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김희용 / 물질의 표면에서 떠나는 나선형 시간여행
이선영
물질의 표면에서 떠나는 나선형 시간여행
이선영(미술평론가)
한 덩어리에 100키로 가까이 되는 시꺼먼 돌덩어리가 어디선가 기운을 받아서 마치 생명이나 우주가 새로이 탄생하는 듯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김희용의 ‘새기다, 氣’ 전은 말그대로 돌에 기를 불어넣은 작품이다. 통상적으로 기는 불어넣어진다고 상상되지만, 수용체가 단단한 재료인지라 새겨진다. 그것은 연마한 검은 돌 위에 핸드피스로 선을 새기는 일종의 드로잉이다. 작가는 이전에 종이 위에 선 드로잉을 꽉 채우는 작업을 해왔고, 이 전시에서도 [그리다, 氣]라는 제목으로 장지에 펜으로 그린 작품이 함께 걸린다. 조각은 평면을 입체에 넣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강이나 산에서 수집한 자연석으로 했지만, 선이 보다 명확하게 보이게 하기위해 오석으로 바꿨다. 평면이든 입체든 드로잉이라는 방식은 시간성과 그에 따른 서사를 암시한다. 나선형으로 진행하는 선의 흐름은 발생과 수렴, 또는 펼침과 접힘이라는 상호적 과정을 상징한다.
새기다-氣, 29 X 20 X 32cm , Material : 오석, 2015
<!--[if !supportEmptyParas]--> <!--[endif]-->
새기다-氣 39 X 28 X 19cm , Material : 오석, 2015
<!--[if !supportEmptyParas]--> <!--[endif]-->
김희용의 작품은 생명이나 우주의 시작, 그것이 펼쳐지고 접혀지는 과정에 대한 비유이다. 고정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는 것에는 반드시 힘(에너지, 氣)의 투입이나 말소라는 계기가 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의하면,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단지 변모될 뿐이다. 초창기 사용했던 재료 중의 하나인 몽돌의 경우, 오랜 세월이 이미 그 표면에 각인되어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석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오석의 경우 작가에 의해 연마되면서 또 다른 시작점을 만든다. 연마하는 시간이 새기는 시간보다 더 걸릴 정도로 연마는 중요한 단계이다. 연마를 통해 돌은 ‘만물이 비롯되는 판’(질 들뢰즈)으로 거듭난다. 연마과정은 안에서부터 올라오는 기보다는 바깥에서 투입되는 힘을 더욱 강조한다. 그래서 김희용의 작품 속 주름은 지문이나 나이테같은 방식과도 차이가 있다. 어지러운 선들 사이에서 찾기 힘들긴 하지만, 기점(들)도 분명하다.
검은 바탕 위에 새겨진 흰 선은 최초의 시작이라는 극적 행위를 드러낸다. 그러나 시작이 있는 만큼 끝도 있고, 펼쳐진 주름은 어디선가는 접혀지며, 코스모스는 카오스로, 빛은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방향은 쌍방향이다. 되돌아갈 수 있음, 다시 시작됨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단순한 기계적 반복은 부정적이다. 예술은 반복이지만 차이를 가진 반복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기계적 반복에 의해 움직인다. 시스템이 자동적으로 실행되는 진공상태에 편재하는 것은 기계적 반복이다. 기계적 반복은 내가 하든 누가하든 아무 상관이 없이 똑같은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정상이다. 지상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노동은 고역이 되고, 예술을 포함한 모든 활동의 전범이 되어간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은 이러한 동일화를 거부하는 지점으로 남아 있으려 한다. 예술은 차별이 아닌 차이의 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새기다-氣, 80 X 170 X 70cm , Material : 오석, 2015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것은 전쟁이 아닌 평화, 무질서가 아닌 풍요로움을 낳는 차이의 세계이다. 김희용의 작품에서 모인 기는 수직으로 축적되기도 하고, 바닥에 흩어져 있기도 한다. 어떤 것은 좌대 위에 놓여있다. 그것들의 위치와 배열은 잠재 에너지의 차이를 알려준다. 물리학의 법칙은 질서감을 가진 것에 에너지가 더 많이 잠재해 있음을 알려준다. 나선형으로 돌에 새겨진 드로잉은 변모를 상징한다. 빙빙 돌아가는 기계의 움직임과 돌의 표면 굴곡이라는 저항을 극복하고 새겨진 선들은 하나의 기점으로부터 퍼져 나가는 기운들을 보여준다. 기의 퍼져나감을 강조하기 위해 금색으로 색을 낸 것도 있다. 마치 온 생명의 기원인 태양처럼 기운을 발산하는 것이다. 기점이 여러 개인 경우에는 수렴과 발산이라는 양방향의 움직임들이 교차된다.
