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승 / 바깥에 피는 꽃
이선영
바깥에 피는 꽃
이선영(미술평론가)
클래이아크 미술관에 전시된 필승의 작품 [기대고 싶은 꽃나무]는 전형적인 나무의 형태를 갖추지 않았다. 가지나 잎이 안 보이는 빽빽한 꽃들은 사각형 실루엣에 가깝고, 스케치 작품에서는 더욱 과장되었지만, 나무의 기둥 부분도 빈약하다. 실제 나무 크기를 계획하였다가 축소되어 좌대의 크기를 높이면서 관객의 눈높이와 맞추려고 한 탓인지, 나무는 전반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하고 분재 같은 느낌이다. 그것은 자라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예술은 어차피 자연이 아닌 인공이지만, 최대한 자연에 가까워지려 한다. 그것은 자연적 대상이 등장하지 않는 추상미술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통상적인 기준에 의하면, 필승의 작품 속 나무는 왜곡된 모습이다. 나무는 인류의 상상력 속에서, 땅 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하는 잔가지들과 연결된 나무기둥이 천상과 지상, 그리고 지하라는 3계를 이음으로서 세계에 대한 축소모델이 되곤 하였다.
필승_기대고 싶은 꽃나무_혼합재료_90_70cm_2014_클레이아크 전시 사진
필승_기대고 싶은 꽃 나무_drawing_79x54cm_2014
필승의 작품은 왜곡된 형상이기는 하지만, 세계수, 또는 우주목이라는 축소모델에 대한 또 다른 축소모델이라 할만하다. 그것은 분리된 범주들을 잇는 나무의 형태와 기능에서 비롯된 상징을 좀 더 압축적인 형상으로 제시한다. 실제보다 확대되거나 축소되었을 때 오히려 그 실체의 전모가 잘 파악될 수 있다. 그것이 현실을 모방하는 예술이 단지 현실의 동어반복이 아닌 이유이다. 같은 제목의 드로잉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는 더 명확하다.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부분만 강력하다. 사각형 공책을 가득 채워나간 낙서처럼, 자연에서는 발견되기 힘든 사각형이라는 보이지 않는 선을 따라 꽃은 배치되어 있다. 그것은 꽃나무가 아니라, 한 공간(한 페이지)을 가득 채운 꽃에 대한 추상적 관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개나리가 떠오르는 노란색도 흔해 빠진 색이며, 몇 개의 타원형이 조합된 꽃잎처럼 꽃에 대한 전형적 이미지와 관련된 색이다.
나뭇가지가 보이지 않거나 부러질 정도로 많은 꽃들, 이 풍요로운 열매의 징후(그러나 열매 자체는 아닌) 아래에서 지친 듯이 쉬고 있는 한사람이 보인다. 만화의 말풍선처럼 사람 뒤에 펼쳐진 꽃구름은 오직 하나의 생각, 또는 정념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다. 머리 위에 떠있는 것이 그 사람의 말이나 생각이라고 간주하는 관습이 있다. 구름 모양의 그것은 둥실 떠오르며 또 금 새 모양새를 바꿀 것이다. 필승의 작품에서 말풍선에 해당하는 것은 인간의 몸통과 일체화된 나무기둥 위에 슬쩍 걸쳐있는 꽃구름이다. 사각형이라는 보이지 않는 틀은 그것이 말 또는 글에 상응 하는 것임을 예시한다. 꽃은 꽃이라는 것을 암시할 뿐인, 빠르고 간략하게 그려진 선으로 되어 있다.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담을 듯이 정성스레 그려진 그림에 비한다면 쉽게쉽게 날림으로 그린 형태이다. 필기구를 떼지 않고 한 번에 쓱 그을 수 있는 꽃그림과 마찬가지로, 입체 작품에서 고무 찰흙(스컬피)로 만든 꽃 역시 송편을 빚을 때처럼 한 손에 움켜쥘 수 있는 정도의 양으로 주물러 만든 것이다.
