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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날레;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실험실 -1/ 김영호

sosoart 2018. 1. 19. 19:04

http://www.daljin.com/column/15319


비엔날레;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실험실

김영호

비엔날레1);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실험실 -1  

 

김영호 (중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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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언 

Ⅱ. 정치적 비엔날레의 탄생

Ⅲ. 모더니즘 시대의 비엔날레 

Ⅳ. 세계화 시대의 비엔날레 

Ⅴ. 신생 모스크바비엔날레의 경우

Ⅵ. 비엔날레의 문화정치학 

Ⅶ. 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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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언 

  2010년 비인에서 발간된 한 비엔날레 종합연구서2)에 따르면 1989년 당시 30여개였던 비엔날레의 숫자가 1990년대 초에 이르러 60여개 이상으로 급증하고 있다. 이 서적이 분석 대상으로 삼은 대표적 비엔날레의 숫자만 하더라도 무려 89개에 이른다. 비엔날레를 보유하는 나라의 숫자는 52개국 이상이다. 2016년 뉴욕에서 발간된 또 다른 비엔날레 종합연구서3)는 1970년대부터 부상하는 유럽출신의 스타 큐레이터들과 1990년대에 팽창하는 아시아지역의 비엔날레, 그리고 비엔날레의 파급에 따라 변화해 온 스폰서와 자선가 그리고 비엔날레 디렉터의 역할 등에 대해 세밀히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출판물들은 비엔날레가 지구촌의 문화계에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초자료가 된다. 19세기 후반, 베니스에서 태어난 격년제 미술제가 격변하는 지구촌 환경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여전히 세계인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원인은 무엇일까. 특히 1989년 이후 비엔날레의 붐을 주도하고 있는 아시아를 비롯한 비서구권 국가들이 이 국제미술제를 통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이 글의 명제를 미리 말하자면 비엔날레는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각축장’이라는 것이다. 이는 비엔날레가 특정 집단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국가적 장치로 기능하며 이러한 장치에 자국의 특수한 문화적 유산을 연동시켜 다채로운 이익을 구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비엔날레의 원조로서 베니스비엔날레는 탄생에서부터 정치적 이슈를 품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세계 각국으로 파급된 비엔날레는 점차 경제, 사회, 외교, 교육, 관광의 전 분야에 걸쳐 전략적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복합적이며 다면적인 행사로 진화해 왔다. 비엔날레를 둘러싼 정치적 기능은 120년 이상을 버텨온 비엔날레의 역사성을 이해케 하는 요인이자 비엔날레의 존립 이유를 설명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세계의 주요 비엔날레4)를 문화사회학적 맥락에 근거해 ‘모더니즘 시대의 비엔날레’와 ‘세계화시대의 비엔날레’라는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지구촌의 정치적 환경이 급변하는 1989년을 분기점으로 설정한 것이며, 이후 진행되는 비서구권 지역의 부상과 그에 따른 신생 비엔날레의 증가현상이 전과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다.5) 특히 1990년대 이후 아시아지역 비엔날레의 증가는 전래적 비엔날레의 역할을 변화시키는 한편 비엔날레를 둘러싸고 ‘중심주의와 패권주의’, ‘탈중심주의와 복합문화주의’, ‘글로벌리즘과 신자유주의’ 따위의 이데올로기 담론과 더불어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일으켰다.6) 이 과정에서 정치적 연대와 문화적 헤게모니 다툼은 점차 대륙과 국가뿐만 아니라 특정 국가 내부의 지방과 기관 차원으로 확산되었다.


  비엔날레의 정치적 기능에 대한 연구는 비엔날레의 본성에 대한 하나의 고찰이다. 비엔날레가 ‘문화정치의 장(ground)’이라는 주장은 현대미술제로서 비엔날레가 ‘문화정치의 실험실(lab)’로 기능한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비엔날레가 문화정치의 생동감이 넘치는 하나의 쇼셜 미디어가 되지 못하면 단순히 현대미술 전시장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의 지적7)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비엔날레가 현대미술관과 차별화된 쇼셜 미디어의 장으로 작동하기 위해 각국의 비엔날레 주체들이 어떠한 정치적 전략들을 세워왔는지를 동서양의 주요 비엔날레를 사례로 살펴볼 것이다.


