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예술이 될 때
몽중애상-삼색도 전(6.5--7.12, 자하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1. 정치와 예술, 그리고 역사와 예술
자하미술관이 있는 부암동은 조선시대 문화예술계에서 큰 별이었던 안평대군의 자취가 남아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안평이 꿈에 본 무릉도원과 비슷해서 별장을 짓기도 했던 이 오래된 장소는 아직도 빼어난 풍광을 간직하고 있다. 인왕산 꼭대기에 자리한 자하미술관에서 그동안 전시했던 작가들은 여기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풍경과 자기 작품이 비교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목전에 펼쳐진 실제의 풍경은 작품이라는 허구를 희미한 그림자처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미술관이 자리한 역사적 공간성을 살리려는 이 전시는 실제 풍경의 아름다움을 여기에 전시된 작품의 의미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작품에 불리한(?) 상황을 유리한 상황으로 반전시킨다. 전시에 초대된 11명의 작가는 이 유서 깊은 자리에서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상상력을 펼쳐 이를 현대의 예술로 풀어냈다. 작가들은 전시에 앞서 안평의 자취를 찾는 문화탐방과 세미나 등을 함께 진행하면서 의미 깊은 역사적 소재와 자신들의 작업과의 접속을 시도했다.
세종의 18남 6녀(이중 여아 2명은 일찍 사망) 중의 한명으로 태어난 안평대군(1418-1453)은 15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문화예술 애호가이며 그 자신도 시서화에 능한 예술가였지만, 왕자들 간의 대권 경쟁구도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역사는 안평대군이 야심가였던 형 수양대군의 정치적 음모에 의해 강화도로 유배된 지 8일 만에 36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사건을 계유정란(癸酉靖難)으로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꿈을 바탕으로 안견으로 하여금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에서 알 수 있듯, 세속과 동떨어진 이상화된 자연을 꿈꾼 안평대군과 현실정치와의 괴리는 컸을 것이며, 이는 정치와 예술의 갈등이라는 고전적 대립구도를 이룬다. 피라미드의 정점에 올라야 완성되는 정치적 비전과 무념무상 및 무위의 삶 속에서 각자의 세계에 몰입하는 예술적 비전은 차이가 있다. 전자는 모두가 욕망하는 하나의 규칙이 있으며 승자독식의 경쟁구도가 강하다면, 후자는 각자의 규칙이 공존하는 자유로운 세계에 가깝다.
정치에 내재된 지배/피지배의 이원구조와 예술에 내재된 다원주의는 둘 간의 게임규칙이 다름을 알려준다. 물론 동일성의 원칙이 보다 강화되는 시대에 예술 역시 정치화 된다. 한편, 훌륭한 정치가 펼쳐지는 이상 사회에서는 각자의 이질성이 존중되는 예술적 삶이 가능할 것이다. 정치에 일반적인 대립구도 속에서 예술은 도구화된다. 대립구도를 해소하기 위한 운동 역시 마찬가지의 질곡을 짊어진다. 각자의 이질성을 외치는 무정부주의적 스타일의 예술이 비슷해지는 역설도 존재한다. 한국의 미술계에서 이러한 대립구도는 지난 80-90년대의 리얼리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스타일로 대별되기도 했다. 진영 논리 속에서 피폐해질 뿐인 정치, 그리고 무의미할 만큼 ‘자유로운’ 예술 사이에 놓인 괴리는 현재도 극복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일견 정치에 희생당한 예술처럼 보이는 안평대군의 일대기가 오늘날에도 어떤 울림과 여운을 준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예술애호가, 수집가, 후원자였던 안평은 일종의 문화 권력자였다고 할 수 있으며, 진정한 이상적 정치란 각자 다른 비전을 고무하며 이를 실현시키는 조건을 만드는 것에 있는 것인 만큼, 예술과 정치를 대립 구도로만 봐서도 안 될 것이다. 부정적인 의미의 ‘예술적 정치’, 즉 제 멋대로 국가와 국민을 주무르려는 통치자를 역사는 독재자로 기록한다. 국가나 국민을 조형의 대상으로 삼는 지배 엘리트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엉터리 예술가이다. 긍정적인 의미의 ‘정치적 예술’은 예술과 가장 닮은 다원주의적 삶을 이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 구현하기 위해 투쟁한다. 삶 일부가 아닌, 삶 전체를 예술화하기 위한 집단적 지향은 효율적 전략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은 상상을 넘어서는 실제의 역학적 문제이다. 예술의 역사는 예술적 아방가르드와 정치적 아방가르드가 중첩되는 극히 짧은 기간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장기적인 협력관계가 아니라 단기에 머무는 것은, 예술과 정치가 서로를 욕망하지만, 동시에 서로 견딜 수 없는 부분도 있음을 알려준다.
