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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완석 - 사건을 발생시키는 개념/ 이선영

sosoart 2016. 10. 28. 21:56

오완석 / 사건을 발생시키는 개념

이선영

사건을 발생시키는 개념

  

이선영(미술평론가)

  

최근 몇 년간 구상되거나 발표된 오완석의 작품은 개념적이다. 개념은 단순한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니라 체험을 야기하고 생각을 유도하며, 사물을 동반한 설치작품으로 펼쳐진다.  그의 작품은 일요일만 있는 달력이나 홀수만 있는 시계 같이 책상위에서 제작했을 법한 작은 규모부터 전시장 전체를 잠재적 스피커로 구성한 큰 규모에 걸쳐있다. 개념이 숙성하는 시간은 물리적인 제작 기간을 넘어선다. 개념은 꿈과 무의식을 통해서도 성장할 수 있다. 그는 ‘작업실에 심어 놓고 생각의 물을 준다’. 관객 또한 작가가 촉발했을 따름인 개념의 씨앗을 함께 가꾸는 협력자가 된다. 작품 [case](2011)는 ‘나 ___이(가) 작품을 만든다면 그 크기는 __ x __ x __ (cm)이다’라는 쪽지를 돌리고 돌아온 대답대로 케이스를 만들어 설치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수년간 시행된 것으로, 국내외의 작가와 기획자는 물론 일반인을 포함한 다양한 부류로부터 500여개의 대답을 얻어냈으며 향후에도 계속 될 수 있다. 




 case_ idea_ installation_ 2011~2016



case_ idea_ installation_ 2011~2016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은 나무판과 금속선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크기의 박스들이 바닥면으로부터 자라나는 듯하다. 실제로 구상하고 있던 작품 뿐 아니라, 삶과 예술에 대한 다양한 희망사항 또한 곁들여진 대답들은 계속 곁가지를 키운다. 지금쯤 어떤 것은 작품으로 구현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작업실 한켠에 포장된 채로 있을지도 모르며, 전시 이후에 파괴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또 다른 전시나 판매를 위해 포장 중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을 수많은 작품들은 어떤 제 2, 3의 삶을 사는 것일까. 오완석이 제시한 텅 빈 박스들은 상상 가능한 만큼이나 다양한 가능성으로 채워진다. 이 작품은 종이와 연필, 나무와 금속 등, 최대한 중성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지금 현재보다는 무엇인가로 채워질 미지의 가능성에 방점을 찍는다. 실제 구현된 작품도 개념의 씨앗같은 단위 구조들이 조합되고 확장되는 방식이다. 


작품들은 공중이나 바닥에 일련의 구조적 단위들로 짜여 있곤 한다. 구조적 단위가 증식되는 과정은 평면 작품에서도 보여 진다. 작품 [underpainting](2014)은 평면에서 환영을 만들어내는 형식인 회화를 구조적으로 분석한다. 통상적인 회화에서 밑칠은 덮여지기 마련인데 그는 속 면이 보이게 했다. 그것은 유리에 색을 겹겹이 칠해서 완성시킨 평면작업을 앞뒤로 뒤집어서 가능했다. 평면을 이루는 여러 층위 중 감춰지곤 하는 바탕을 표면으로 끌어낸 것이다. 무반사 유리에 겹겹이 칠해진 푸른색은  빨려 들어갈 듯한 공간감을 자아낸다. 보통 유리에 색을 칠하면, 거울이 되는데 그의 ‘거울’은 관자를 비추지 않는다. 이 불투명한 거울 앞의 것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거울처럼 또 다른 세계를 향한 통로처럼 보인다. 밑층이 드러난 이 작품은 표면들을 쌓아 만든 깊이이다. 이 작품 역시 최소한의 형식을 지향한다. 