  이 글의 후반부에서는 냉전체제를 종식시킨 소련연방(러시아)이 21세기에 들어와 비엔날레의 행보에 끼어들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려 한다. 2005년에 창설된 <모스크바비엔날레>의 사례는, 평가는 유보하더라도, 신생 비엔날레의 정치적 기능과 그것에 기대할 것이 무엇인가를 진단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Ⅱ. 정치적 비엔날레의 탄생 


  1894년 4월 6일, 베니스비엔날레 재단의 탄생을 알리는 선언문에서 당시 베니스 시장이었던 리카르도 셀바티코(Riccardo Selvatico)는 이 미술기관에 부여된 임무가 다음의 두 영역, 즉 “지적능력의 편견 없는 개발(unbiased development of the intellect)”과 “만인의 형제애적 유대(fraternal association of all peoples)”에 있다고 선언했다.8)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베니스비엔날레에 부여된 소명이라는 것이 이성과 평등 그리고 박애의 가치를 옹호하는 서구 모더니즘 사상과 일치가 된다는 사실이다. 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베니스비엔날레의 창립은 단순히 예술의 진흥이라는 목표를 넘어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가 말하는 국가통치의 수단, 즉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9)로서 예술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베니스비엔날레의 창립 선언문은 17세기 계몽주의 이후 유럽세계를 지배했던 이성에 근거한 엘리트중심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이러한 사실은 1895년 제1회 베니스비엔날레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국적이나 활동무대가 대부분 유럽 국가들로 한정되어 있었고10) 후에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는 무수한 비평문에서 확인된다. 셀바티코 시장의 선언문에 등장하는 ‘만인’이란 곧 ‘유럽인’들을 뜻하는 용어였으며 실제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 식민지 국가들의 비엔날레 참여는 원천적으로 배제되었다.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도 소외되어 있었고, 먼 훗날 1964년 미국의 로버트 라우젠버그가 비엔날레에 출품하여 대상을 수상한 것은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정도였다.


  베니스비엔날레가 내세운 ‘지적능력의 편견 없는 개발과 만인의 형제애적 유대’는 당시 맹위를 떨치던 만국박람회(World Exhibitions)에서 빌려온 개념이었다. 베니스비엔날레가 창설되기 44년 전인 1851년, 런던 하이드파크(Hyde park)에서 출범한 만국박람회는 1855년 이후 파리와 바톤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대중적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11) 만국박람회가 슬로건으로 내건 ‘공동체의 전 세계적 확대’는 자국 이탈리아의 미술행사인 베니스비엔날레에도 그대로 이어졌다.12) 여기서 언급한 공동체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럽과 그 주변 국가들이 중심을 이룬 제한된 집단을 의미하고 있다. 유럽국가의 결속이라는 명분과 더불어 각국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잡기위한 행사로서 만국박람회의 경쟁적 운영방식은 후에 그대로 베니스비엔날레에도 자리 잡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국가관 운영’과 ‘수상제도’라 할 수 있다. 


  1907년부터 베니스비엔날레는 주 개최지인 카스텔로 공원 내 10만평 부지에 참가국의 고유한 전시관인 파빌리온(Pavilion)을 갖도록 했다. 그리고 참가국의 커미셔너를 통해 전시를 기획하고 운영하도록 허용했다. 1907년 첫 파빌리온을 세운 벨기에를 시작으로 1909년에는 영국, 헝가리, 독일 등이 줄지어 뒤를 이었다. 1912년에는 스웨덴, 프랑스가 1914년에는 러시아, 1922년에는 스페인, 1926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덴마크가 1930년에는 미국이 자국의 고유한 파빌리온을 운영하게 되었고 1995년까지 건축행렬은 계속되었다. 아시아국가로서는 일본이 1956년에 그리고 한국이 1995년에 마지막을 장식함으로써 베니스비엔날레의 국가관 건립은 종료되었고 현재 총 26개 국가관이 운영되고 있다. 베니스비엔날레의 파빌리온 구성은 이 비엔날레의 건립취지인 정부기관을 통한 정치적 연대와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베니스비엔날레에 참가하는 국가의 수는 상식의 수준을 넘어 있다. 2015년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에 초대된 국가관 수는 90개국에 달하고, 44개의 병행전시를 베니스시 전역에서 동시에 치룬 것으로 알려져 있다.13) 이 비엔날레의 정치적 영향력을 국제연합(UN)과 비교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베니스비엔날레는 21세기 비엔날레가 제시하는 새로운 기준(New Canon)으로서 세계주의(cosmopolitanism)14)를 무기로 삼아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각축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Ⅲ. 모더니즘 시대의 비엔날레


