사실성의 대립은 변증법적으로 종합된다. ‘추상화가들은 자극들을 미지의 자연이나 자의적 일부 자연에서가 아니라, 자연전체로부터 얻으며, 이러한 표현들은 작가 내부에서 종합된다’(칸딘스키) 이러한 연결 때문에 추상미술은 재현주의와 근본적으로 단절될 수 없었다. 


 3. 종교적 충동; 종말, 또는 이데아의 세계


칸딘스키는 ‘회화는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이라고 보면서, ‘내적 필연성의 원리에 기초를 둔 위대한 구도(spiritual)의 시대’가 올 것을 예측하였다. 칸딘스키의 전기를 쓴 페터 안젤름 리들에 의하면, 칸딘스키는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기초한 하나의 필연성의 관념을 도입하고, ‘오랜 물질주의적 시기들 이후에 비로소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는’ ‘영혼에 이르는 다리’를 놓고자 하였다. 그는 참된 미술(즉 추상을 말함)의 특성은 ‘넓고 깊게 작용할 수 있는 일깨우는 힘, 예언적 힘’이라고 말한다. 칸딘스키는 정신적인 혁신에 대한 열광적인 옹호, 어떤 내적 필연성에 대한 혼란 될 수 없는 확고한 신뢰를 지녔다. 추상미술의 구도적 차원을 열렬히 변호한 칸딘스키는 ‘물질주의자, 무신론자, 전문가, 실증주의자, 그리고 미술과 관련해서는 자연주의자들’을 공격하였다. 전기의 저자는 칸딘스키가 어떤 시대의 거대한 몰락과 영웅적인 투쟁, 그리고 급진적인 혁신을 추구했다고 평가한다. 칸딘스키는 ‘새로운 정신의 왕국, 위대한 정신적인 것의 시대를 새로 건설하는 공사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하면서, ‘미술은 포괄적인 종합을 낳게 될 것’이고, ‘이러한 종합은 결국 미술의 경계를 멀리 넘어서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통일의 영역 안으로 뻗어갈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특히 추상미술의 발생기에 있었던 신지학을 비롯한 종교적 신비주의와의 관련성은 미술사에서 많이 지적되곤 한다. 리들에 의하면, 러시아의 그리스 정교도였던 칸딘스키는 색채와 선의 신비주의에 대한 신지학자들의 신념에 동조한다. 신지학자들에 의하면 색채와 형태는 음악처럼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진동을 끌어내는 힘을 지닌다. 신지학의 가르침에 의하면 신체는 복합적이고 또 가시적, 불가시적 여러 층들을 포괄하는 구조를 소유한다. 따라서 신체에서 발생하는 영혼의 진동들은 전달 가능하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신지학]에서 활발한 정신을 나타내는 아우라의 형태는 모두 내부에서 빛을 발한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의 감각이 일순간의 불꽃, 미묘한 색채, 목소리의 억양을 생생하게 느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색과 빛을 지각할 때 영적인 소리가 동시에 들려온다. 여러 색이 결합되면서 동시에 화음과 선율이 들려오는 것이다. 


울림에는 늘 빛남이 대응하기 때문에, 음향이 지배하는 곳에 영적 눈의 지각활동은 계속된다. 이 맥락에서 칸딘스키는 그림도 음악과 같이 에너지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고정된 대상의 껍질을 제거하면, 사물의 내적인 음향을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칸딘스키는 물론, 몬드리안, 말레비치 등 초기 추상화가들은 신지학적 사상에 동감하고 있었으며, 미술은 자연의 외관을 초월하여 형태와 색채를 통한 감각의 소통으로 생각하였다. 추상미술은 이러한 공감각을 통하여 여러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종교적 성향의 좀 더 어두운 측면은 묵시록적 세계관으로 표현되었다. 미술사가 김영나는 [서양현대미술의 기원;1880-1914년]에서 현 세계의 종말이 가까워 오고 있고, 앞으로 새로운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은 1900년 전후부터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 퍼져 있었고, 이러한 회의적 현세관에 큰 영향을 준 종교가 바로 신지학(神智學)이었다고 지적한다. 


세기말이 가까워지면서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서양문명의 쇠진과 재생의 필연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정신력 추진력은 파국적 현실에 대한 구원의 파토스였다. 가령 칸딘스키는 현시대를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대결하는 위기의 시대로 보고, 미술은 실재의 외형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새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칸딘스키의 [구성II](1910)를 보면 대홍수와 묵시록이 복합된 파괴 및 구제라는 종교적 테마가 나타나 있다. 그는 [구성V](1911)에서도 화면을 가로지르는 검은 색을 통해 절망적 상황을 상징하였다. 칸딘스키는 검은 색에 대하여, ‘새로운 시작이나 가능성이 배제되고 모든 것이 죽은 상태와 같다’고 언급한 바 있다. [서양현대미술의 기원;1880-1914년]에 의하면, 칸딘스키는 대재앙의 시대 이후에 새로운 정신적인 시기가 도래할 것으로 보았는데, 이러한 생각은 1914년까지 그의 작품에서 주요한 주제로 나타난다. 파괴를 통한 창조의 메시지는 초기 추상에 면면히 흐르고 있으며, 그것은 현대미술의 기조가 되었다. 전면적인 파괴의 이미지는 당시의 사회를 위협했던 세계대전으로부터 온 것임에 틀림없다. 


