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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원- 인간에 의해 아직 파악되지 않은 것, 또는 자연/ 이선영

sosoart 2017. 1. 27. 17:30

이강원 / 인간에 의해 아직 파악되지 않은 것, 또는 자연

이선영

인간에 의해 아직 파악되지 않은 것, 또는 자연

 

이선영(미술평론가)

 

전시장 바닥과 벽에 나열되어 있는 이강원의 작품은 비표현적이다. 전체적인 배치 뿐 아니라 모호한 형태에 어두운 단색조의 색은 그 표정을 알아보기 힘들게 한다. 관객은 마치 외계에서 뚝 떨어진 듯한 미확인 물체를 보는 심정으로 그것들을 살펴보게 된다. 수수께끼 같은 대상과의 만남은 해석을 위한 모색을 낳는다. 풍경, 숲, 대지, 나무, 새 등 친근한 작품 제목에도 불구하고, 자연적 서정은 물론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는 발견되지 않는 작품들은 자연스러운 접촉에 대한 기대를 배반한다. 이강원의 작품은 예술작품을 접하게 될 때의 이러저러한 기대를 완강하게 밀어내고 있지만, 자체의 응집력으로 강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이러한 존재감은 그것들이 일단 조각가의 솜씨와 기술이 필요한 재료로 만들어진 어떤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몰입이라는 고도의 에너지 투입 과정은 즉시적이진 않을지라도 서서히 또는 빠르게 풀려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어떤 결과, 가령 감동이나 의미를 낳는다.

 

 


이강원-보이는 것 너머_영은미술관_2016


 

예술과 노동은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당부분 교차지점이 있다. 어떤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의미와 기능의 집적체여야 할 것이다. 통상적으로 의미와 기능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인간은 부정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너무 상투화되어 있고 이는 인간을 중심에 놓는 조각적 관례를 뒤집고자하는 작가에게는 극복의 대상이 된다. 만들어지지 않은 것, 가령 오브제같이 선택된 대상의 경우에 이와 동일한 강도의 존재감을 가지기 위해서는 또 다른 맥락이 필요하다. 미니멀리즘 이후의 현대미술에서 그것은 어떤 분위기를 연출하는 연극적 장치인 경우가 많았다. 아니면 현대문화의 의표를 찌르는 날카로운 개념의 제시이든지. 언어적 매체인 개념이야 말로 맥락의 산물이다. 맥락에 대한 강한 의존으로 인해 현대미술은 더욱 소통하기 힘들어졌다. 예술 또한 분업화된 사회의 운명을 공유하고 심지어는 더 극단화시키기도 한다. 단편을 붙이거나 배열한 이강원의 작품에서 맥락은 지워져 있다. 굳이 어떤 비슷한 맥락이 있다면 그리드같은 투명한 좌표계일 것이다. 특히 벽에 설치된 것들이 그렇다.

 

바닥에 깔아 놓은 것들도 맥락이 지워진 채 놓여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어떤 감정이나 정서를 야기하기 위한 연출이 아닌 그의 작품에서, [---풍경]이라는 식의 제목은 서정적이기 보다는 앞에 펼쳐진 광경을 싸잡는 중성적 표현 같다. 풍경은 탄력 있는 주머니처럼 모든 것을 쓸어 담곤 한다. 어떤 표현을 향한 이러저러한 선택들은 감춰져 있다. 이강원의 작품은 어디선가 잘려져 나온 단편들이 오밀조밀 모여서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거나 단편 그대로 제시된다. 그것들이 어디서부터 온 단편인지는 형태나 색채, 배열, 심지어는 작품 제목으로도 알기 힘들다. 모든 것이 즉시적으로 소비되는 시대에 이러한 지연은 해석과 대화의 과정을 늘려가는 것 자체로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예술의 전략인가. 아니면 현대미술의 고질적인 병폐인 소통불능인가. 전략이든 무능이든 21세기의 조각가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이나 조각에 대한 상투적 관점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너머’ ‘--이면’ 등으로 붙여진 이강원 전의 최근 전시부제는 그러한 의지를 보여준다.