정치와 예술이 착종되었던 어떤 역사적 사례로부터 출발하는 이 전시는 역사적 사건과 예술적 서사, 또는 묘사, 또는 해석 간의 문제를 제기한다. 전시 준비 중인 지난겨울, 작가들과 함께 필자도 참여한 안평의 흔적들을 찾는 여정은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사료 외에 작가들이 얼마만큼의 상상력이 필요한지를 알려주는 과정이었다. 사료들이 유실되거나 왜곡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장 역시 피폐하긴 마찬가지다. 우리 근대사가 보존보다는 밀어내기에 집중해온 탓이다. 바다 건너에 있는 플라톤적 원형을 여기에 재현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발전주의적 욕망은 여기의 기억을 억압하곤 한다. 기억은 장기적으로는 발전에도 도움을 주지만, 단기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간주된다. 우리에게 역사가 있다면 청산의 역사들이 있었을 뿐이다. 역사를 지켜보았던 그날의 산하는 그대로 일지 모르지만, 지금은 썰렁한 알림판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역사의 현장’이란 곳을 애써 찾아가서 받은 쓸쓸하고 씁쓸한 인상은 역사를 소재로 한 이야기나 이미지가 그럴듯할수록 더욱 크게 다가오곤 한다. 작품들에는 이러한 부정적 조건까지 포함되어 있다. 정확한 역사의 재현은 작가의 몫이 아니다.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참고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먼저 언급한 정치와 예술의 관계처럼, 역사와 예술의 관계도 자명한 것은 아니다. 역사는 객관적인 것이고 예술은 주관적인 것인가. 역사도 서사의 문제인한 예술과 관계되고, 어떤 예술작품은 현실 속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서 그 자체가 객관적 역사가 되기도 했다. 현실에는 허구의 몫이 있고 허구는 현실화된다는 점에서, 양자는 상호작용적이며 수시로 자리를 바꾼다. 특히 안평대군의 예처럼 그 흔적들이 가해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파괴 된 경우, 역사가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단서로부터 추리하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도 하나의 이야기인 것이다. 안평의 경우,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역사적 이야기는 연속되는 부분보다 불연속적인 부분이 더욱 많다. 우선 남아있는 사료나 자료가 불연속적이며, 역사가들의 관점이나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 또한 각기 다르다. 19세기 역사주의의 예처럼, 역사의 궁극적이고 필연적인 목적이 있는 양, 우연적으로 남아있는 자료들로 관념적이며 계몽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역사를 쓰는 수많은 방식 중의 하나일 뿐이다. 역사적 객관성이란 객관성의 화신으로 알려진 과학조차도 하나의 목표로 삼고 나아가는 점근선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포스트모더니즘처럼 실재자체를 부정하는 인식론상의 무정부주의에 빠지는 것은, 무차별적 혼돈이나 동일성의 덩어리에서 차이를 견인 해내야 할 예술이 취할만한 전략은 아니다. 전시의 주제가 있으니만큼, 작품들은 최소한의 참조대상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확산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작품들은 크게 전통과 현대, 상상과 서사라는 네 가지 문제에 걸쳐 있었지만 작가마다 해법은 다양했다.
