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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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향은 어디에 있는가?
<아키토피아의 실험>을 보고
유토피아는 일반적으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국가나 사회를 이르는 말이다. 또는 우리가 끊임없이 갈구하는 어떤 이상향(理想鄕)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영국의 정치가이자 인문주의자였던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이다. 모어는 1516년 자신의 책 <최선의 국가 형태와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The title De optimo rei publicae deque nova insula Utopia(Of a republic's best state and of the new island Utopia)>에서, 대서양 한가운데 위치한 이상국가 ‘유토피아(Utopia)’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Utopia는 그리스어 οὐ(not)와 τόπος(place)를 합쳐 만들어진 라틴어로, 흥미롭게도 그 의미를 직역하면 존재하지 않는 장소 ‘no-place’이기도 하다. 모어는 유토피아를 모든 사람이 같은 옷을 입고, 같이 모여 식사를 하며, 계급도 없고 빈부의 격차도 없는 평등한 사회로 묘사하고 있다.
적극적인 유토피아 구현
유토피아 사회주의
이러한 유토피아의 이미지는 18-19세기에 이르러 푸리에(Charles Fourier, 1772-1837), 생시몽(Henri de Saint-Simon, 1760-1825), 오웬(Robert Owen, 1771-1858) 등의 사상가들에 의해 ‘유토피아 사회주의’ 운동으로 확대된다. 특히 푸리에는 각각의 중정을 중심으로, 공동 식당과 도서관 같은 교육 및 학습 공간, 공방 및 공장의 생산 공간, 기숙사와 외부인을 위한 여관 등 주거 공간을 배치하는 자존적인 생산/생활 공동체(phalanstère/Phalanstery)을 제안하는데, 이는 유럽과 미국 대륙의 수많은 공동체에 영향을 주었다. 내부의 가로를 따라 상가와 의료 및 교육시설 등 다양한 공공시설이 늘어서 있고, 옥상에는 육상 트랙과 함께 어린이를 위한 수영장과 학교가 있는 르꼬르뷔제(Le Corbusier, 1887-1965)의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 주택 집합)’ 역시 푸리에의 공동체를 모델로 삼고 있다. 이렇게 유토피아는 단지 막연한 이상향으로 끝나지 않고,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건축가들에게는 새로운 시대를 그려보는 영감의 원천으로 작동하곤 했다.
아키토피아의 실험
그렇기에 <아키토피아의 실험>展은 많은 기대를 품게 한다. 전시는 “지금보다 더 나은 곳을 꿈꾸는 유토피아적인 상상력은 건축을 작동시키는 힘”이며, 그렇기 때문에 “과연 우리 건축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건축가들의 이상으로 탄생하는 ‘아키토피아(Archi-Topia)’는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채워질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또한 “우리 건축/도시사에 흩어진 아키토피아의 흔적들을 다시 추적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역사적으로 아키토피아의 욕망이 투사된 장소들을 다시 살펴보면서 그것들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이를 통해 “앞으로의 건축적 이상향을 짐작”하고자 한다며, 전시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과연 우리의 건축가들이 꿈꾸는 이상향은 무엇인지, 그 꿈이 어떻게 건축에 담겨있는지 기대로 가득 차 전시장을 찾았다.
유토피안의 꿈
전시는 1960년대 세운상가의 <유토피안의 꿈(Utopian Dream)>, 1990년대 파주출판도시와 헤이리 아트벨리의 <건축 도시로의 여정>, 2000년대 판교단독주택단지의 <욕망의 주거 풍경>으로 나눠진다. <유토피안의 꿈>에 들어서면, 한쪽 벽을 가로지르는 사진작가 안세권의 <세운상가가 보이는 서울 파노라마(2015)>를 먼저 만나게 된다. 서울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세운상가는 흑백 사진 속 건물 군락 사이에서 의외로 눈에 띄지 않는다. 또 다른 벽에는 노경 작가의 <레코드 시리즈 – 세운상가(2015)>가 지난 50년 삶의 흔적을 한 장 한 장 담아낸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잃어버린 항해(서현석+안창모, 2014)>로 명명된 세운상가 모형이 스크린을 향하고 있다. 스크린에서는 세운상가에 대한 말들이 이어지고, 그 주변으로 50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세운상가 기본설계 도면, 당시 관련 공무원이 직접 손을 꼼꼼하게 채워나간 기안용지, 서울 도심 및 여의도 개발에 관한 기사와 자료들이 펼쳐져 있다. 오랜 시간으로 접힌 부분이 누렇게 변한 도면에는 지금의 세운상가와는 다른 또 다른 세운상가가 그려져 있다. 입면도에는 V자 형 기둥이 공중데크를 지지하며 늘어서있고, 저층부 단면에는 몇 개 층이 뻥 뚫린 공간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한쪽에는 옥상 정원에 들어갔을 그네와 미끄럼틀의 상세 도면이 자리 잡고 있다. 공간을 둘러보고 나서 <유토피안의 꿈>라는 제목에서 기대했던 김수근의 유토피아, 김수근의 꿈을 그려보려 하지만, 전시 한구석에 있던 겐조 단게(Kenzo Tange/丹下健三, 1913-2005)의 동경만(東京灣) 프로젝트만 떠오른다. 동경만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메타볼리즘(Metabolism)’ 구조가 김수근이 지향하는 유토피아라고 믿고 싶지 않다. 르꼬르뷔제의 유토피아나 그것을 받아들인 일본의 유토피아라면 모를까.
