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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형표- 문인화, 또 다른 문인화/ 박영택

sosoart 2015. 5. 1. 00:33

연재컬럼

 

홍형표 / 문인화, 또 다른 문인화

박영택

홍형표 / 문인화, 또 다른 문인화


근원 김용준은 '화가란 사물의 형용을 방불하게 하는 것만으로 장기를 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을 빌려 작가의 청고한 심경을 호소하는 한 방편으로 삼는 존재'라고 했다. 오래 전 얘기이지만 여전히 귀담아 들을 만하다. '미술'이란 개념은 역사적이라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어 왔고 더구나 현대미술에 와서는 미술의 의미와 규정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진 상황이지만 근원의 저 언급은 새삼스럽다. 회화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지속된다면 화가에 대한 그의 견해는 여전히 타당하고 가치 있다. 장르와 매체를 떠나 하나의 그림이란 결국 작가의 심중을 드러내고 그의 감정과 사유의 한 편린을 상징적으로 표현해내는 일이다. 그는 자신이 대면한 세계와 사물을 관통하고 그렇게 추출된 것을 이미지로 구현하는 이다. 그러니 모든 예술/그림이란 장르나 매체, 기법을 떠나 공통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미지에 대한, 예술에 대한 그러한 인식은 이미 동양의 전통회화와 서예에서는 본질적인 것이었다. 그러니 오늘날 동양화와 서예는 여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거듭날 수 있는 여지를 무한한 여백처럼 간직하고 있다. 다만 그 여백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게 문제다.



 

시간의 흔적, 혼합재료, 68×82cm, 2015


선봉 홍형표는 이른바 문인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오랫동안 사군자와 서예를 해왔고 이를 종합해 이른바 문인화라 칭할 만한 그림을 지속해왔다. 그가 화선지(장지)와 먹, 모필 그리고 안료(분채)를 통해 그리고 써낸 흔적은 자연을 빌어 자신의 속내를 자연스레 표출하고자 한 의도 아래 풀려난 것들이다. 그러니 그 그림은 상징적이고 또한 문학적이다. 사의적인 그림이란 얘기다. 서예와 회화를 한 화면에 융합하고 모필의 필력과 순수회화적인 요소를 뒤섞어내는 한편 먹과 채색, 선염효과와 물성의 강조를 함께 껴안고 있는 그림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사군자, 문인화 형식을 가능한 유지하면서도 기법이나 방법론을 달리해 순수 회화로서의 입지를 마련하면서 동시에 문인화의 성격 혹은 정신 등을 유지하는 방안이 그의 그림의 전략이다.


고인들은 문인화를 흔히 '심획', '심화'라 불렀다. 문인화는 외부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심상의 표출'에 방점을 둔다. 비록 외물이라고 할지라도 작가내면에서 그 대상이 완전히 녹여진 상태, 이른바 '물아일체'가 된 상태를 필묵으로 드러내는 행위 과정과 그 결과물 모두를 문인화라 부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필획을 통해 직관이나 원초적인 무의식세계와 같이 보이지 않는 세계, 언표 될 수 없는 세계를 조형언어 문자언어로 드러내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문인계급과 모필 체험, 그리고 동양의 전통적인 사유와 가치관은 망실되었기에 그들의 세계관, 우주관을 표상하는 문인화는 과연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는 곤혹스러운 문제다. 더구나 이전의 기법, 방법론을 고수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기에 어떻게 방법적 변화를 만들어나갈 것인가, 더불어 현대회화의 여러 경향들과의 관계는 또 어떻게 형성해나갈지 등 역시 만만치 않은 과제들이다.


홍형표의 화면 한쪽에는 개성적인 한글서예가 채우고 있다. 그 문자는 그림을 설명하고 보조한다. 그림과 글(문장)이 하나로 엮여 있다. 더불어 그가 그림 속으로 불러들인 도상들은 자연의 이미지이자 자신의 심경, 사유를 대변하는 매개들이다. 그는 그 매개를 빌어 모종의 문장을, 이야기를 전달한다. 생명체를 상징하는 꽃과 전통적인 사군자의 의미망을 달고 있는 매화, 몽골여행을 통해 접한 매혹적인 별(별자리), 자신의 분신처럼 부유하는 새 등이 모여 우주자연의 신비와 이치, 생명예찬 등을 기술하고 있는 그림이다. 물론 자연과 생명체를, 삶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자신의 심중을 표현하는 매개들이기도 하다. 그림의 주제는 여전히 문인화의 전통에 잇대어 있는 것이다.


매화나무와 새, 산과 별(꽃)등의 도상은 자연과 생명을 대변하는 상징물이고 그 옆에 따라붙는 문장은 자신의 삶에서 느낀 소박한 소회들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전통적인 재료체험과 문인화의 도상을 조금은 다르게 각색하고 배치, 변화시켜 '현대적'인, 아니 지금 이 시대의 감수성과 조응하는 그런 문인화를 만들려는 작가의 의도 아래 출현하고 있다. 사군자와 산수화의 자취가 어른거리고 여전히 지필묵을 강조하면서도 실은 화면 전체를 설채하고 화면의 질감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한편 화면을 분할해서 색다른 구성을 시도하는 등은 변화를 모색하는 부분이다. 전통을 고수하되 그것을 지금의 시대적 감각에 맞게 변형하거나 재배치하는 일은 전통회화 영역에서는 불가피한 일이다. 따라서 동양화와 사군자, 서예, 문인화 영역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여러 갈등 구조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이처럼 홍형표의 그림은 사군자와 서예가 결합되어 있고 그 사이에 상징적인 도상이 출현하고 있다. 전통적인 지필묵을 다루되 기법적인 측면에서 차이를 모색하는 그림이고 그 차이란 여백을 줄이고 전면적인 설채와 물감과 붓질의 질감효과, 전체적으로 회화의 분위기를 고조하는 차원에서 풀린다. 그러나 여전히 필력과 서체의 개입, 글과 그림의 결합 등을 통해 전통적인 문인화, 사군자의 형식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 절충과 융합의 과정을 지닌 그림에 대해 사군자, 문인화 혹은 동양화라는 명칭과 구분은 그다지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지금 그의 작업은 보편적인 회화로 나가고 있고 그런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물론 그가 사군자, 문인화의 정신과 요체를 여전히 그림의 핵심적인 요소로 삼으면서 다양한 방법론을 시도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결과적으로 남게 되는 화면, 회화가 얼마만큼 힘이 있으며 작품의 격과 운치, 조형적인 완성도가 또 얼마나 높은지가 훨씬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제는 서예와 그림, 문자와 그리기가 혼융되고 그림이 여전히 한 개인의 세계와 사물을 보는 안목과 가치에서 파생되는 것이란 인식을 통해 풍부하게 전개되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박영택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