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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사는 예술가/ 이선영

sosoart 2014. 12. 20. 19:34

마을에 사는 예술가

  

이선영(미술평론가)

  

세미나 주제에 부응하기 위해 붙인 제목이지만, 마을도 그렇고, 예술가도 그렇고, 지금으로서는 참 고풍스럽게 들리는 단어다. 그러나 양자는 공동체와 예술의 관계를 생각하는 이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문제이다. 예술은 죽었다고 오래전부터 외쳐졌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명맥을 이어왔듯이, 전통사회와 더불어 사라져 버렸다고 간주된 공동체 또한 그렇지 않을까. 근대사회 이전, 즉 전통사회에서는 진정한 공동체가 있었고, 이후에는 그것이 사라졌다는 비극적 뉘앙스를 가진 서사는 정확한 것인가. 생물학적으로 좀 더 완벽한 형태로 태어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서로 협동을 하지 않으면 자연계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존재였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자 ‘척도’가 된 것은 사회적 협동의 결과이다. 그리고 자연계조차 경쟁 보다 공생이 더 지배적이다. 공동체란 지금은 사라진 과거의 훌륭한 가치가 아니라, 현재에도 삶의 기본에 깔려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의 차원에 있으며 억압되어 있다. 공동체의 이익과 상충하는 가치가 지배적이 되어, 공동체라는 잠재성을 현실화하는 행위는 끊임없이 방해받고 있으며, 이 금기사항의 위반자, 또는 선동가는 사회적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지금도 공동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기 위해 모여 있는 이들을 벌레 떼 취급을 하는 위정자들이 많다. 그러한 위정자들에게 사회는 관리하는 자와 관리 받는 자로 나뉠 뿐, 양자의 경계에 혼동이 생기거나 도전받아서는 안 된다. 공동체란 억압받는 가치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이웃과 보다 직접적인 관계망을 가졌지만, 지금은 간접적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박경리 선생의 장편소설 [토지]를 보면, 이전시대에 공동체의 가치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 자는 마을사람들에게 쫒겨 났지만, 지금은 사법권에 의해 격리된다. 이전사회에서 공동체로부터의 축출은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가혹한 처벌이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은 공동의 지표가 된 돈이 없으면 처벌받는다. 띄엄띄엄 떨어져 살던 이전시대에 비해, 오히려 지금은 더욱 가깝다. 가깝다 못해 밀착되어 있다. 현대의 대표적인 주거형식인 빽빽한 아파트 숲이나 출퇴근 시간대의 대중교통 수단을 보면 인간 간의 물리적 거리는 더욱 근접해 있음을 실감한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심리적 거리는 무한대로 멀다. 여기에서 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 서로 부대끼는 공통 공간 속에서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도 우리는 열심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그 ‘자기만의’ 사각 공간에서 모두 비슷한 정보를 소비한다. 우리는 서로 너무나 똑같기에 그렇게도 개성을 강조하는지도 모른다. ‘개인’이라는 영어 단어가 ‘나뉠 수 없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지만, 그와 반대로 산산이 쪼개져 있는 것이 현대인이다. 특히 노동의 세계에서 이러한 쪼개짐을 극단적이어서, 소비활동이라는 나름의 종합적, 심미적 차원의 보상이 없이는 그러한 파편화된 삶을 견디기 힘들다. 


소비활동이 야기하는 ‘자유로운’ 선택은 노동의 비좁은 입지와 큰 차이가 있다. 현대사회는 고만고만한 소비활동을 통해서 생산 활동에 내재된  거대한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무마시키곤 한다. 자본주의는 그런 식으로 억압받는 노동자를 회유하고 노동자 문화를 소비적 유흥문화로 성공적으로 대체시켰다. 그래봤자 모순은 제 3세계에 전가되고, 또 다른 재앙의 피드백이 있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예술가란 이 쪼개짐을 거부하고 자기 주도적으로 생산 활동에 임하려는 특이한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전으로 예술가는 정치적 이상주의와 깊이 연루되기도 한다. 그들은 정치가만큼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대부분 몽상적이고 이상적이지만 그렇기에 서로 잘 어울린다. 정치와 예술의 행복한 만남의 시기를 역사는 종종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양자의 갈등관계를 더 많이 기록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경계는 강고하다. 그러한 경계 중 가장 강력한 것은 노동/자본 사이의 경계이다. 지금도 자본은 전 세계를 경계 없이 넘나들고 있지만, 노동은 결코 그럴 수 없다. 