서로 다른 굴곡 면에 위치한 기점과 기점의 만남은 힘과 힘이 부딪혀 더 큰 소용돌이로 확장하기도 하고, 서로 상충되기도 한다. 소용돌이 형상으로 뻗어나가는 선은 나비효과처럼 조그만 차이도 매우 커질 수 있음을 예시한다. 무릇 모든 사건은 차이에서 비롯된다. 차이가 사라질 때 사건도 사라진다. 차이와 사건이 사라진 자리에 동일성과 재현이 자리 잡을 것이다. 그것이 이상과 정상, 그리고 예술과 일상의 차이다. 작가가 기운을 불어넣기 전에 이미 돌은 어떤 기운의 결집체였다. 그래서 작가는 돌과의 교감을 중시한다. 돌의 표면 굴곡에 따라 대략 그 위에 자리 잡을 선들이 상상되고, 사전 드로잉 없이 바로 핸드피스로 작업한다. 돌에게서 영감을 받고 행위 하는 것은 대상과의 교감을 중시하는 것이다. 마주한 돌은 작가의 주관적 의지가 남김없이 관철돼야 하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다. 작가가 주체가 되어 작업을 하는 것이지만, 돌도 허락 해줘야 순조롭다.
그리다-氣 116.8×91 cm, Material : 장지에 펜, 2014
<!--[if !supportEmptyParas]--> <!--[endif]-->
재료와 대화를 할 수 없는 이는 상품은 만들지언정 작품을 만들 수는 없다. 상품은 도구이지만 작품은 목적이다. 대화는 아무리 그 대상이 침묵의 존재라 할지라도 상호적이다. 자기를 쏟아내는 것에 머무는 독백 스타일의 작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자기의 노동력만 쏟아내는 작품도 자신을 고갈시킬 것이다. 예술에서 과도하게 책정된 자신과 노동의 몫을 경감해야 한다. 삶이 인간을 너무 무겁게 했기에 예술은 가벼워야 한다는 니체의 격언을 상기할 필요도 있다. 자신이 고갈된 자리에 뭐를 채워 넣든 외재적일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이 개념으로 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노동과 개념으로 중무장한 예술들은 우리를 얼마나 무겁게 하는가. 김희용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돌만큼이나 작가도 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압도하거나 압도당하는 느낌이 아닌, 즉 너무 작지도 너무 크지도 않은, 작가가 팔을 뻗어 안을 수 있을 정도의 돌덩어리는 대화의 적정 수위를 알려준다.
한번 물꼬를 튼 대화는 멈춰서는 안 된다. 종이에 연필로 그리는 선과 다르게 수정할 수도 없기에 한 번에 쭉 가야 한다. 마치 화선지에 먹으로 그린 선과도 같다. 돌 위에 새겨진 선에는 손의 떨림, 감정의 기복이 지진파처럼 드러난다. 작업하는 방식은 같지만 결과는 일회적이다. 어떤 작품은 과정 중임을 표현하기 위해 표면의 일부만 선을 새겼다. 완벽하게 선으로 뒤덮인 작품 역시 완료보다는 과정 중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이어지는 선들은 덩어리의 표면을 강조한다. 일정한 부피를 가지는 돌덩어리는 표면을 점령한 선들로 인해 확장성을 가진다. 선은 흐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리가 만약 매끈한 표면에 새겨진 홈 사이를 이동하는 2차원적 생물이라면, 유한한 부피는 무한한 표면으로 다가올 것이다. 부드럽게 연마된 표면은 마치 알 같은 느낌도 준다. 유기체의 주름처럼 보이는 그 위의 선들은 알의 분화과정에 필수적인 선들을 떠올린다.
새김-氣 20 X 53 X 17cm , Material : 오석, 2014
<!--[if !supportEmptyParas]--> <!--[endif]-->
새겨진 기, 즉 선은 덩어리를 유기체로 조직한다. 울뚝불뚝 다른 곡률을 가진 돌들이 어떤 개체로 분화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어떤 과정 중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은 분명하다. 새겨진 선은 물질적 덩어리를 활성화한다. 비슷한 양태의 덩어리들이 한 공간에 여러 개 배치되어 있음으로서 덩어리들 간의 잠재적 움직임도 감지된다. 그것들은 키네틱 아트처럼 현실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지만, 잠재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현실성보다 잠재성을 중시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에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는 방법이기도 하다. 돌조각이라고 해서 무지막지한 노동이나 숙련된 기술만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그림과 드로잉의 차이가 있듯이, 본격적인 돌조각과 김희용의 돌조각은 차이가 있다. 그것은 분화보다는 응축된 상태를 표현한다. 생명을 비롯한 모든 것의 시작은 응축을 전제로 한다. 용수철처럼 응축된 과정이 없이 멀리 나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생명은 자동적인 나아감이 아닌, 도약과 비약을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예술과 생명은 비슷하다. 질 들뢰즈는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잠재성에서 분화되는 생명의 양상을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유기체는 원초적인 주름, 접힌 것, 접기이다. 세계는 변화하는 곡률(inflextion)로 나타난다. 물질은 구조와 형태들을 가질 뿐만 아니라, 질감을 갖는다. 알은 세계의 시작이다. 생명 뿐 아니라 우주의 시작이다. 김희용의 작품을 알과 비유하기에는 너무 단단하지 않나 싶지만, ‘모든 단단한 것이 유동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했음’(미셀 세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돌 표면에서 떠나는 나선형 시간여행은 단단한 것이 유동체였던 시기로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돌의 굴곡 면을 따라 흘러가는 곡선들은 유동성을 강조한다. 예술은 새봄과도 같은 그러한 원초적 단계를 동경한다.