  베니스비엔날레는 유럽 문명권의 중심에 위치하여 서구미술의 주류를 역사화 시키는데 공헌해 왔다. 이 세계 유일 비엔날레의 주체들은 로마의 교황청과 같은 위상을 가지고 유럽 지역에서 태동한 현대미술의 경향들을 축성하고 자신들이 선택한 작가들에게 시상의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정치의 독점현상은 1930년대와 이차대전의 전란 과정에서 파시즘의 선전도구로 쓰이면서 극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 등 3국의 독점 행사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그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를 틈타 대륙의 건너편 라틴의 피를 수혈한 브라질이 1951년 <상파울루비엔날레>를 창설하고, 이듬해인 1952년 아시아의 유럽을 자처하는 일본이 <도쿄비엔날레>를 출범시켰다. 1955년에는 나치독일의 종식을 선언하면서 <카셀도큐멘타>가 처음으로 개최되었으며 1959년에는 프랑스의 드골 정부에 의해 <파리비엔날레>가 창설됨으로서 국제미술제의 구도는 점차 다변화되기에 이른다.


  <상파울루비엔날레>는 비서구권에서 열리는 최대의 미술전으로 출발하였으나 그 조직과 운영방식은 참가국가에 의해 선택된 대표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베니스비엔날레를 모델로 삼았다. 상파울루비엔날레는 초기부터 60개 이상의 국가들이 참가하는 성과를 거두면서 이차대전 이후 여전히 고립상태에 머물러 있던 브라질의 위상을 해소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유럽의 모더니즘 미술을 남아메리카 지역에 소개하는 창구의 역할을 실행하면서 피카소와 레제 그리고 몬드리안 등과 그 주변의 다양한 추상적 경향들을 대대적으로 소개했다. 1969년 이후 국가별 전시에 기초한 운영방식에 대한 논쟁과 정치적 문제가 겹쳐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1980년대부터는 주제전과 경향별 작품전의 방식을 개발하고 남미지역의 특수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현대미술을 연결하려는 노력으로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와서는 서구중심의 문화구조를 극복하고 자국 문화의 화합을 추구하려는 시도15)를 전시기획과 실행과정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개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도쿄비엔날레>는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시아 최초의 비엔날레이자 동북아시아 국가 중 근대화의 수용에 가장 빠른 행보를 취한 일본이 창설한 비엔날레였다.16) 이차대전의 상처가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패전국 일본이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각축장’으로 기능했던 비엔날레를 아시아지역에서 선점했고, 1990년 18회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은 주목해 볼 일이다.