삶과 예술 사이의 경계 또한 그에 못지않으며, 양자는 최종 심급에서 연동되어 있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경계에 맞춰 진화한 인류가 바로 투명 인간이다.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적 삶에서는 서로에게 투명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이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는 서로의 경계는 철저해야 한다는 금기가 유지된다. 그러나 타인을 투명 인간 취급하는 것은 자신 역시 투명 인간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투명 인간화된 대중들은 대기업이나 공권력이 아무런 저항감 없이 통과할 수 있는 이상적인 매질이다. 물론 대중문화에 비관적인 지식인의 우려와 달리, 대중은 일방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말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지배적 경향 속에서, 이 잠재적 차원을 수면 위로 부상시키려는 움직임이 공동체에 기반 한 문화적 활동이다. 문화가 좀 더 밀도를 가진 형식을 취할 때 예술이 된다. 예술은 강도는 있지만 그 강도를 그대로 유지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다시 문화의 차원으로 내려가 일상 속에 잔잔하게 있다가 때가 되면 다시 활짝 피어난다. 문화적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문화 그자체가 아니라 예술적인 것이다. 특별한 것인 예술 또한 문화라는 일상적 차원을 필요로 한다. 둘은 상보적이다. 문화와 예술의 연결망의 부재, 즉 지금처럼 문화만, 또는 예술만 있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부분 문화는 소비문화이며, 대부분 예술은 제도 속에 존재하면서 창조보다는 재생산에 복무하는 맥 빠진 현상 형태에 머문다. 그것들은 매우 순응적이어서, 대부분 장식이나 오락에 머문다. 예술관련 제도나 직업이 있다고 해서 예술이란 것이 확실한가. 예술가 지망생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보호해주던 기나긴 학교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외따로 던져졌을 때, 결코 예술은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만도 힘들기 때문에, 작업하는 삶은 두 세배의 저항을 이겨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그래서 내 코가 석자인데 무슨 공동체인가 하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인지 몰라도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극도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유아론적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그런 부류가 빨리 ‘성공’하기도 한다. 그런 부류는 사회의 지배적 규칙을 잘 준수해서도 성공하지만, 개인의 세계에 목매달고 있는 그의 비전자체가 이 병든 사회의 비전과 잘 조응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업은 대부분 자기 얼굴에 거울을 비추듯 오직 동일자에만 몰두한다. 거기에는 오로지 자신만을 지시할 뿐인 무한 반복이 있다. 예술적 순수함과 진정성의 바로미터가 오직 자신이라는 듯 독백하는 이 나르시시즘적 태도에 동일자를 진정으로 구성하고 있는 타자들은 안중에도 없다. 개인이 받는 고통의 원인은 어쩌면 뻔하다. 그 원인에 대한 전반적인 맥락에 애써 눈감고--그렇지 않으면 현재 자신의 존재기반이나 정체성에 도전이 되기 때문에--각자 비역사적 비사회적 시공간에서 허우적거리는 상황에 대한 서로의 확인이라고나 할까. 


그러한 사적 세계의 표현은 매우 솔직한 듯하지만, 온통 자기 검열과 자기 합리화로 가득하다. 공적으로 떠들어지는 말 못지않은 공허함과 거짓이 팽배하여, 공감이나 소통을 지속하기 힘들다. 또한 그것들은 결코 스스로 온전히 서있을 힘이 없다. 그래서 더욱 사회의 지배적 가치에 의존하고, 예술이 추구하는 근본적인 가치와 멀어진다. 예술의 존재자체에 대한 의문을 그들만큼 확실히 가지고 있는 이들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예술, 예술 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현실과 그 모순에는 눈감고, 고립의 고통을 견딜만하게 만들어서 소비하는 감상주의적 방식이다. 그러한 방식 역시 소통은 소통이지만, 그자체로 기만적이다. 그러나 그렇게 예술이라는 것을 알리바이로 하여, 사회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스스로를 돌아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예술은 그것이 설사 직업의 하나라 할지라도, 결코 자신의 이익에만 한정되는 활동이 아니다. 


끝내 그런 ‘현실적인’ 생각을 고집한다면, 예술 아닌 부문으로 이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곳에’ 남아서 주인 행세를 하면서 진정한 예술가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삶과 예술 간의 거리를  유지시킨다. 그러한 간극을 통해 이익을 얻는 부류가 있기 때문에 간극이 유지되는 것이지, 분열이 현대사회의 불가피한 운명은 아니다. 공동체에 기반 한 문화예술 활동은 현대사회에서 예술가의 존재와 지향간의 괴리감을 최소화하려는 이상적인 움직임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이상인 또 다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원하는 ‘잘 먹고 잘사는’ 문제에 예술 또한 포함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진정한 예술은 공동체에 기반하고 있으며, 공동체의 가치와 모순되지 않기 때문에 예술과 공동체 예술을 따로 구분할 필요조차 없다. 물론 예술과 공동체는 긴장관계 또한 있다. 예술적 자의식은 집단주의로 비춰질 수도 있는 공동체와 거리를 두게 하고, 공동체 지향의 정치적 태도는 극도의 사적인 세계에 거부감을 보인다. 