필승_변화를 추구하는 미적표현방법_Yellow flower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각각22x27cm_2014
yellow flower collection, 2014년
여기에서도 통일성과 정교함이란 없다. 단지 평균적인 단위들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개중 튀는 몇 개는 컬렉션 형식으로 따로 배치하기도 했다. 컬렉션에서 물신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같은 틀에서 나온 이질적인 것들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망친 것이나 불량품이다. 그러나 물신숭배는 차이를 중시하기에, 이러한 소소한 변이가 주목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러나 필승의 작품에서 변이는 일부로 추구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무 생각 없는 실행 중에서 나온 통계학적 샘플일 뿐이다. 그의 작품에서 색과 형태, 재료와 만든 방식 모두가 소박하다. 반복이라는 방식이 머릿속과 마음을 비우게 하듯이 그렇게 하염없이 만들어진 2차원, 또는 3차원 상의 꽃들은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않은 채 홀로 과도한 몫을 차지한다. 예술은 종교적 수행과도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일상의 기계적 반복을 또 다른 반복으로 대체하려 한다. 이상한 꽃나무의 꽉 채워있음은 역설적으로 텅 비워있음을 예시하는 듯하다. 작품 속 꽃나무 자체가 바람이 획 불면 다 날아가 버릴 듯 건성으로 붙어있다.
필승의 작품에서 많음은 촘촘함이나 꼼꼼함과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노동과 예술은 차이가 있다. 한 순간에 피었다가 한 순간에 져버리는 꽃처럼 한 시기에 한 인간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무엇에 대한 비유처럼 다가온다. 그것은 지극한 행복일수도 불행일수도 있는데, 어쨌든 온 주체를 점령하고 있으면서 그 밖의 것들을 사소한 것들로 만든다.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한 번에 지는 꽃잎들처럼 허망할 수도 있지만, 그 때만큼은 강렬하고 결실은 없어도 절실함에 대한 기억은 남는다. 그것은 반복적인 일상에서 드물게 찾아오는 심미적 체험이다. 심미적 체험은 일상의 노동이 기존질서의 재생산, 즉 재현에 머물러 있는 것과 달리, 어떤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 속에서 주체 또한 주체를 넘어서 또 다른 존재로 탈바꿈할 수 있다.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는 그러한 변모는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하다. 작가는 이러한 매혹과 위험을 삶 그자체가 아닌 작품을 통해 실험할 수 있지만, 예술이라는 존재방식 자체가 매혹과 위험에 기대고 있는 위태로운 것이다.
공간 안의 미적 표현방법 yellow flower drawing, 2014년
공간안의 미적 표현방법 yellow plower, 철재구조, 스컬피, 아크릴 채색, 2014년.
불안함에서 창조적 긴장에 이르는 이 상태를 어떻게 합리화나 승화 따위의 뻔 한 방식 말고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까, 그것이 작가에게는 늘 문제일 것이다. 어떤 심미적 체험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언제나 그 격차는 크다. 필승의 스케치와 3차원 작품 사이에 있는 간격보다도 더 큰 간극이 있을 수 있다. 차이를 줄이기 위한 방식은 개념과 작업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작업이라는 하나의 과정으로 수렴시켜서 개념 또한 작업 중에서 파생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파생된 개념만이 그 작가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 관념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필승의 작품은 과정을 중시한다. 벽에 같은 사이즈의 작은 캔버스 24개를 걸어놓고 관객으로 하여금 자유자재로 배치하게 설치한 작품 [변화를 추구하는 미적 표현방법_Yellow flower]은 가변적이다. 꽃이 그려진 캔버스는 매순간 이런저런 조합으로 재배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꽃나무에 있을 법한 계층적 질서를 허물고, 이것과 저것이 스스럼없이 접합한다. 그것은 식물의 또 다른 방식인 리좀을 예시한다. 관념이 도식화하곤 하는 체계적인 계통수가 아니라, 예기치 않은 만남을 중시하는 뿌리줄기의 방식 말이다.