 underpainting (minus)_ paint on glass_ 150x600cm_ 2014



underpainting (Floor)_ paint on glass_ 150x150cm_ 2014



underpainting (Piece)_ paint on glass_ 150x150cm_ 2014



underpainting (Viewpoint)_ paint on glass_ 150x150cm_ 2014



세모 네모 원 같은 기본적 형태는 형태에 대한 선택을 배제하는 또 다른 선택으로 여겨진다. 형식적 단순함은 최대한의 감각과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가능성에 열려있다. 그 점에서 오완석의 작품은 미니멀하다. 큰 규모의 작품은 마주 선 형태와의 대결보다는 그 내부로 들어가게 한다. 그것은 화면을 넘어 장(場) 또는 인터페이스가 된다. 개념은 어떤 경험을 야기하는 장으로서의 작품을 지향한다. 그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다가올 어떤 사건의 윤곽, 지형, 자리매김으로서 개념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철학적 개념은 고유의 창조를 통해서 모든 사물의 정황뿐만 아니라, 모든 체험을 조감하는 하나의 사건을 세운다. 작가는 이러한 개념을 통해서 특정 사건을 묘사하거나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사건이 일어날 장을 마련한다. 오완석은 ‘이미 만들어진 있음이 아닌, 자신에게서 발견되는 있음을 보여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업은 ‘설정을 통해 환경을 제시하고, 관람자로 하여금 심리적 움직임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에게 작품은 ‘생각을 만드는 장소’이다. 작품 [중요한 생각만 하는 네모](2014)는 모래를 뿌리거나 실을 이용하여 사각형 모양의 장소를 만들었다. 만들었다기 보다 그냥 구획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경계는 취약한 재료로 연출되었다. 그것들은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흩트리면 그만이다. 예를 들면, 모래로 그려지고 허물어지는 만다라는 이러한 과정을 종교적 세계관으로까지 고양시킨 것이다. 물리적 차원과 달리 경계의 심리적 차원은 단단하다. 마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는 주술적인 원처럼 이 경계는 안과 밖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체험은 소리가 가세하는 작품 [-0+sound](2015)에서도 두드러진다. 이 작품은 초음파발생기와 조립된 나무 모듈로 만들어진 스피커로, 관객이 서있는 위치에 따라서 소리 발생 지점이 달라지는 설치작업이다. 초음파 스피커는 어떤 지점에서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중요한 생각만 하는 네모_ 모래_ installation_ 2014



 중요한 생각만 하는 네모_ 오브제_ installation_ 2012



특정 장소에 있는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소리는 기술과 마술을 잇는 예술의 역할을 생각하게 한다. 관객을 특별한 장소로 초대하는 작가에게 공간/자리의 연출은 중요하다. 특별한 자리에 대한 생각 중 가장 정점에 있는 것은 성/속에 대한 종교적 관념일 것이다. 어느 종교에서도 성스러운 시공간이 있다. 성/속의 경계가 와해되는 현대에 작품이 특별한 경험을 낳는 자리가 되기 위한 조건은 차이의 감각을 고양시키는 기법에 달려있다. 오완석의 작품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른 곳과 질적 차이를 가지는 공간을 연출함으로서, 자리와 사건을 연관시킨다. 몰입은 사건의 전조, 또는 사건 그자체이다. 미니멀리즘 같은 현대미술에서 연극적 공간 속의 지각적 탐색은 그 장에 투입된 이의 몰입을 자아내는데, 이러한 몰입은 원시적 주술이나 종교적 체험 같은 현대이전의 감수성과 관련된다. 요셉 보이스를 비롯한 많은 퍼포먼서들이 종종 신들린 무당같은 면모를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무당은 여기와 저기 사이를 잇는 어떤 위치에서 의례를 통해 이동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종교 자체가 여기와 저기를 잇는 것이며, 오늘날 예술이 종교에서 계승해야 할 것은 그 지점이다.


종교학자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잡기 to take place]에서 자리와 사건의 관계를 설명한 바 있다. 여기에서 자리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부여된 의미이다. 오완석의 작품에서도 공간은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투사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즉 공간은 수동적인 용기(容器)가 아니라, 인식의 능동적 산물이다. 그의 작품은 관객이 사고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몸을 가진 주체라는 점을 강조한다. 자리에 대한 ‘방향설정은 항상 우리의 몸과 관련되기’(칸트) 때문이다. 몸과 관련된 지각과 경험이 자리에 의미를 부여해 준다. 그것은 인간이 위치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리를 존재하게 한다는 능동적 의미로 해석된다. 작가가 연출한 다양한 경계들은 어떤 차이를 말한다. 우리는 사원과 같이 고도로 다듬어진 구조물에서 차이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서는 차이의 지각 속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그러나 경계의 성격이 그러하듯이, 본질적으로 성스럽거나 속된 것은 없다. 조너선 스미스에게 성과 속은 실체적(substantial) 범주가 아니라, 상황적(situational) 범주이다. 오완석의 작품들에서도 경계를 나누는 문턱은 높지 않다. 




 -0+sound_ ultrasonic sensor, wood_ installation_ 2015



작품 [base](2014)에 나타나듯, 전시장에 연출한 바닥은 거리의 바닥과 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차이의 감각은 단지 여기에 있는가 저기에 있는가, 즉 '자리 잡기'에 달려있다. 그것의 의미는 그 위치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가 곧잘 구사하는 낯설게 하기는 낯익음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절대적인 차이가 아닌 약간의 차이, 한 장에서 오려낸 인간(2011)이나 도형 같은 것(2013), 뒤집힌 상자(2011)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실체가 아닌 관계, 그리고 관계의 변환이다. 변환은 차이의 표지를 달고 있는 장에서 일어난다. 존재나 실체가 변하는 것이 아닌 그것들은 언어에서 일어나는 바와 같다. 그것은 개념적 작품에 작동하는 언어적 과정을 일깨운다. 가령 오완석의 작업 개념에서 중요한 0의 위치를 살펴보자. 조나선 스미스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자체로는 의미가 비어있으면서도 중요한 차이를 표시하는 예로 영(0)을 든다. 0은 다른 숫자들과 결합할 때면 의미로 가득 찬다. 