2. 전통과의 관계-황석봉, 문봉선, 신태수
새로움과 진보가 ‘인류 보편의 가치’로 격상된 것은 인류 역사에 비해 비교적 짧은 시기를 차지할 뿐이다. 그러나 현대에도 역사적 전형보다는 신화적 원형을 중시하는 흐름이 있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속의 시간 대신에 최초의 시간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은 근대의 가짜 새로움이 아닌 진짜 새로움, 즉 근원으로의 회귀를 통한 새로운 탄생을 도모한다. 여기에서 의미는 신화적인 모델과 가까운 경우에 발생한다. 화가들이 선대화가들을 모사하는 것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모범적 모델에 따르는 신화적인 순간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영원회귀의 시간; 원형과 반복]에서, 원형의 반복은 원형적인 행위가 계시되었던 신화적인 순간을 재현함으로서 세계를 그 최초의 동일한 여명의 순간 속에 끊임없이 머물게 해준다고 본다. 전통사회는 해마다 무구한 잠재성과 더불어 새롭고도 순수한 삶을 시작하는 자유를 허용하였다.
주기적인 우주창조를 모방하고 그에 참여함으로서 인간은 얼마동안 우주적인 차원의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 역사와 진보가 중시되면서 원형들의 반복과 낙원에 대한 이상이 결정적으로 포기되었다. 신화적 관점에서 역사적인 삶, 즉 시간 속으로 떨어지는 것은 전락이다. 엘리아데는 아무리 중요한 사건일지라도, 그자체로서의 역사적인 사건은 민중의 기억 속에 오래가지 못한다고 본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은 그 사건이 신화적인 모델과 아주 근사한 경우에만 시적 상상력에 불을 지펴주는 것이다. 고대적인 심성은 개별적인 것 보다는 범례적인 것만을 간직하려 한다. 원형적인 낙원들을 닮은 최초의 신성한 시간으로 회귀하려는 지향은 세속적이기 보다는 이상적인 작품을 낳는다. 이 전시에 작품을 출품하지는 않았지만, 전시 오프닝 날 즉석에서 서예작품을 제작한 황석봉은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던 안평을 환기시켰다. 안평은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의 송설체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행위와 결합된 그림 같은 글자, 그리고 낙관으로 마무리 지은 전시 개막 퍼포먼스는 시서화 일체의 전통과 성큼 다가온 융복합 시대와의 어울림을 예시한다.
문봉선은 유리 진열장 안에 두루마리 두 개를 상하로 배열했다. 위에는 한문, 아래는 매화꽃과 집들이 있는 풍경이다. 글자는 가로 10미터, 그림은 가로 7미터 정도의 길이여서 두루마리를 펼쳐가며 봐야 전체를 볼 수 있다. 종이에 수묵담채로 그린 [무계동천]은 여백에서 시작하여 여백으로 끝나며, 두 뼘 남짓한 높이의 화면을 사이를 안평이 부암동에서 꿈꾼 무릉도원을 연상시키는 풍경들로 이어간다. 글자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그림은 좌우로 흐른다. 역사로 전해지는 안평의 [소상팔경도]나 [비해당 사십팔영]--안평이 지은 정자인 비해당에서 48가지 진기한 풍경이 발견되었고, 안평은 이를 소재로 하여 당대의 문인들과 함께 시를 읊었다고 한다--은 이념과 현실 속의 산수(山水)가 교차된다. 글자를 포함하여 상하좌우로 막힘없이 흐르는 작품에서 문봉선은 고전적 기술을 연마한 화가임과 동시에,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제주 출신으로 실경에 대한 감각을 동시에 구현한다.
작가는 ‘내가 평소에 즐겨 사용하는 흑백의 강한 대비, 3원색, 검은 먹빛, 수평 구도 등은 무의식적으로 고향에서 체득한 것들’이라고 하면서, ‘아름다운 고향에서 자란 덕분에 남들이 고민하는 소재나 색감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문봉선의 작품이 좌우로 긴 두루마리라면, 그 옆에 걸린 신태수의 작품은 위아래로 긴 족자이다. 한지에 붉은 먹과 먹으로 그려진 작품 [역류, 안평]은 동양화에서 보통 여백으로 처리되는 부분도 잔잔한 비늘 같은 요소로 가득 채웠다. 뒤뜰에 소나무 숲이 있는 ‘ㄷ 자’ 형 집 앞에 펼쳐진 공간을 채우는 것은 수평을 관통하는 수직적 흐름이다. 붉은 색의 수평적 흐름을 가로지르는 노란색 수직의 흐름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번 전시의 컨셉을 구현하는 듯하다. 화면 중 상단부의 공간은 하늘 일수도 바다일 수도 있지만, 붉은 색조로 가득한 공간은 급작스럽게 닥친 안평의 비극적 말로를 생각하게 한다.