  일간지 신문을 발간하던 주식회사 메이니치(Mainich News Paper Co.)에 의해 설립된 도쿄비엔날레는 청년작가들을 위한 비엔날레로 탄생되었다. 신생 도쿄비엔날레는 아시아 지역의 비엔날레로서 1952년 문을 열었으나 그 위상이 국제무대로 확대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었다. 1960년대 후반이 되면 일본의 두 젊은 평론가인 유수케 나카하라(Yusuke Nakahara)와 토시아키 미네무라(Toshiaki Minemura)가 하랄트 제만이 1969년 베른미술관에서 기획한 ‘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 Form)’ 전시회를 참관하고 귀국한 이후 1970년 10회 토쿄비엔날레에 베른미술관 전시회 참여 작가 대부분을 소개하면서 동시대 미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17) 이 두 명의 평론가들은 각각 커미셔너와 큐레이터로 비엔날레를 주도했으며 당시의 전시회 이름은 “인간과 물질 사이(Between Man & Matter)”로 정했다. 사빈 B. 보겔은 이 전시회를 계기로 도쿄비엔날레가 해외에 소개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18) 도쿄비엔날레가 국내외 미술계에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참여 작가들이 당시에 전개되기 시작한 일본의 아방가르드 운동으로서 모노하(Mono-ha), 구타이(Gutai)와 국제적 예술운동으로서 개념미술(Conceptual art), 프로세스 아트(Processes art)에 대한 포괄적인 검토를 하는데 기여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후 일본의 청년세대에게 요구되는 국제적 연대의식과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한 주최측의 의지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전후 독일의 재건사업이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성과로 나타날 무렵 <카셀 도큐멘타>는 독일 연방공화국의 통합과 회복을 염원하면서 1955년에 탄생되었다. 독일인 특유의 결속력과 문화예술분야로 집약된 정부의 지원사업에 힘입어 카셀도큐멘타는 서구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제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설립 배경을 보면 나치 치하에서 젊은 작가들에게 금기되거나 퇴폐미술로 낙인 찍혔던 다양한 추상작품들을 일반에게 공개하여 성장하는 독일의 젊은 세대들에게 모더니즘 미술양식을 소개하기 위한 취지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후 독일에 대한 미국의 지원사업은 문화예술에도 영향을 끼쳐 팝아트와 미니멀아트를 비롯하여 포토리얼리즘, 개념미술, 영화, 사진, 비디오 등 온갖 형태의 작업들이 이곳으로 밀려들었다. 4년 또는 5년을 주기로 개최어온 카셀도큐멘타는 이러한 실험적 시각예술의 양식들을 유럽 전역으로 확장시키는 창구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1972년 하랄트 제만 같은 전시기획자의 등용으로 카셀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전시책임을 맡게 된 그는 반형식과 신화적 태도, 개념미술, 프로세스 아트 등의 경향을 전시장에 끌어드림으로서 카셀도큐멘타를 대규모 전시회 이상의 것으로 전환시키는데 공헌했고 그후 이것은 카셀도큐멘타에 있어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1950년대 유럽과 아메리카에 불어오는 새로운 문화적 기류 속에서 파리도 침묵할 수 없었다. 프랑스는 드골 정부가 들어서면서 임명된 초대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의 현대미술에 대한 국가차원의 진흥정책에 따라 1959년에 <파리비엔날레>를 창설하여 17세기 이래 이태리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예술 중심지의 자존심을 지켜 나갔다. 물론 이러한 비엔날레의 창설은 예술의 패권을 위협하는 뉴욕에 맞서 문화예술 중심지의 위상을 고수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자 유럽과 미국에서 전후의 냉전 이데올로기에 편승하며 재편되는 정치적 질서에 대한 폭넓은 탐색의 시도였다. 파리비엔날레에 나타난 ‘정치적 연대와 문화적 헤게모니의 각축전’은 파리비엔날레가 동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이르는 국가들을 포괄적으로 초청한 사실과 미국에 대한 경계와 견제가 노골화 되었다는 점에서 어렵지 않게 감지된다.19) 파리비엔날레는 참가자들의 연령을 20세-35세로 제한하여 청년비엔날레라는 특성을 살렸다. 불확실성으로 무장된 파리 비엔날레는 미래를 위한 생명력을 지니며 시대의 아방가르드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1985년 문을 닫기 전까지 국제적인 비엔날레들과 경쟁하며 자신의 위치를 확보해 나갔다. 그러나 이 젊은 비엔날레의 장점은 동시에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35세의 나이 제한의 규정은 화단의 주류 세대가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동시대 미술의 현상을 보여주는데 실패했고 나아가 1970년대 말에 화단을 휩쓴 ‘아방가르드 미술의 위기’에 의해 그 생명력은 점차 쇠락해 갔던 것이다. 결국 1985년 연령제한을 없애고 새로운 조직을 구성하여 <새로운 파리비엔날레(Nouvelle Biennale de Paris)>라는 이름으로 14번째의 행사를 치루었으나 마지막 전시회가 되고 말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가 진행되는 동안 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미국과 독일에서 산발적으로 국제 미술제를 탄생 시켰다. 우선 1968년 인도의 뉴델리시는 3년마다 개최하는 <인도트리엔날레>를 창설하여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처음으로 독자적인 미술제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이 행사는 국가별 전시를 고집함으로서 국가차원의 문화교류를 통한 외교에 의의를 지니는 비엔날레 정도로 평가되고 있다.20) 그 후 1973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비엔날레>가 탄생하여 혁신적인 세계의 현대미술을 소개하기 시작하였으며 같은 해인 1973년부터 <휘트니비엔날레>는 1932년 창설된 이래 매년 전시행사를 해 오던 전례를 바꾸어 격년제 전시회로 전환하면서 미국의 미술가를 발굴하기 위한 새로운 모습으로 타시 태어나게 된다. 한편 1977년에는 독일의 뮌스터에서는 10년에 한번씩 개최되는 현대조각전 <뮌스터조각 프로젝트>를 창설하여 시내 각지구에 자리잡은 대성당이나 궁전공원의 광장과 그 주변을 비롯해 상업지구에 이르는 수십개의 지역에 작가가 스스로 작품을 설치하고 도시를 조각공원으로 조성하기 시작하였고 도시와 예술 그리고 일상과 관광이 연계된 종합적 프로젝트라는 찬사를 주변국가로부터 받게 된다.