 

 


_브론즈_42.5×49×38cm_2015


  

작품 [돌이 있는 풍경]은 실내 공간을 장식하는 건축 자재의 이미지로부터 온 것으로 가공 고무를 깎아 만든 것이다. 어떤 논리나 의미와 관계없이 배치된, 전시장 바닥을 가득 점유하고 있는 작품들의 높이는 제각각이어서 2.5cm에서 22cm에 이른다. 그것들은 언뜻 검은 형태와 그것이 바닥에 떨군 그림자처럼 보인다. 무엇의 부분인지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집적되어 있지만, 구성요소들은 접착되어 있지 않다. 형태가 놓인 바닥의 흐릿한 실루엣은 그림자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형태를 깎은 가루들을 깔아놓은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들이다. 이 형태는 또 다른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 여러 형태로 깎인 검은 가공고무 덩어리는 새까매서 그자체로는 명암의 구별이 없다. 그것은 이를테면 하얀 석고상과 반대의 사물이다. 이런저런 덩어리들이 쌓여있는 검은 형태가 오히려 그림자같다. 그래서 마치 그림자라는 허상이 실재화된 듯하다. 

 

바닥의 그림자 실루엣이 또 다른 형태임을 생각한다면 형태/그림자의 관계가 역전되어 있다. 그림자는 서있고 형태는 바닥에 깔려 있는 셈이다. 이강원은 자신의 작품을 자연과 비교한다. 하나의 덩어리를 깎아 내는 조각의 과정은 구르는 돌처럼 점차 작아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붙여나가는 소조의 과정은 침전물처럼 쌓이는 과정이다. 주조는 용암이 흘렀다 굳어가는 과정과도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돌이 있는 풍경]에서 바닥에 고착되어 있지 않은 작은 덩어리들은 그렇게 작아져 버린 조각이다. 먼지만한 크기일지라도 조각은 조각이다. 조각들은 그림자 실루엣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것은 조각으로 만든 그림자, 또는 그림자의 조각화인 셈이다. 이전에 그가 만져지지 않는 색을 조각으로—그는 오일 파스텔을 뭉쳐서 어떤 색을 조각화 한 바 있다—만든 것처럼, 그림자 또한 ‘조각화’ 할 수 있을 것이다. 


 


_브론즈_28.5×59.5×28cm_2015



이전 작품에서 그는 구름과 공기 같은 덧없는 것을 조각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그것은 수많은 오일 파스텔을 녹여서 뭉친 물질적 결합이었다. 그것들은 인간의 시각에서는 덧없는 것들이지만 자연의 관점에서는 실재적이다. 그러나 그의 자연은 기존의 형이상학이 전제하듯이 하나의 본질을 가정하지 않는다. 자연은 ‘하나의 본질을 거부하는 다양체(multiplicity)들의 연속체’(들뢰즈)이다. 그의 작품 전반이 그러한 다양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변화무쌍한 구름과도 유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구름은 지상에서 보면 솜사탕처럼 생긴 가상이지만, 다양체로서의 구름은 실재적이다. 인간은 자신을 중심에 둔 사고의 습성 때문에 실재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없다. 그래서 작가는 ‘보이는 것 너머’를 추구한다. ‘보이는 것 너머’는 통상적으로 물질이 아닌 정신을 추구하는 이들이 추구해온 것이지만, 인간적 시각은 사진의 발명 이래 가속도를 붙인 매체의 발달로 인해 점차 축소되거나 변형되고 있다. 

 

‘--너머’라고 해서 초월적인 것은 아니다. 현대예술에서 개념을 포함한 비물질적인 것들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많았지만, 그의 작품은 매우 구체적이다. 그의 작품이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적 시점을 벗어난 자연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보이지만 실체가 모호한 것을 조각화 하려는 시도는 ‘보이는 것 너머’라는 전시부제를 낳는다. ‘풍경의 이면’(2014) 전도 마찬가지다. 또 다른 전시실에 있는 작품 [숲]은 액자틀이나 벽지 무늬 등, 일상 속 식물 이미지를 모아서 만든 것이다. 집합된 단편들은 브론즈나 레진으로 떠서 분리 불가능한 덩어리가 되었다. 나무/숲, 기둥/잎새 등을 구별할 수 있는 유기적 자연은 기능도 의미도 모호한 사물이 되었다. 초현실주의 이후 현대미술의 주요한 소재인 사물은 대상이나 예술과도 다른 범주이다. 대상이 인간주체에 대한 대상인 것과 달리, 사물은 인간에 의해 아직 파악되지 않은 대상을 말한다. 