신태수,역류,안평_140x70cm_한지에 붉은 먹과 먹_2015
3. 문자와 풍경-박방영, 김종구, 정광호
안평은 조선시대 4대 명필로 꼽히는 서예가로, 현재에도 남아있는 그의 글씨로는 청천부원군심온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용인), 영릉신도비(英陵神道碑)(여주), 임영대군구묘표(과천) 등이 있다. 그 시대의 문자는 기호라기보다는 그림과 글자의 중간 정도에 해당되며, 그 형태만으로도 심미적인 대상이 된다. 그러한 문자들은 현대에 지배적인 코드와 달리, 읽혀지면서도 보여진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한자가 지배적인 문자가 아니라서 보편적으로 읽혀지기에는 힘든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투명성은 언어를 비롯한 모든 미디어의 운명이다. 언어의 투명성이나 중성성은 일시적인 속성에 불과하다.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처음 배우는 이는 언어가 결코 투명한 것이 아님을 절감한다. 낯선 언어들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의미가 아니라, 그자체의 형태로, 또는 소리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지시적 속성은 현대예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자기지시성은 고도의 개념적 논리임과 동시에, 말과 사물 간의 괴리에서 야기되는 모호한 경험이다.
박방영은 강직하고 힘 있는 예서체로 안평대군의 시를 썼다. 장지위에 먹과 구리, 펄 등을 혼합한 재료로 쓴 작품 [안평대군의 시]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의 발문의 내용을 발췌하여 다시 쓴 것이다. ‘이 세상 어느 곳이 꿈꾸는 도원인가’(世 間 何 處 夢 挑 源)로 시작되는 발문은 7언 율시로 되어있다. 여러 색조로 전이하는 글자 위와 안, 그리고 사이에는 정자 같은 형태도 작게 그려 넣었다. 그것들은 안평이 부암동에 지은 정자 무계정사를 떠올린다. 보통은 그림이 크고 그 옆에 작게 글씨가 들어가는데, 그의 작품은 그 관계가 역전되었다. 글자의 한 획은 산등성이나 언덕이 되어 건축의 토대가 된다. 글자의 원천은 한국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인 [몽유도원도]에 안평이 덧붙인 시다. 안평이 꿈에서 본 풍경을 안견에게 말하여 사흘 만에 그려진 그림, 여기에 덧붙인 시는 작가와 작가, 작품과 작품이 대화이다. 이러한 대화에 현대 화가의 대화가 끼어들며 작품은 다성적인 목소리들로 활기차진다. 이러한 대화들을 통해 ‘여러 천년 전해지길 바라노라’(自 多 千 載 擬 相 傳)로 끝나는 안평의 시는 현재화될 것이다.
광목에 쇳가루를 뿌려 글자를 쓴 김종구의 [쇳가루 산수화]는 그 내용을 이루고 있는 슬픈 이야기 뿐 아니라, 분해되고 녹슬고 줄줄 흘러내리는 형식 자체가 비극적인 느낌을 준다. 그는 동양화가처럼 바닥에 놓고 글을 쓴다, 그리고 중력이나 바람, 습기 등에 일정기간 노출함으로서 자연을 최대한 포용한다. 몸과 무의식도 그가 포용하는 자연이다. 작가는 안평에게서 무위적 태도를 발견했다. 실외에 방치했던 탓에 작품에는 낙엽 자국 같은 의외의 것들도 발견된다. 문자가 가지는 의미와 형태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가독성은 떨어지고, 어떤 강렬한 느낌만을 남기는 형상으로 변화한다. 글자를 이루는 쇳가루는 작가가 직접 깍아 만든 것인데, 회색 쇳가루가 마찰열에 의해 타서 검정이 된다. 숯에서 검정의 먹이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 메커니즘이다. 김종구는 자연이 아니라 자연의 힘을 모사하며, 동양화가 아니라 동양화의 원리를 구조적으로 모사한다.