(출처 : 현대미술학논문집, 제21권 1호, 현대미술학회, 2017, pp.113-149)


1) 이 글에서 사용하는 비엔날레라는 용어는 2년마다 열리는 국제미술제라는 본래의 의미와 더불어 문맥에 따라 정기적으로 열리는 국제미술제 일반을 지시하는 광의의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가령 3년마다 열리는 ‘트리엔날레(triennale)’, 4년마다 열리는 ‘콰트리엔날레(quatriennale)’ 그리고 5년과 10년을 주기로 삼는 카셀도큐멘타와 뮌스터조각프로젝트와 같은 국제미술제가 광의의 의미로서 비엔날레에 포함된다.

2) Sabine B. Vogel, 『Biennials-Art on Global Scale』, Springer Wien New York, 2010

3) Anthony Gardner & Charles Green, 『Biennials, Triennials, and Documenta : The Exhibitions that Created Contemporary Art』, Wiley-Blackwell, 2016

4) 세계의 주요 비엔날레에 대한 기본 정보는 아래 글을 참조했다. 김영호, 「세계의 주요 국제미술제 분석」, 『미술평단』, 가을호/62호, 한국미술평론가협회, 2001

5) Anthony Gardner & Charles Green, 앞의 책, p.3 / 이 연구서는 1989년을 비엔날레 정치의 적법성(The Politics of Legitimacy)을 인정하는 시점으로 규정하고 이 시기 이후에 나타나는 문화적 현상을 아시아지역 비엔날레의 부상((Asian Biennialization)으로 꼽고 있다.  

6) 김영호, 「비엔날레 이데올로기」, 『현대미술학 논문집』 제11호, 현대미술학회, pp.7-45

7) 이용우, “광주비엔날레 인터뷰, 『아트인 컬쳐』, 9월호, 2014. p.139

8) Sabine B. Vogel, 앞의책, p.14에서 재인용된 셀바티코의 아래 선언문 참고 : 'The City Council of Venice has taken on the initiative of this (the exhibition), since it is convienced that art as one of the most valuable elements of civilization offers both an unbiased development of the intellect and the fraternal association of all peoples'

9)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1918-1990)가 정의하는 이데올로기란 “주어진 사회 내에서 역사적 존재에 역할을 부여받은 이미지, 신화, 관념, 개념 등의 ‘재현’이 엄격한 논리에 의해 체계화된 것”이다. 이러한 재현의 체계로서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주장한 상상, 환상, 허위 의식이 아닌 사회적 전체성의 유기적 일부를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아래 에세이에서 그가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종교, 교육, 가족, 법률, 정치, 조합, 커뮤니케이션(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등), 문화(문학, 예술등) 등으로 간주한다. (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1970), 『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역, 솔, 1991, pp.75-130)

10) 1895년 제1회 베니스비엔날레에 참가한 나라는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영국, 벨기에, 폴란드, 러시아 등 8개국이었다.

11)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에 방문객은 6백만이고 28개 국가가 참여했다. (1855년 첫 행사에 이어) 186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는 6백8십만이 다녀갔으며 참가국은 32개국이었고 1878년에 다시 열린 만국박람회에는 천6백만명의 방문객을 기록했다. Sabine B. Vogel, 앞의책 p.17

12) 1851년 런던에서 열린 국제시장(wold fair)이 제작한 수상메달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의 글귀가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 “A community is flouring all over the world”. 위의책 p.17에서 재인용.

13) 2017년 제57회 베니스비엔날레는 국가관 86개국, 병행전시 23개로 지난 회기보다 다소 줄었다.

14) Anthony Gardner & Charles Green, 앞의 책, p.183

15) 1990년대 후반의 성공적 비엔날레 사례로는 김영호의 아래 글 참조 : '제24회 상파울루비엔날레-카니발리즘으로 배양된 브라질문화의 정체성', 『가나아트』 가을호, 1998 / '제24회 상파울루비엔날레-문화식인주의로 조명한 현대미술', 『월간미술』 11월호, 1998 / '제24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역사와 문화의 공존, 복합문화주의에 대한 실천의지', 『미술세계』 11월호, 1998