 



대지_브론즈_25×32.5×17.5cm_2016



파악되지 않는 것은 소유될 수도 없고 이용할 수도 없다. 중심/주변 간의 투명한 관계가 파악되지 않는 사물은 침투 불가능한 표면 위에서 차츰차츰 접근해야 한다. 이강원의 작품처럼 어디서 떨어져 나왔는지 알 수 없는 단편들, 왜 그렇게 모여 있는지 알 수 없는 단편들도 사물과 같은 면모를 띈다. 부분들은 뭉쳐져 있지만 펼쳐진 풍경으로 된 작품도 벽에 설치되어 있다. 벽에 설치된 것은 6.5cm-15.5cm 사이의 작은 덩어리를 선반 위에 하나씩 배치한 것으로, 상호간 어떠한 관계도 없이 배열된 단편들은 다양함이 돋보인다. 식물 이미지들은 모여서 ‘숲’을 만든다. 자연을 거칠게 흉내 내는 시뮬라크르의 집적체들은 굳이 자신이 자연이라는 원본을 복제한다고 하지 않는다. 자연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 복사본이 단편, 즉 시뮬라크르이다. 자연적 실재와 구별되는 이 가짜 존재들은 변이의 변이를 반복한다. 이 근거 없는 가짜스러운 존재와 달리 이상적인 것은 변치 않는 것, 즉 동일한 것이다. 

 

플라톤주의는 이 동일한 것을 본질적인 실재로 가정한 대표적인 철학으로, 그로부터 출발하는 재현주의의 전통은 동일한 것을 반복한다. 단편, 또는 단편의 접합으로서의 이강원의 작품은 (플라톤적인)형상이 아니라, 시뮬라크르의 속성을 가진다. 그것은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시뮬라크르의 특성이라고 말한 ‘복사물의 복사물’, ‘무한히 떨어진 도상’, ‘무한히 느슨해진 유사성’에 가깝다. 그것은 재현과 달리 유사성을 지니지 못한 그림자같은 존재이다. 이강원은 이 환각적인 것을 조각으로 구체화 한다. 그것은 원복과 복제의 구분에 근거한 플라톤 식의 위계를 뒤집고, 들뢰즈가 다시 의미를 부여한 시뮬라크르가 ‘유일하고 이상적이며 신비적 특권을 가지지 않은 미술작품에 새로운 모범을 제공하는 기회를 부여’(미셀 카미유)한다. 원본과 복제 사이의 가능한 위계를 흩어트리는 이강원의 작품은 ‘원본, 1차성, 유사성, 모방, 정확성’ 즉 ‘재현의 철학이 와해되는 과정’(미셀 푸코)을 보여준다. 


 


돌이 있는 풍경_가공고무_1480×920cm, h. 2.5~22cm_2016



돌이 있는 풍경_가공고무_1480×920cm, h. 2.5~22cm_2016



조각적 재현의 중심에는 인간이나 인간중심적 관점이 있어왔다. 브론즈나 레진으로 만들어진 작품 [숲]은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식물 문양들이 집합된 상태이다. 그것은 단단한 재료로 만들어진 조각품이지만, 유기적 조직체로서 지상에 우뚝 선 조각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얼기설기 뭉쳐있는 느낌이다. 그것은 마치 무너져 버린 것처럼 느슨하게 뭉쳐진 채 중력에 순응한다. 전통 조각의 경우 가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심봉을 사용하여 무너지지 않게 조치한다. 이강원은 채집하듯이 취해온 것들을 만들어 턱턱 붙여나간다. 그는 심봉, 노끈, 철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중력을 이겨내기 위한 뼈대 대신에 재료 자체의 점성과 무게만으로 구축한다. 그래서 수평적 작업이 많다. 유기적 조직화가 아니라, 단지 모여 있는 이 집합체는 언제라도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도 그 계열을 늘릴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무질서하고, 긍정적으로 말하면 열린 상태다. 