정광호는 금속선을 용접하여 풍경과 글자를 쓴다. 하얀 벽에 약간 떨어져서 설치한 금속망은 빛나는 반사면 뿐 아니라 벽에 떨어지는 그림자도 작품에 포함시킨다. 풍경과 글자를 이루는 선, 그리고 이 선으로 만든 3차원 상의 구조물은 공중에 그려지고 쓰여진 것 같은 효과를 준다. 동양화에서 선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선이 움직이는 바탕인데, 작가는 이 여백을 관념의 공간이 아니라, 관객이 움직이는 현실공간과 일치시켰다. 풍경과 글자로 이루어진 사각 틀은 공간으로 무한히 확장되는 듯하다. 시서화를 조각화 하는 단계에서 구조와 구축의 힘은 크다. 공중에 그림자를 떨구고 서있는 선적 요소는 짱짱한 느낌을 준다. 풍경 속의 산과 물, 그리고 글자는 뼈처럼 그 외의 요소들을 지탱한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쓰여진 글자와 그림이 수없는 반복에 의한 결과인 것처럼, 정광호의 작품은 자유로움 안에는 필연이라는 구조가 내재해 있음을 알려준다.
4. 현실과 상상-서용선, 강경구, 유근택
역사가 야기하는 시간의 차이는 현실에서 상상의 몫을 확대시킨다. 여기에는 과학적 관찰이라는 리얼리즘의 모델이 들어 서기 힘들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역사라는 내용을 가지고는 있지만 현실과 닮은 단순한 질서 속에서 서술하지 않는다. 상상이 큰 역할을 해야 하는 역사적 소재 뿐 아니라, 당면한 현실 또한 자명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현대 물리학은 ‘관찰 이 관찰되는 사물의 본래적 형태를 왜곡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하이젠베르크)고 말한다. 해석은 그만큼 중요하다. ‘엄밀하게 말해서 사실이란 다만 해석일 따름’이라고 말한 니이체에게 ‘객관성이란 최고의 형식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어떤 사건에 대한 참된 묘사를 자신하기 보다는 상상적 재구성을 강조한다.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대안적 세계의 문맥 속에서 진술된 것은 역사적 진실이기 보다는 시적 진실이다. 작품 속 과거는 단순과거가 아니라 미지의 과거이다. 작가들이 구사하는 각자의 언어는 미지의 역사적 리얼리티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역사는 근본적으로 비서술적이며, 비재현적이기 때문에 텍스트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는 텍스트의 형식이 아니고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서용선의 작품 [인왕산, 안평]은 뒤에 인왕산을 배경으로 별장이 있고, 그 앞에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에서 상념에 잠겨있는 듯한 안평이 표현되어 있다. 안평의 별장인 비해당은 책과 국내외의 명화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정원 역시 인공토산과 연못, 그리고 동식물로 가득했다고 전해진다. 비해당 정원에서 찾아볼 수 있는 48개의 장면은 [비해당 48영]으로도 정리되어 있다. 주옥같은 장면 중 몇 개만 추려 봐도 ‘매화 핀 창가에 비친 달’(梅窓素月), ‘섬돌을 뒤덮은 작약’(飜階芍藥), ‘안개 쌓인 푸른 전나무’(籠煙翠檜), ‘서리를 비웃는 국화’(凌霜菊), ‘가을을 뻐기는 붉은 홍시’(矜秋紅枾), ‘사향노루 잠드는 동산 풀밭’(麝眠園草), ‘인왕사의 저녁 종소리’(仁王暮鐘) 등이 있다. 보이는 것은 물론 바람이나 소리까지도 시를 낳는 풍경에 속해있다. 서용선의 또 다른 작품 [안평]에는 안평이 실내에서 뭔가 읽는 모습니다. 비해당 안팎에서 시와 풍경을 음미하는 안평은 그가 조성한 어떤 존재들보다도 크다. 서용선의 작품에서 안평은 조선 문화예술계의 거목으로 나타난다.