16) 세계 비엔날레의 창설 년도를 기준하여 랭킹 5위에 속하면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일본작가 위주의 내수용 전시’라는데 혐의를 두고 있으나 평가에 옹색한 면이 있다. 이는 1932년 시작된 휘트니비엔날레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비교된다. 휘트니비엔날레는 휘트니미술관이 매년 개최하는 미국현대미술전인 <휘트니 애뉴얼>로 시작해 1973년부터 2년마다 열리는 비엔날레로 재출범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7) 제10회 도쿄비엔날레는 1970년 5월 도쿄국제미술관에서 개최되었고 쿄토, 나고야, 후쿠오카 등의 도시로 순회전시 되었다. 커미셔너 였던 유수케 나카하라는 수상제도와 국가관제도를 모델로 삼고 있는 베니스와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다. 1960년대의 전통적 회화와 조각의 범주를 넘어선 예술적 접근방식의 다양성을 소개하는 일본, 유럽, 북미의 작가 40명을 선발했다. 포스트미니멀리즘, 아르테포베라, 컨셉추얼 아트, 모노하, 구타이 등 예술의 새로운 경향들을 소개했다. 이들 작품은 인간과 물질, 우주와 시간 사이의 상호 의존성을 광범위하게 탐구하는 공통점을 보여주었다.

18) Sabine B. Vogel, 앞의책, p.37

19) 1966년이 되면 드골 대통령은 미국과 소련의 헤게모니에 대응하여 ‘제3의 전략(Third Way)’을 표방하였고 뒤이어 나토(Nato) 탈퇴를 감행한다.

20) 국가관 운영이나 국가별 전시 운영방식은 주최국의 입장에서 보면 커미셔너나 작가선정 그리고 경비가 초대 대상국의 몫이므로 운영상의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었으며 이점이 지속적인 행사를 위한 하나의 배경이 되고 있다.



비엔날레;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실험실 -2

김영호

비엔날레;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실험실 -2


김영호 (중앙대학교)


Ⅳ. 세계화(Glovalization) 시대의 비엔날레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제미술제는 전 세계적으로 급격히 숫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른바 신생 비엔날레들의 붐은 당대에 심화되기 시작한 세계적 조류의 변동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즉 1989년에 줄이어 일어난 중국의 ‘베이징 천안문 사건’(6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8월), 독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9월)와 함께 동서냉전 체제의 종식을 고하게 되고, 때맞추어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가들이 경제적 부상과 함께 힘의 결속을 과시하고 나섰던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환경의 변화는 결국 그간 지속되어 왔던 서구 지배이데올로기의 퇴조현상을 가속화 시켰고 이른바 문화적 탈중심화 현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20세기 후반을 특징짓는 일종의 시대정신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논리가 국제적으로 확대되면서 제3세계로 분류되어있던 나라들뿐만 아니라 서구의  많은 도시들로 하여금 문화적 정체성을 찾기 위한 실험적 행사를 일으키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1990년대를 아시아 비엔날레의 전성기(Asian Biennialisation)21)라 부르는 것은 비엔날레가 정치사회적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한 아시아 비엔날레들은 기획전시에 정치적 주제를 과감히 내걸고 다양한 부대행사를 통해 담론의 형성에 몰입하게 된다.  