 

작품 [가시나무]는 언뜻 보면 가시 돋은 나뭇가지들이 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인공적인 나무 무늬 타일을 붙여 만든 것임을 드러낸다. 레진으로 만들어진 작품 [새]는 건축 자재의 파편들이 뭉쳐있는 것으로, 그것을 새로 볼지 말지는 관객에게 달려있다. 집합된 단편들이 꽤 높이 쌓여있는 이 작품은 어떤 구조라기보다는 구조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작가의 말대로 그것은 잠시 앉아있다 곧 떠나갈 채비를 하는 듯한 새가 연상된다. 축대 같은 구조물을 장식하는 가짜 바위 모양을 뭉쳐서 브론즈로 만든 [대지]는 조악한 복제물을 다시한번 복제한다. 그것이 대지임을 느끼게 하는 요소는 자연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뭉쳐진 모습이다. 그의 대지는 수평적이지도 않고 수직적이지도 않으며, 물질 덩어리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의해 뭉쳐있는 단편들이다. 그는 그 단편들을 브론즈로 견고화했다. 


 


돌이 있는 풍경_가공고무_1480×920cm, h. 2.5~22cm_2016



뭉쳐진 것이든 펼쳐진 것이든 단편은 주요 구성요소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부속품같은 것이 아니라, 표피에서 우연적으로 떨어져 나온 듯한 임의성이 특징이다. 장 살렘의 [고대 원자론]에 의하면, 고대원자론자들의 상상력에서 상(像)은 보이는 대상의 표면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미세한 막들이다. 이 시뮬라크르들은 우리 눈에 들어오기 전에 적절한 크기로 축소된다고 상상해야 한다. ‘시뮬라크르들은 단단한 물체(외부대상) 위에 있던 원자들의 위치와 순서를 오랫동안 유지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심층에서 채워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주위 환경에서 빠르게 결집(보충)이 이루어진다’(에피쿠로스) 대상에서 끊임없이 유출되는 시뮬라크르, 즉 물체들의 표면에서 떨어져 나오는 일종의 얇은 막들이 공기 중에서 사방으로 흩날린다. 이 때문에 우리는 대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가 보기에 시뮬라크르는 항상 진실하다. 그에 의하면 감각되는 모든 것들은 참되고 존재한다. 

 

그것들은 부정되어야할 단순한 가상이 아니다. 이강원의 작품은 일시적이고 하찮은 것, 그래서 인간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을 조각의 대상으로 전면화한다. 그것은 고대인들이 생각한 시뮬라크르, 대상의 표면에서 유출되는 피상적인 것들이다. 아니 이제 피상적인 것은 2차적인 지위를 벗어난다. 새, 풍경, 대지 등으로 이름 붙은 그것들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실재감이 있다. 우연적 단편들은 가시성으로부터 벗어난 것이고 무의미한 것이다. 자연이 아닌 자연물의 이미지, 그리고 그 이미지 또한 온전하지 않은 것들은 조각의 대상이 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이강원은 이러한 소재에 깎고 덧붙이고 떠내는 등의 조각적 과정을 부여했다. 현대조각이 미니멀리즘의 물마루를 넘어서면서 폐허나 무대 같은 영역으로 ‘확장’되었을 때 자연은 자연적 대상이 아닌 과정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강원은 비조각적 대상을 조각적으로 접근한다. 

 



가시나무_바닥타일, 나무_20×73.5×16.5cm_2010



그는 자신의 조각을 자연의 과정과 비교한다. 고풍스런 재료나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조각의 현대적 어법을 그 안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에 기초한 조각을 해체해온 현대조각의 흐름이다. 하찮은 모조품의 파편을 그러모은 그의 작업은 전체와 부분의 유기적 관계에 기초한 의미 있는 구성이 배제되어 있다. 작품 표면에 작가의 손길이라 생각될 만한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신인동성동형론(Anthropomorphism)에 입각한 기둥식(monolithic) 조각은 기성 조각에 내재된 인간중심주의를 대변하는 원형이다. 구상조각은 물론 그 변형인 추상 또한 이러한 어법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미니멀리즘 이후의 확장된 조각처럼 비조각적인 방편 또한 더 이상 대안이 아니다. 현대조각은 확장되다 못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유사 철학적인 말잔치다. 어차피 언어는 참조대상과는 떨어져 있다. 