융합이든 괴리든 양자 간에는 관계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무의식의 차원으로서의 공동체를 보다 목적의식적으로 지상에 끌어올리려는 지향을 가진 작가들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협소한 예술계를 넘어서 삶이라는 보다 광대한, 동시에 막막한 곳에 뿌리를 내리려 한다. 어떤 보호 장치도 허위의식도 없이--그런 것은 애초에 없거나 쉽게 깨지기 때문에--‘그곳’에 있는 작가들, 이 세미나의 주제처럼 ‘마을에서 살아가는 예술가’가 있다. 예술가는 물질적 기반을 포함하여 고도의 역량이 축적되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고립된 시공간을 필요로 한다. ‘과정예술’이라는 사조도 있지만, 과정을 공유하기 힘든 것이 바로 예술이다. 지본주의 사회가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풍요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분업에 따른 생산력의 혁명 때문이었다. 잘게 쪼개지는 노동의 과정,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와도 교체될 수 있는 익명적 노동의 형식은 생산과정에 불확실한 요소를 제거하고 고도의 효율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생산적이다. 


그러나 나사못처럼 교체 되곤 하는 개인으로서는 그것들이 결코 생산적인 과정이 아니다. 이미 무한 스펙 대비, 노동시장에서의 극도의 짧은 유통 연한을 생각할 때, 생산과 효율이란 어떤 특정 세력의 그것임을 알 수 있다. 가내수공업이나 자영업같은 형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예술은 이런 점에서 시대를 앞서갔던 ‘아방가르드’였다고 할 수 있다. 분업화와 대규모화는 과정의 코드화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예술은 그러한 분절화와 거리가 있다. 예술은 분절화가 아니라 불연속과 도약에 바탕 한다. 가령 예술은 노동과 10시간의 똑같은 시간이 들지 모르지만, 예술은 몰입을 필요로 하고 그 몰입이 가시화되는 순간은 9시 59분 경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동은 시간당 생산량을 확인할 수 있고, 있어야 한다. 예술은 노동과 달리 정량화될 수 없다. 그래서 예술은 일반노동과 달리, 영감, 천재 등 온갖 비합리적인 수사학에 둘러싸여 있곤 한다. 이러한 태도가 직업병인가도 싶지만, 예술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 내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예술가란 남들 모르는 장소에서 남들 모르는 방식으로 뭔가 뚝딱 만들어서 짠하고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그 신비로운 과정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 설명되거나 해석되어서도 안 된다. 숭배 받지 않는 한 차라리 무시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예술가의 ‘비밀스런 과정’에 대한 보호본능은 매우 심해서, 작품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어딘가에서 부지불식간에 뚝 떨어진 것이어야 하지 어떤 원인과 목적을 가진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한 맹목적 태도가 예술의 소통을 가로막는다. 물론 예술은 어떤 원인과 목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 마치 노동과 예술이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훌륭한 작품/작가는 그러한 기본적인 과정을 합리적으로 인정하고 공유하고 나서도 어떤 나머지가 있다. 예술은 불투명하지만, 투명성 이후의 불투명함이지 투명성 이전의 불투명함이 아니다. 어쨌든 문화나 예술의 과정이나 산물의 공유에는 극복해야할 난관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공동체에 기반하는 작업을 하려는 작가가 마을에 함께 살면서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것에는 겉보기의 낭만주의--전체와 하나가 되는 개체라는 비전이라는 점에서--와는 다른 암초들이 산재한다. 


여기에서 예술 고유의 과정을 무시하는 것은 공동체를 무시하는 또 다른 태도와 다르지 않다. 예술과 공동체는 동일한 비중을 가진다. 예술과 공동체는 상보적이거나 한 면의 또 다른 면과 같은 관계를 가진다. 강도 높은 예술적 과정을 온몸으로 통과하려는 예술가와 공동체는 중첩되는 면이 많다. 따라서 예술가의 정주와 이주의 경중 관계를 따지는 것은 부차적이다. 다소간 선문답 같지만, 여기에 있어도 여기에 없는 이가 있고, 여기에 없어도 여기에 있는 이가 있다. 예술계에 있어도 예술과 무관한 이가 있고, 삶의 현장에 흩어져 있어도 예술적인 이가 있다. 그러나 존재와 의식을 좀 더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정주를 택하는 예술가가 있을 수 있다. 지금 이 세미나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작가들이 그들이다. 퍼포먼스 반지하를 포함해서, 내가 몇 년 동안 공동체 문화만들기라는 공공문화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몇몇 그룹은 프로젝트를 따라 각지를 떠도는 유목의 방식이 아니라, ‘마을에서 살면서’ 작업하기를 선택한 이들이다. 