 

몬드리안, [lozenge composition with red, black, blue and yellow], 1925년.

 

추상미술은 현세에 대한 종말론적 사고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러나 추상은 격렬한 종말론적 파토스로만 물든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구조를 보편적으로 반영하려는 경향으로도 나타났다. 그 대표자인 몬드리안은 색채와 형태의 추상, 다시 말해 직선과 명확히 한정된 삼원색 안에서 그 표현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몬드리안은 이러한 기본요소들을 통해 ‘우주적 관계를 정확하게 재구성’하고, 그럼으로서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였다. 안나 모진스키의 [20세기 추상미술의 역사]에 의하면, 몬드리안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처럼 예술이 고차원의 리얼리티, 혹은 자연을 초월하는 진리를 반영하기 원했으며, 그 완벽함을 통해 예술이 사람들로 하여금, 위대한 깨달음이나 지식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리라고 믿었다. 몬드리안은 신지학자 블라바츠키가 하늘의 수직성(활력성, 남성의 원칙)과 그와 동등한 땅의 수평적인 지평선(평온성, 여성의 원칙)을 언급하면서 직각의 이론을 설명했을 때, 이에 크게 공명한다.


이 두 개의 선이 상호교차 하여 만들어 내는 십자가는 생명과 불멸에 대한 유일하고 신비적인 개념을 나타냈던 것이다. 몬드리안은 이러한 역동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구조가 정신적이면서도 물질적인 세계에 대한 모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몬드리안의 수직, 수평선의 교차 형식은 평형을 유지함으로서 궁극적 보편자의 형식을 그려낸다. 그것은 이상적 세계, 알랭 봉팡이 [추상미술]에 쓴 바에 의하면, ‘시간이 멈추고 모든 소음이 중단되며  삶과 죽음, 그리고 시간도 없는 세상인 유토피아’이다. 이를 통해 ‘예술의 궁극적 목적인 보편적 언어의 실현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반 되스부르크)이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떠오르게 하는 이 이상적인 세계의 궁극적 존재는 보편자(the Universal)이다. 우주의 본질적 실체인 보편자는 신학에서 말하는 신에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신이라면 재현가능한가에 대한 성상파괴에 관련된 오랜 논쟁, 즉 부정의 신학이 깔려 있을 것이다.


4. 추상적 숭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추상미술은 자연과 종교는 물론, 혁명과 전쟁으로 점철된 당대의 역사적 상황까지 모두를 포괄하는 풍부한 언어가 될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세계의 표상가능성에 대한 물음과 연결되었다. 칸딘스키와 함께 초기 추상화가의 한명인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에 명백한, 금지의 표상문제는 포스트모던 사상가 리오타르가 다시 읽은 칸트의 숭고의 미학에 닿아있다. 리오타르의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에 의하면, 숭고와 관련된 대상은 확실히 하나의 기호 즉 초감성적 영역의 징표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현을 무력하게 하고, 현상을 불신하기에 이른다. 숭고는 대상의 형식이 현존하지 않을 때 느껴지는 사고, 즉 대상을 초월하는 어떤 것의 현존을 대상에서 느끼는 것이다. 리오타르에 의하면 칸트의 미학을 이어받은 아방가르드는 제시 그 자체 안에서 제시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것은 또한 좋은 형식의 위안을 거부하고, 취미의 합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말레비치, [black suprematistic square], 1914-15년.

 

재현할 수 없는 것과의 마주침은 근본적인 개방성으로 이어진다. 한정된 세계를 확장하는 데에, 혹은 한정된 세계가 시작되기 이전의 텅 빈 시간을 확장하는 데에 그 너머로 텅 빈 공간이 전제되는 것이다. 항상 형식에 의존하는 예술적 제시에 의해 절대적인 것을 증명하는 것, 이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를 보여주는 것이 숭고이다. 그것은 ‘몰형식’(칸트)으로 나타난다.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미학은 재현불가능의 문제를 다룬다. 이러한 숭고미는 낭만주의 이래, 추상미술에서도 발견된다. 전후의 추상화가 버넷 뉴만이 대표적이다. 그는 ‘아름다운 것보다는 신비스러운 숭고함을 표현할 수 있는 미술’을 성취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뉴만은 ‘인간의 비극적인 조건 앞에서 느끼는 공포와 분노, 완전한 의식에서의 깨어남, 그리고 허공 앞에서 스스로 자각하는 무력감’을 위해 작업했다. 뉴만에게 회화란 ‘숭고한 사건의 찬양, 알려지지 않은 것을 상기하는 것’(로젠버그)이었다. 