식물에 있어서 꽃은 유혹의 장치다. 대칭을 이루는 아름다운 꽃은 보다 많고 달콤한 꿀을 찾아온 곤충의 도움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나 좀 봐 주세요’라고 아우성치는 꽃들처럼 꽃그림은 그렇게 관객과의 접촉을 요구한다.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만 가득하듯 꽃만 가득한 나무는 그렇게 관객을 향해 피어있다. 설치작품 [공간 안의 미적 표현 방법_Yellow flower]은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건축적 스케일을 가졌다. 보통 키를 가진 사람이 손을 뻗었을 때 천정에 닿지 않는 높이로, 일종의 작은 방이다. 이 작품 역시 처음에는 공간 전체를 무대로 한 큰 작품이었기에, 일종의 축소모델이다. 문처럼 뚫린 구멍으로 들어가서 무심코 거울이 있는 바닥을 보면 천정에 꽃들이 가득함을 발견하게 된다. 작업실에 있는 작품에는 내벽과 같은 하얀 꽃이 설치되어 있어 은폐된 느낌을 주지만, 아래에서 위로 향해야할 꽃이 역전된 형태에서 발견되는 놀라움은 여전하다. 공간 안이 거울이나 꽃으로 마감되어 있는 것과 달리, 밖은 그것이 구조화된 형태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공간안의 미적 표현방법 내부
공간안의 미적 표현방법 yellowfloer, 2014년
그곳은 안 만 있고 밖이 없는 공간이다. 보편적인 주거형식은 아파트나 빌딩처럼 바닥 또한 분명히 있다고 할 수 없다. 불 밝힌 그 공간은 명백하면서도 바깥도 바닥도 불확실하다. 그곳은 구체적인 자리(place)가 아니라, 추상적인 공간(space)이다. 그것은 축소모델이긴 하지만, 실제로 이런 스케일과 스타일의 공간이 우리 주변에 꽤 있다. 화장실, 공중전화 박스, 엘리베이터 등등, 그곳은 대체로 밀폐되어 있으며 홀로 있는 공간이다. 한명이 들어가면 꽉 찬 느낌으로, 만약 그 이상이 있다면 불편하거나 어색한 공간이다. 그곳은 영원히 머무르는 공간이 아니라 과도적 공간이지만, 현대에는 점차 이러한 과도적 공간이 영원한 공간처럼 되어버렸다.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수많은 칸막이 처진 방들을 생각해 보라. 그 안에서 우리는 이동 중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이동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듯 하지만, 여기나 저기나이다. 겉보기의 친근함이나 다채로움과 달리, 고독하고 단조롭다. 그래서 천정의 꽃들은 난데없는 선물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좁은 입지의 공간에서 천정은 유일한 여분의 자리이다.
작품 [공간 안의 미적 표현 방법]의 숨어있는 한 면을 뒤덮고 있는 꽃은 바깥이 없는 공간 속에서의 바깥을 예시한다. 마치 꽉 막힌 공간에 숨통을 터주는 창문처럼 바깥을 암시한다. 바깥 없는 세상은 소비의 사원인 백화점을 닮았다. 백화점은 내부에 진열된 상품에 집중하게 하기 위해 창문이 없으며, 소비자로 하여금 시간 낭비중이라는 것을 잊게 하려고 시계도 없다. 시간과 공간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지속시키기 위한 하나의 활동에 집중되도록 배치되어 있다. 순간적인 기분전환을 줄 뿐, 또 다른 욕망의 회로로 연결될 뿐인 소비를 위해 소비 공간보다 더 닫혀있는 곳에서의 노동을 감내해야 한다. 바깥이 없는 동질적 공간이 자연과 무의식마저 잠식하고 있는 현대에 예술은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된 꽃처럼 바깥을 암시할 수 있다. 필승의 꽃나무가 나를 비춰주는 타자처럼 그렇게 앞에 서 있듯이 말이다. 그것은 또한 내가 서있는 이곳이 도대체 어디인가를 물으면서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는 사람에게만 열려 있다. 그의 작품에서 도처에서 나타나는 꽃은 예술이라는 바깥으로의 트임을 암시하는 이상형이다.
출전; 클래이아크 미술관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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