강경구는 [어떤 풍경 1], [어떤 풍경 2]에서 달, 나무, 인간이라는 3가지 요소로 단순하게 화면을 구성했다. 두 그림이 캔버스 크기가 같고 비슷한 구성이라고 해서 꼭 짝을 이루는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둘이 연속 장면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작품 속 명확한 생김새와 표정을 알 수 없는 사람은 전시와 관련해서 안평으로 추정되지만, 특별히 안평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는 녹색바탕, 다른 하나는 청색바탕으로 칠해진 풍경은 시대나 계절도 특정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단색으로 칠해진 바탕에 떠있는 달은 새벽녘 또는 늦은 밤임을 알려준다. 그 시간에 화면의 주인공을 잠 못 이루게 하는 근심거리는 무엇이었을까. 청색바탕 그림에 보이는 울타리는 안평을 옥죄였던 보이지 않는 창살을 표현한다. 인물 머리 뒤로 뻗어있는 나무는 마치 인물의 머리에서 자라난 상념의 가지들처럼 보인다. 생각이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낳으며 계통수처럼 뻗어나간다.
유근택,어떤 장소,100X104cm,한지에수묵채색,2015
유근택이 한지에 수묵채색으로 그린 두 작품은 역사의 현장에 찾아갔을 때의 간극을 생각나게 한다. 작품 [어떤 장소]에서, 미지의 장소를 목전에 둔 설레는 여행자들에게 보름달처럼 둥실 떠오르는 장면은 몽유풍경처럼 이상적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어둡고 칙칙하다. 지는 해는 나무 그림자들을 대지에 길게 드리웠고, 이 그림자들은 마치 철창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종이를 분해해서 붓으로 눌러 그린 화면은 촉각적이다. 화면과 땅, 그리고 반사된 광학적 요소는 현실계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융합된다. 이 풍경은 이 전시를 위해 답사했던 강화도 형옥터 풍경이다. 안평이 사사되었다고 추정되는 그곳은 조선시대 문화의 중요한 인물의 유적지가 아니라, 허허벌판이었다. 이러한 방치는 몇백년 전에 있었던 문화예술에 대한 야만적 폭거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유근택의 두 작품은 기대와 현실 사이에 있는 낙차를 보여줌과 동시에, 현재에도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예술가의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5. 탈중심과 해체-권기수, 김영헌, 홍순명
가상공간에서 뱃놀이를 하거나 뛰어놀고 있는 캐릭터를 표현한 권기수와 김영헌, 그리고 어떤 이미지가 여러 장면으로 분해되어 있는 홍순명의 작품은 어떤 작품보다도 안평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픽처럼 기호화된 화면, 흐릿한 사진 같은 단편들은 캔버스에 아크릴이나 유화같은 고전적인 매체에 그려진 것 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은 각종 전자매체가 지배하는 현대적 일상에 더욱 가깝다. 이들에게 역사란 희미한 참조대상에 불과하다. 그들이 도달한 자리에 오기까지의 사다리는 치워져 있고 출발은 흔적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현대적 체험을 반영하지만, 과거만큼이나 현재도 불확실하다. 만화, 게임, 사진 등이 그렇듯이, 이러한 매체 속의 현실은 가변적이다. 관념적 중심보다는 중심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놀이가 중시된다. 본질과 실체는 ‘부재와의 차이적 관계’(훗설)나 과정으로 와해, 또는 해체된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역사적 실증주의 보다는 고유한 동일성을 해체하는 차이적 관계들이 전면에 놓인다.