현장과 가까이 있다는 것, 늘 변화하고 있는 현장의 맥락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정주 형 작업이 가질 수 있는 이점이다. 현대미술에서도 ‘장소 특정적’ 예술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한 예술의 성공여부는 그 장소에서의 깊은 교감이지, 어디선가 만들어온 것을 가져다 놓고 어거지로 ‘공유’, ‘소통’, ‘치유’--미술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상투화된 표현들--를 끌어다 붙이는 것이 아니다. 그 장소에서 생성된 교감이기에 관객에게도 교감이 가능한 특화된 예술이다. 파편화된 사회에서 공감이나 교감은 말처럼 쉽지 않다. 감동이라는 가치는 언제부터인가 현대예술에서 낯선 감정이 되었다. 감동은 오히려 대중문화에 더 많이 있는 듯하다. 왜 이렇게도 우리나라 연속극을 보면 눈물이 많이 나는지... 그러나 오독과 부조리에서 파생되는 재미도 있지만, 공감과 순리에서 탄생하는 의미는 더욱 강하고 지속적이다. 고립된 개인의 작업실이나 학교 같은 진공의 공간에서 만들어서 또 다른 진공의 공간인 화이트 큐브에서 소비되는 통상적 관례는 무한히 비슷한 것만을 만나게 한다. 


이러한 관례에 익숙해지다 보면, 공공문화 예술은 허허벌판에 있는 기괴한 것들로 비춰진다. 기껏해야 불우이웃을 위한 선행이나 예술가-지식인을 위한 계몽주의 프로젝트로 다가온다. 그래서 ‘진정한’ 예술에 외재적인 것이라 판단한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장벽에 둘러쳐진 예술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체험하는가. 대중문화는 지루하고 예술은 아니라는 말은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다. 예술도 지루하다. 그래서 미니멀리즘이나 팝아트처럼 지루함 자체를 주제로 한 사조도 생겨났다. 소외된 상황을 더 가속시킴으로서 충격을 주는 현대미술의 전형적 수법이다. 진공 속에서 고안된(조립된) 아이디어만 가지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미 해법이 있기도 한 시행착오의 반복일 뿐이다. 현장 파악의 무능력은 ‘그들과’ 같이 있어도 겉도는 작업을 양산한다. 그것은 공동체 예술이라는 가치를 내건, 자기만족에 불과한 사회적 낭비이다. 


공동체 기반의 예술 역시 재능과 감각은 필수인 것이다. 정주형 작업의 또 하나의 이점은 공동체에 기반한 예술의 상당부분이 노력이 주민과의 친화력을 구축하는 것에 있다고 할 때, 마을의 청년들이 동시에 예술가들이라면 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이다. 진정성이 없다면 친해지기 힘들다. 그것은 예술 작업만큼이나 힘들다. 그 밖에 정주하는 예술가는 자신들이 행한 것들을 시간이라는 변수를 두고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생겨나는 깨달음이나 영감도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예술이니 만큼, 정주하는 예술가는 때로 유목하는 예술가와도 협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정주든 유목이든 예술이라는 자의식적 작업을 하기 위해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예술을 위한 예술’에 나오는 그러한 ‘자율성’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삶의 자율성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다. 그 투쟁을 위한 가장 강밀한 형식으로서의 예술이다. 이 문제는 개인적 삶을 포함하여 많은 과정이 노출되어 있는 이들에게 문제시된다. 


과정을 공유하는 것도 좋지만, 과정으로 와해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개인 작업과 공동 작업 간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차이만이 유의미한 종합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정주한 작가들 역시 끊임없이 떠난다. 그것은 물리적이거나 심리적인 떠남이 아니라, 과연 자기가 서있는 맥락이 맞는 것인가에 대한 거리를 둔 반성의 차원이다. 떠나는 자만이 돌아올 수 있다. 떠남은 자신을 신비롭게 재포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새롭게 만나기 위함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소수만의 리그를 위해 다수를 타자화 시키는 협소한 예술계를 떠났다. 예술계를 떠난 자만이 예술계에서 다시 환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예술가일 것이다. 전체와 개체의 갈등이 날로 커지거나 개체 자체가 상실되어 가는 이 시점에서, 창조 뿐 아니라 소통의 문제까지 함께 안고 가는 이들을 사회는 보호해야 해야 한다. 같이 살아가야 하는 문제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보다 지금여기에서 절박하게 다가오는 현실적, 예술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출전; 인천문화재단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