  1980년대에 창설된 주요 비엔날레를 보면 <방글라데시비엔날레>(1981), <아바나비엔날레>(1984), <이스탄불비엔날레>(1987), <나고야비엔날레>(1989) 등이 있으며, 1990년대에 창설된 국제미술제로는 <오사카트리엔날레>(1990), <리용비엔날레>(1991), <타이페이비엔날레>(1992), <아시아태평양트리엔날레>(1993), <광주비엔날레>(1995), <요하네스버그비엔날레>(1995), <상하이비엔날레>(1996), <마니페스타>(1996), <피렌체비엔날레>(1997), <베를린비엔날레>(1998), <부산비엔날레>(1998), <몬트리올비엔날레>(1998), <리버풀비엔날레>(1999), <후쿠오카아시아트리엔날레>(1999), 그리고 공예를 특정 장르로 내세운 한국의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1999) 등을 꼽을 수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 비엔날레의 증가세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지만 각 지역이 문화적 고립을 피하고 지역 예술가들을 국제적인 네트워크와 연대하려는 의욕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2000년대에 등장한 대표적인 국제미술제는 <에치코-추마리트리엔날레>(2000), <미디어시티서울>(2000), <부산비엔날레>(2001), <요코하마트리엔날레>(2001), <광쩌우트리엔날레>(2002), <모스크바비엔날레>(2005), 인도네시아의 <발리비엔날레>(2005), <싱가포르비엔날레>(2006), <자카르타비엔날레>(2006), <아테네비엔날레>(2007)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초반에 문을 연 <방글라데시비엔날레>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상호 우의와 평화를 다지기 위해 수도 다카에서 설립된 미술제인데, 세계 빈민국의 하나로 분류될 정도의 낙후한 경제수준에도 불구하고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행사를 치룰 수 있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비엔날레의 창립 배경을 보면 새로운 군사정권을 유지하는 한편 문화적 교류를 통해 이웃국가들과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겠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지역 그리고 아프리카와 중동의 여러 소수국가들과 연대를 희망하면서 발족한 쿠바의 <아바나비엔날레는> 인종적 차별과 분리주의가 팽배한 국제적 현실의 상황에서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추구하고 인간적 소통의 가치를 위한 대안을 모색한다는 설립 취지를 내걸었다. 터어키에서 개최되는 <이스탄불비엔날레>는 신생 비엔날레의 표본이 되는 국제미술제로 알려져 있으며 작가선정 범위를 40세 이하로 제한함으로서 신세대를 위한 비엔날레로 인정받고 있다. 이 행사에 참여하는 국가는 서유럽과 동유럽의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와 구 러시아 연방국의 작가들이 주가 되었으나 점차 제3세계권의 다양한 작가들로 확대되면서 주변부와 중심, 신체와 정체성 등의 문제의식을 주된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그밖에 나고야 시립미술관과 시립과학관에서 개최되는 <나고야국제비엔날레>는 일본 최대의 테크놀로지 아트 비엔날레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세계 각국에서 저마다 새로운 비엔날레들을 탄생시키면서 이른바 국제미술제의 전성기가 되었다. 1991년에 탄생한 <리용비엔날레>는 동시대의 국제화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미술행사의 하나로 떠올랐다. 프랑스의 남동부에 위치하고 파리에서 450여 킬로 떨어져 있는 리용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형태를 고수해온 프랑스 정부의 정치적 이유로 인해 유럽의 타도시에 비해 소외되어 있었다. 리용 비엔날레의 탄생을 바라보는 시각은 따라서 수도권 중심으로 전개되던 그간의 비엔날레가 지방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는 측면으로 모아져 있다. 즉 최근 비평계에서 거론되고 있는 문화적 탈중심의 구도나 그에 따른 문화구도의 재편성이라는 사안들에 연계됨으로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언론들이 베니스나 카셀에  비교될 만큼 리용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이유는 이른바 지역주의의 팽창과 식민지시대의 종말 그리고 냉전체제의 붕괴에 뒤이은 작금의 미래지향적 문화현상이 리용비엔날레라는 구체적 실험대로 나타났다고 보기 때문이다. 1959년의 파리비엔날레가 베니스비엔날레의 주도적 위상에 대한 대응책으로 탄생해 프랑스와 유럽의 실험적 경향을 대변하다 막을 내렸다면, 리용비엔날레는 파리의 주도적 위상에 대응하고 현대미술의 지역 확산 정책이 만들어낸 하나의 결실이었다. 한편 1995년에 탄생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비엔날레>는 아프리카의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의 역사를 예술로 치유하고 문화예술제를 통해 흑인사회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목적에서 창립되었다. 허술한 전시내용과 연출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수준에 못 미친 행사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 행사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처음을 열린 대규모의 국제미술전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비엔날레의 태동과 관련한 특이 현상은 1997년 지방차치단체로서 전북이 서예를 단일장르로 한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를 출범시킨 이후 단일장르 비엔날레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명시한 1999년의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외에도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대구사진비엔날레>, <창원조각비엔날레> 따위가 그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는 미술계의 시각은 무용론과 예찬론으로 큰 편차를 보인다. 비엔날레가 지자체 고유의 역사적 정체성을 내세워 국제 경쟁력을 갖추게 되고 그 과정에서 지역문화의 발전에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는 예찬과, 비엔날레가 지자체의 홍보수단으로 변질되어 슬로건화된 구호의 미명아래 전시기획과 운영의 전문성이 미숙하다는 비판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비엔날레의 장르화 현상이 심화될 경우 ‘비엔날레를 위한 비엔날레’ 또는 ‘비엔날레의 천국’이라는 오명을 쓸 수도 있다’는 지적은 숙고할 필요가 있다.22)