 

비평가들에 의해 ‘부재를 현시(顯示)했다’는 평가를 받는 말라르메 이후, 현대예술은 부재의 상황을 깊이 의식해왔다. 단적으로, 언어가 있는 곳에 대상은 없다. 말과 사물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 프랑시스 퐁주처럼 ‘사물의 편’에 선 자들도 있지만, 언어는 무시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리차드 볼하임은 ‘예술적 대상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이 예술작품을 만들어 주는가 하는 점을 재고하는 방식’이거나, ‘예술작품이란 말에서 작품이란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언어학적으로 재고하는 경우’에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미술이 더 이상 신이나 인간, 역사나 자연 등이 아니라, 미술 그 자체에서 기원한다는 자율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 투명성이 더해질수록 물리적 존재로서의 조각은 더욱 빈곤해졌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미니멀리즘이 비계층적인 배치와 공간에 대한 리터럴한 해석을 통해 관념론을 피하였다고 평가하였지만, 개념화된 현대조각 역시 신화나 신학, 인간, 정신, 이성 못지않은 관념론적 기색이 역력했다. 

 



_레진_h. 6.5~15.5cm(each)_2016



현대미술은 ‘현상학이나 (후기)구조주의’(로잘린드 크라우스)같이 고도의 철학적 해석으로 버무려진 미술사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조각은 관념이 아니라, 미술의 지각조건인 질료와 관례(convention)의 한계에 중점을 둔다고 말해진다. 이것은 결국 작품의 질(그린버그)이나 예술가로서의 신념(프리드) 등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은 단지 흥미를 끌기만 하면 된다’(져드)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흥미란 규범을 벗어난 미적 유희를 말한다. 그러나 이강원은 조각이 물질을 다루는 것이라는 점은 사라지지 않음을 인식한다. 물질을 다루는 조각은 구체적인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서 있는 조각이 아닌 펼쳐진 조각, 긴밀한 구성이 아닌 느슨한 집합의 조각들은 특정한 시점에 국한되지 않은 보다 확장된 지각적 체험을 야기한다. 단편과 단편의 마주침은 작품의 구성요소들 뿐 아니라, 단편/작품과 단편/인간의 마주침에도 해당된다. 현대인간은 더 이상 르네상스나 고전주의 시대의 인간, 더 나아가 근대의 휴머니즘적 인간처럼 총체적으로 재현되지 않으며, 총체적 시점 또한 가질 수 없다. 

 

부분과 부분의 만남, 접속, 연합 등 부딪힘과 마주침에서 야기되는 끝없는 해석의 과정만 남는다. 이강원의 집합적 형태는 그러한 부딪힘과 마주침을 표현하며, 그 힘이 단순한 인간적 차원을 넘어 자연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보이는 것 너머’ 전은 기존의 시각이 언제나 인간중심적이었음을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비전을 추구한다. 작품의 기조를 이루는 단편은 그것들이 비록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부분이지만 조각화 됨으로서 파편을 벗어난다. 집합되어 있는 작품이나 나열된 작품, 또는 집합된 채 나열된 작품에서 파편의 모서리는 둥글려지고, 때로 고상한 색을 입는다. 사실적이지도 유기적이지도 이상적이지도 구조적이지도 않은 것들, 요컨대 인간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쉬운 주변적인 것들은 깎거나 붙이거나 떠낸 조각의 옷을 입고 또 다른 의미를 제시한다. 이강원은 조각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다양성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에게 다양성의 모델은 예술이나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다. 다양성의 징후는 총체가 아닌 집합의 개념에서 찾아진다. 


 

_레진_74×42×38.5cm_2013



질 들뢰즈는[의미의 논리]에서 총체화가 불가능한 합으로서의 자연을 말한다. 그것은 자연의 모든 요소들을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조합은 없으며, 유일한 세계나 총체적인 우주도 없다는 것이다. 총체화 되지 않는 부분들을 분배하는 자연은 ‘이다’가 아닌 ‘그리고’를 통해 드러난다. 이것 그리고 저것, 번갈음과 얽힘, 비슷함과 다름, 당김과 느슨함, 부드러움과 거칠음, 이들 각자는 타자를 제한함으로서 무제한적인 존재로 제시된다. 이렇게 다양한 자연은 재현될 수 없고 생성의 과정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생성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들뢰즈에 의하면 한계를 고정시키는 것은 언어이다. 그러나 한계들을 벗어나서 한계지어지지 않은 생성의 무한한 등가성을 통해 한계들을 복구시키는 것도 언어이다. 그것은 이강원이 주체/객체의 이원 항에 바탕 한 재현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조각적 어법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이다. ‘보이는 것 너머’를 조각으로 표현하는 그의 작업은 동일성의 반복이 아닌 차이의 반복을 향한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