건축 도시로의 여정
<건축 도시로의 여정>은 한쪽 벽을 가득 채운 거대한 파주출판도시 모형으로 시작된다. 공간은 파주출판도시에 관한 건축가와 비평가의 그림과 글로 가득하다. 건축가 플로리안 베이겔(Florian Beigel)의 스케치 <심학산 쪽으로 제안된 도시 습지의 모습(1999)>는 파주출판도시를 심학산과 한강 사이의 거의 보이지 않는 도시로 그리고 있고, 김용관 작가의 <파주출판도시의 밤(2015)> 사진과 그 위의 “출판문화도시에서는 움직이는 게 별로 없고 밤에는 모두 불 끄고 간다. 그러지 않아도 이 도시를 디자인했던 [당시] 40대 건축가들은 대체로 창백하다.(...) 문제는 여전히 시간이다. 책이 사랑과 문화로 엮이고 효소로 작동하기 위한 시간과 프로그램이다.”라는 박길룡의 ‘한국적 유토피아: 구름 그림자, 『아키토피아의 실험(마티, 2015)』’의 한 구절은 또 다른 보이지 않는 도시를 묘사하고 있다. 또한 미디어아티스트 이종석의 영상물 <파주 출판도시의 2008 여름(2015)>은 사람 하나 없는 그러나 너무나 아름다운 파주출판도시의 여름을 보여준다면, 반대편의 배형민+정다운의 <목소리의 방(2008)>은 파주를 만든 수많은 건축가들의 말로 가득하다. 불확정성, 보이드, 사이 공간, 비움, 공동성, 경계,...
헤이리 아트벨리의 공간 역시 건축가와 비평가의 그림과 글로 가득하다. 한쪽에는 “’예술인들이 꿈꾸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5만평. 1998년 창립총회를 열고, 예술인 마을의 기획이 시작된다. 헤이리는 입주자와 건축가들 사이의 그야말로 ‘맘대로 해주세요’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에 한국 청장년 세대의 건축가들이 모였다... 당시 건축주들은 이 한국의 청년 세대들이 그들의 이상향을 대신 그려 주리라고 믿었다.”는 박길룡의 ‘한국적 유토피아: 구름 그림자, 『아키토피아의 실험』’의 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과연 그 젊은 건축가들이 꿈꿨던 이상향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과연 헤이리 아트벨리의 입주자들의 이상향은 건축가를 통해 구현되었을까?
욕망의 주거 풍경
<욕망의 주거 풍경>에 들어서면, 건축가의 유토피아가 무엇인지, 거주자의 꿈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듯하다. 사진작가 황효철의 <유형을 보다(2013-2014)>는 판교단독주택단지를 가득 채운 무표정한 얼굴들을 한 벽 가득히 보여주고, 옵티컬레이스(김형재/박재현)와 박정현의 <왜 판교인가(2015)>는 알 수 없는 암호 같은 그래프와 수치로 판교를 그려내는가 하면, 옵티컬레이스와 박정현의 <판교 유토피아 - 판교지구단위계획, '해야한다'와 '해서는 안된다'의 세계(2015)>는 읽기조차 버거운 수많은 지침들로 지도를 가득히 채우고 있고, 사진작가 이영준의 <왜 판교는 창문을 싫어할까(2015)>의 주택들은 내부에 어떤 욕망의 공간이 있는지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그나마 마지막의 갈라진 틈으로 들어가 건축가 조성욱의 공간에 이르러서야, 건축가이자 집주인인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자신이 원했던 공간이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조성욱은 판교 지침에 밑줄을 쳐가며 이것이 과연 유토피아인지 묻고 있다.
<아키토피아의 실험>을 보고 왔지만, 그들의 유토피아가 무엇인지 또한 이상향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전시가 그들의 이상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건축에서 이상향을 볼 수 없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들에게 이상향이 없는 것인지 궁금하다. 전시장 한쪽에 적혀있던 "시대정신이란 시대의 욕망이다"라는 사진작가 강홍구의 말처럼, 거창하게 유토피아가 아니더라도, 건축가의 욕망, 거주자의 욕망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멋진 사진과 모형, 그리고 벽을 가득 채운 글에 ‘유토피아/이상향/욕망’이 있다고 주장만 할 뿐. 알록달록한 그래프의 높이와 면적을 우리의 ‘그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김수근이 세운상가에서 그리려했던 유토피아를 떠올려보려 하지만, 내 머리 속에는 단게의 동경만 마스터플랜의 이미지만 떠오른다. 세운상가가 의도한데로 지어지지 못한 것은 권력과 탐욕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감할만한 이상향을 그려주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 김수근이 그리던 이상향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일본을 통해 학습한 서양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파주출판도시와 헤이리 아트벨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파주는 자연을, 헤이리는 예술을 지향점으로 삼는다지만, 우리의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저 우리의 현실을 잠시 잊기 위해 방문하는 관광지처럼 다가온다. 파주출판도시가 지향한다는 공동성도 실제로 어디에서 느껴야 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판교주택단지 역시 개개인의 욕망을 꽁꽁 숨긴 채 누구에게도 보려주지 않는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우리에게는 왜 이상향을 그리는 회화나 문학 작품이 흔치 않은지... 서양 예술에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유토피아적 비젼이 그토록 넘쳐 나지만, 왜 우리에게는 없는지... 그렇다면 일본에게 근대를 차압당해 우리의 이상향을 만들 시기를 놓친 것인지... 아니면 자연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우리의 욕망 속에 이미 우리의 이상향이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중국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 도원향(桃源鄕)을 대체할만한 어떠한 사회적 이상향도 우리는 만들지 못한 것인지... 궁금하다.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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