권기수는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린 그림 [무(無)]와 [동구리, 별에 서다]와 [매화초옥-설중방옥] 등, 이전에 제작된 영상 작품을 보여 주었다. 동양화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해온 권기수는 동구리라는 그의 분신 같은 캐릭터로도 유명하다. 동구리는 그림에서도 화면 한가운데에 자리한 주인공이다. 경쾌한 전자음을 배경으로 하는 영상처럼, 그림 역시 선과 각을 맞춰 깔끔한 스타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동양화와 아주 멀다 할 수는 없다. 현실보다는 그 반영 상에 더 공을 들인 경향, 이곳과 저곳이라는 구별되는 두 세계를 잇는 무지개 같은 오방색 선, 여백에 해당하는 부분을 무한을 상징하는 색채인 검정--이 검정은 단순한 블랙이 아니라 검을 ‘현’, 즉 검고도 검은, 흑 보다 더 검은 우주적 개념이다.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 진공 또는 우주공간으로 현시된다--으로 칠한 점이 그렇다. 꼼꼼하고도 화려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작가는 문인화 풍의 일필휘지(一筆揮之)만이 우리의 유일한 전통이 아님을 강조한다.
김영헌은 가상세계에서 종횡무진 신나게 뛰어노는 캐릭터를 그렸다. [frequency]라는 작품제목처럼 수퍼 마리오가 뛰노는 산야는 파장으로 되어있다. 그것은 현대판 몽유도원도라 할만하다. 정신도 물질도 아닌 제3의 실체인 정보는 안평의 시대에는 없었던 것이다. 현실도 허구도 아닌 가상세계에서 산야는 여러 파장의 출렁임으로 가시화된다. 파장으로 된 풍경화 옆의 작품 [Cloud Map]에서 9개의 작은 패널들의 전면을 채운 것은 요란한 색채들이다. 샘플처럼 하나하나 나뉜 배치에 대해, 작가는 현실은 연속적이지만 가상은 비연속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상세계는 on/off, 0/1로 분절화 되어 있는 것이다. 가상세계 역시 동양화처럼 현실세계의 욕망이 투사된 이상적 공간이다. 가상현실을 이루는 파장은 물, 구름, 안개 같은 자연적 이미지와도 중첩된다. 수학적으로 구성된 공간은 우연도 필연만큼이나 강하게 작동한다. 최근 작업에 많이 사용되는 동양 민화의 혁필기법과 서양화의 자동 기술적 요소는 프로그램화된 구조와 상호작용하는 우연적 요소들이다.
홍순명은 [역사를 바라보는 16개의 시선-안평대군]에서 같은 크기의 캔버스 16개를 사각형으로 배치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하나하나 보면 무엇인지 불확실한데 멀리서 함께 보면 상투를 튼 남자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안평이라는 묵직한 주제이니 만큼, 작가 또한 역사의 퍼즐을 맞춰보려고 애썼을 것이다. 작품은 작가가 추리와 상상을 동원하여 모은 조각들이다. 16개의 단편들은 각기 조금씩 다른 각도와 비율에 색채까지 흐릿하다. 4x4열로 종합된 이미지를 수직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3개의 수직선과 3개의 수평선의 틈은 매우 크게 벌어져 있다. 단편들은 대략 맞춰져 있지만 모자이크처럼 꼼꼼하게 붙어 있는 것은 아니다. 간극과 틈을 최대한 벌리는 홍순명의 작품은 동일자가 차이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려준다. 가령 ‘안평은 뭐다’라는 확언 대신에, 부정적으로 언급한다. 즉 안평은 우리와 동시대인이 아니고, 여자가 아니며, 평민이 아니고....이 차이의 계열은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 16개의 시선은 그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해당할 것이다. 이러한 해체주의적인 방식이 안평의 부재와 죽음이라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출전; 자하미술관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
'미술·공예 LIBRARY > 미술·디자인·공예 자료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림의 뜻: (77)매봉이 보이는 비변사에서 비상한 시국을 생각한다/ 최열 (0) | 2015.08.09 |
---|---|
미술인 추억-(1)장욱진, 휴머니즘의 감동/ 김정 (0) | 2015.08.09 |
또 다른 한국의 피카소, 하반영/ 김종근 (0) | 2015.08.01 |
전시: 자기만의 방 (0) | 2015.08.01 |
이쾌대_두루마기 입은 자화상_1940년대 후반_캔버스에 유채_72x60cm_개인소장(2) (0) | 2015.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