새기다-氣 46 X 37 X 15cm , Material : 오석, 2015
<!--[if !supportEmptyParas]--> <!--[endif]-->
새기다-氣 28 X 35 X 20cm , Material : 오석, 2015
<!--[if !supportEmptyParas]--> <!--[endif]-->
현대 사회 역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유동적이다. 가령 근대의 분화과정과 탈근대의 융복합 과정이 중시되었는데, 서로 방향을 다르지만 자본/노동의 모순에서 발생하는 힘에 의해 추동되는 변화라는 점은 같다. 작가는 부피를 가진 표면 위에 새긴 발산/수렴하는 선을 통해 시작/소멸의 자리를 두드러지게 한다. 명확한 계획 없이 이루어지는 선의 여행은 점에서 점이 아닌, 주름에서 주름으로 나아가는 운동을 보여준다. 자연적 실재감을 비워내려는 현대문명은 점과 점으로 연결된 투명한 공간을 강조한다. 그러나 표면을 감싸는 선들의 움직임으로 가득한 김희용의 작품은 도구화로 전락될 수도 있는 투명한 공간이 아닌 불투명한 자리를 강조한다. 최초에 합리적인 것은 투명했다. 그러나 근대의 역사는 (투명한)합리적 과정이 (불투명한)비합리로 귀결된다는 ‘계몽의 역설’(프랑크푸르트 학파)을 보여준다.
검은 덩어리는 그 위에 가해진 조형력에도 불구하고 불투명하게 남아있다. 실재는 불투명성하다. 그리고 잠재적이다. 움직이지 않는 검은 덩어리라는 최초의 출발은 잠재적 실재의 불투명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특히 검은 색은 모든 색의 합쳤을 때 나는 색이며, 그것이 연마됨으로서 반사되는 빛은 변모를 통해 발산하는 힘을 표현한다. 또한 그 위에 새겨진 선은 힘이 들고나는 자리를 표시하는 듯하다. 몸과 물질이라는 두 실재가 만나는 장에서 선은 양자의 연결고리가 되어준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잠재적인 것은 잠재적인 한에서 어떤 충만한 실재성을 소유한다고 말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와 비율적 관계들은 현실적이지 않고 잠재적이며, 다시 말해서 무의식적인 성격을 지닌다. 드로잉이라는 방식은 무의식적 과정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새기다-氣 37 X 45 X 24cm , Material : 오석, 2015
<!--[if !supportEmptyParas]--> <!--[endif]-->
새기다-氣 25 X 38 X 23cm , Material : 오석, 2015
<!--[if !supportEmptyParas]--> <!--[endif]-->
드로잉은 종이 위에서든 돌 위에서든 이 풍부한 잠재성에 호소한다. 사물은 잠재적 상태에서 현실적 상태로, 그리고 다시 잠재적 상태로 변화한다. 작가는 돌에 잠재된 형상을 최대한 활용한다. 창조는 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작업이란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는 과정이다. 미술사는 돌덩어리에서 잠재적 형상을 보고 그것을 현실로 꺼내는 르네상스 시대의 대가의 예를 기록한다. 현실화는 발산하는 선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들뢰즈가 말했듯이, 잠재적인 것은 언제나 차이, 발산, 또는 분화를 통해 현실화된다. 분화는 어떤 선들의 창조를 함축하고 바로 그 선들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 몸과 물질이 총 동원되는 선 긋기는 나를 잊게 한다. 그것은 나를 잊게 함으로서 나를 표현한다는 역설로 인해 희열을 안겨준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
'미술·공예 LIBRARY > 미술·디자인·공예 자료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치콕의 새, 내 작품의 새, 그리고 기러기/ 김경옥 (0) | 2016.01.08 |
---|---|
도서 소개- 목수 고집/최기영, 애경출판사 간 (0) | 2016.01.08 |
“장욱진의 심플(SIMPLE) 정신”, 그 현대적 변용/ 이선영 (0) | 2016.01.08 |
꿈과 마주치다전 프로젝트A (0) | 2016.01.08 |
서울디지털대학교 회화과 제5회 졸업 전시회 (0) | 2016.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