뉴만에 의하면 예술가는 ‘신처럼 혼돈상태, 공(空)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색채, 형태, 질감, 그리고 세부묘사도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뉴만은 형상을 가진 추상의 기하학적, 또는 회화적 완전형태의 연구대신, ‘형태가 비형태가 될 수 있는’ 경지를 탐색하였다. 그는 원초적 형상을 찾아내기 위하여 자신의 회화 언어를 2가지 기본요소로 감축하였다. 뉴만 작품 속의 수직성은 숭고를 향한 인간의 열망을 상기시킨다. 노버트 린튼은 [20세기의 미술]에서 뉴만의 수직선이 수동적이고 거의 무한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긍정적인 현상들, 예를 들면 번개가 치고 사원의 베일이 벗겨지고, 신이 물을 갈라놓는 행위 같은 것을 암시한다고 지적한다. 그의 작품은 화면의 크기로 인해 장대한 정경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미술사가들은 뉴만이 신학으로부터 의미를 끌어냈다고 밝힌다. 


창세기에는 창조의 초기에 대해 ‘땅은 형태가 없고 공허하였으며 어둠이 그 깊은 물위에 뒤덮여 있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하자, 빛이 생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전한다. 알랭 봉팡은 뉴만의 작품에서 화면을 분할하는 띠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공허는 창조의 첫 부분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것은 빛의 외양과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궁극적인 분리와 둘로 나뉨을 가시화 한 것으로, 혼돈에서 형태가 발전하는 것은 전쟁의 상처에 뒤따른 새로운 세계와 미술의 상징적 탄생을 암시한다. 이 단선은 성스러운 빛이나, 질서, 절대적인 것에 대면한 존재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모진스키에 의하면 미국의 화가들은 미술은 미의 문제와 관계를 가진다는 유럽의 미학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절대적인 감정에 대한 관심과 숭고함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다. 이들에게 추상은 미지의 존재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두려운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체였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자들은 물질주의적 사회체제의 속박에 대한 열정적인 항거를 공유하면서 심오한 개인적 표현을 고수하였다. 자고로 현대 미술가는 ‘내적인 세계의 에너지와 운동감, 그리고 다른 내적인 힘’(폴록)을 표현해야 한다고 믿었다. 추상표현주의의 모험은 ‘이름 모를 배 위에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밤 속으로 여행하는 것, 즉 현실적인 요소들과의 절대적인 투쟁’(마더웰)이 되었다. 마크 로스코에게 형태는 버넷 뉴만처럼 지극히 단순하면서 시원적인 모습과 최후의 심판을 나타내는 것 같은 신비로운 신성함을 암시하였다. 모진스키는 비극적 상황이 로드코를 순수추상으로 이끈 도덕적 동기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로드코는 2차 대전 후 ‘인간형상은 팔다리를 움직이는 어떤 동작으로도 도덕성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 미술에서 표현되는 인간형상은 오히려 인간의 의사소통의 불능을 야기한다고 보았다. 


로드코는 자신의 작품이 ‘하나의 계시로, 혹은 영원히 항상 있어온 욕구에 대한 예기치 못한 참신한 해결’로 간주되길 바랬다. 이러한 작품 앞에 선 관객은 강력한 색채를 지닌 회화 평면 안으로 몰입함으로서, 즉각적인 주위환경을 초월하여 영원의 의미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로드코는 ‘화가의 작업은 명확성을 향해, 즉 화가 개념사이, 개념과 관람자 사이의 모든 장애물의 제거를 위해 발전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 장애물로서 ‘기억, 역사, 기하학’을 인용하였다. 왜냐하면 ‘기억과 역사, 그것들은 우리가 절대 개인의 이념이 아닌, 이념들의 모방을 얻어내는 보편의 늪’일 뿐이기 때문이다. 좀 더 근본적인 보편성을 위해 가시적인 것을 배제한 추상미술은 그 보편적 언어 아래에 들끓고 있는 원초적 실재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하였다. 추상의 발생기에는 그 실재가 물질, 자연, 정신, 종교, 언어 등등의 면모를 띄면서 다양한 계열로의 진화와 도약을 준비했던 비옥한 혼돈기였다. 초기 추상미술에 내재된 이같은 수많은 가닥들은 미술사, 또는 작품이라는 텍스트를 새로이 짤 때 풍부한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출전; 컨템포러리 아트 저널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