오완석의 작품에도 의미 작용을 표시하는 0의 역할이 존재한다. 조나선 스미스는 언어학과 구조주의의 예를 들면서, 기표이면서도 동시에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요소들, 이 요소들로 구성된 체계를 말한다. 체계를 형성하는 것은 순수하게 차이가 나는 무수한 기호들이다. 그것들은 순전히 지위의 변화, 순전히 차이를 의미한다. 경계는 자의적인 것이며, 그어진 경계선 안에서는 여러 교환행위가 일어난다. 오완석의 작품 [-0+sound]라는 제목처럼 0은 한쪽 방향(+)으로, 다른 방향(–)으로 펼쳐지는 중심이 된다. 그는 2013 개인전 작가노트에서 자신의 관심 목록에 ‘0과 1’, ‘+ -’, ‘육체와 정신’ 등을 올린다. 이러한 일련의 목록들은 삶/죽음이라는, 유기체로서는 가장 중요한 대조 항의 복제 개념일 것이다. 그의 작품은 대조 되는 영역들 사이, 즉 경계 선상의 게임으로 이루어진다. 작품 [zero base human](2011)이나 [0.5인간](2012)은 가시적 정경 뿐 아니라, 지면 아래의 세계도 포함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현실과 평행으로 존재하는 미지의 우주, 그 경계에 있을 0에 대한 사고가 있다. 




 Base_ Pavement_ installation_ 2014



11 + - human_ 2011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롭고 투명한 0은 문학적 감수성과도 연결되어 ‘글쓰기의 0도’(롤랑 바르트)를 낳기도 했다. 과학적 가설에서도 발견되는 중력/반중력, 물질/반물질, 블랙홀/화이트홀 같은 대칭 개념을 통해 지금 여기를 상대화한다. 그러한 관념이 너무 추상적이라면, 인간적 차원으로 비유할 수도 있다. 테라코타 작품인 [+-human](2011)은 바닥의 그림자에서 오려진 듯한 형상으로, 서로 접해 있는 대칭적 존재다. 거울 앞에서 인간도 이와 비슷한 대칭상의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울에 대한 많은 심리학적 가설이 제시하듯, 접면을 사이에 둔 대칭적 존재는 통합이 아니라 분열을 야기한다. 가령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자기상의 불안정성을 말한다. 거울 접면을 대칭으로 서있는 인간은 환상과 상상에 노출되어 있다. 현실/상상이 아니라 양자 간의 접촉면에서의 관계가 중요하다. 이 관계가 해체되었을 때 영원히 동일한 자신은 잡을 수 없는 파국이 벌어진다. 현대는 관계성의 사고가 중시된다고 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일방적이다. 


성스러움이 배제된 절대적인 세속의 사회, 지금 여기의 즉시적인 행복만을 구가하는 소비사회는 죽음이 배제된 삶을 전제한다. 그러나 경계는 다른 편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지금 30대 중반인 그가 20대 초반일 때 실존적으로 다가왔던 문제는 삶과 죽음의 관계였다. 삶이 플러스라면 죽음은 마이너스일 것이다. 플러스와 마이너스 사이에 0이 있다. 0을 중심으로 두 대조되는 체계가 펼쳐진다. 자본주의 같은 생산과 축적의 사회는 마이너스를 생각하지 않는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다는 논리적 궤변에 따라 죽음은 무시되거나 억압된다. 현대라는 세속사회에서 종교의 퇴화는 이러한 추세를 더욱 강조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 우리는 죽음을 한쪽 구석으로 밀쳐놓고 그것을 삶에서 배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현대인은 사고, 질병, 고령같은 죽음의 우발적 원인을 강조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러한 태도는 죽음을 필연적인 것에서 우연한 사건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그러나 생존이라는 도박에서 가장 큰 밑천은 생명 자체이다. 




 0.5인간_ objet_ installation_ 2012



 zero base module_ paper_ 70x50cm_ 2013



 뒤집힌 상자_ 오브제_ 2011



프로이트에 의하면 생명이 내기에 걸려있지 않으면 삶은 빈곤해지고 무기력해 진다. 죽음을 따로 떼어놓고 삶을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것을 단념시키고 배제한다. 프로이트는 죽음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현실과 우리의 생각 속에 마땅히 차지해야 할 자리를 인정해야한다고 본다. 인류학적인 저서 [죽음의 얼굴](니겔 발리)도 삶과 죽음은 하나의 실체의 두 얼굴이라고 보면서,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관한 개념은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와 관련된다고 말한다. 무시되어왔거나 아예 인지되지도 못했던 무의식의 힘을 부각시킨 정신분석학이 삶에 존재하는 죽음을 몫을 강조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의식 하부에 있었던 무의식, 삶의 끝에 있었던 죽음은 뫼비우스 띠처럼 다시 연결되어 역동적인 관계망을 이룰 때, 현대의 시대적 특징인 파편성은 극복될 것이다. 오완석의 작품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 힘에 다가가는 다리를 놓으려 한다.      

 

출전; 세종시 비욘드 아트 스튜디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