  2000년대에 들어서도 신생 비엔날레의 탄생은 그치지 않고 줄을 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아시아지역 국가들이 지속적으로 비엔날레 붐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정치적 연대와 문화적 헤게모니의 각축장’이라는 비엔날레의 속성에 기반해 지역의 자연 환경이나 역사적 특수성을 모색함으로서 지역민의 주인의식을 높이고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시기에 등장한 대표적인 비엔날레는 앞서 나열한 바와 같다. 그 중 모스크바비엔날레는 거대한 영토와 다양한 문화를 가진 지역의 비엔날레로서 주목되고 있다. 냉전체제의 와해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소련연방이 새로운 정부와 체제가 들어선 2000년대에 국제현대미술제로서 비엔날레를 전격 도입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Ⅴ. 모스크바비엔날레의 경우

  2005년에 창립된 <모스크바비엔날레>는 모스크바비엔날레 재단이 주최하고 러시아 문화부와 모스크바시 문화과가 후원하는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창립 당시 러시아 문화부장관 알렉산더 소코로프(Alexander Sokolov)는 “현대미술에 대한 지원을 러시아 문화정책의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삼을 것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언론들은 일제히 이 비엔날레가 모스크바를 세계적 문화수도로 부각시킬 것이며 러시아가 지닌 고유의 경제적, 정치적, 지정학적 관심사는 이를 달성하는데 기여할 것이라 보도했다.23)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24)의 교조적 강령 속에 통제되어 온 소비에트연방의 미술정책을 염두에 둔다면 러시아 정부의 차원에서 추진된 현대미술에 대한 지원은 격세지감이었다.

 제1회 모스크바비엔날레는 붉은광장에 자리 잡고 있는 레닌박물관과 모스크바현대미술관, 푸쉬킨국립미술관 등지의 문화시설에서 “희망 변증법(Dialectics of Hope)”라는 주제로 열렸다. 2007년 제2회 모스크바비엔날레는 “지정학, 시장, 기억상실증에 관한 주해(Footnotes on Geopolitics, Markets and Amnesia)'라는 주제를 내걸었고, 5개의 공식전시를 통해 35개국에서 선발된 100명의 작가들 작품이 소개되었다. 2009년 제3회 모스크바비엔날레는 장-위베르 마르탱(Jean-Hubert Martin)이 큐레이팅을 맡았는데 그는 ”배제에 반대하여(Against Exclusion)'라는 주제를 제시했다. 동유럽에서 극동아시아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와 각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융합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져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러시아의 상황에 미루어 흥미로운 주제였다. 

 2013년에 개최된 제5회 모스크바비엔날레는 “더 많은 빛(More light)”이라는 제목을 내세웠다. 본전시는 모스크바 중심가에 있는 마네지(Manege) 중앙전시장에서 개최되었고 큐레이터는 캐서린 데 제거(Catherine de Zegher)25)가 맡았다. 그녀는 이번 비엔날레가 현대사회에서 대두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비활성(We have 'no time', 'non-places')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빛은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비활성을 활성으로 바꾸는 창조적 에너지를 의미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미술은 그 에너지를 생산하고 공유하는 매체로서 기능한다고 설명하였다. 본전시에는 40개국에서 온 72인(팀)의 작가가 참여했는데 러시아 작가들의 참여율은 전체의 15%를 넘지 않은 것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작가들 대다수는 관습적인 공간인식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며 시간의 다양한 상대적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내놓았다. 이외에도 제5회 모스크바비엔날레는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list)와 케이트 파울(Kate Fowle)이 공동기획한 <존 발데사리(Johe Baldessari)>전을 포함한 6개의 특별 초대전과 46개의 특별전으로 구성되어 모스크바시 전역이 비엔날레의 장소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26) 

  6회 모스크바비엔날레는 2015년 가을 베데엔하(VDNH)27)에서 개최되었고 바르트 데 바레(Bart de Baere), 니콜라우스 샤파우센(Nichlaus Schafhausen), 드프네 아야스(Defne Ayas)가 공동 큐레이터를 맡았다. 주제는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How to livre togather)”라 정했는데 비엔날레 주최측은 이 범상해 보이는 질문의 세부사항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예술이 실현하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더 좋은 삶의 원칙들은 무엇인가? 새롭게 재설정된 선거구의 토대는 무엇인가? 국민, 도시, 국가, 제국, 공간속의 우리는 누구인가? 이러한 질문은 1989년 이후 격변하는 정치사회적 상황과 경제적 위기 속에 방황하는 러시아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별초청 작가로는 루이즈 부르주아와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개인전이 개최되었고, 40개의 특별전이 모스크바 시내 각지에서 열렸다.

  제6회 모스크바비엔날레의 특징은 새로운 운영방식의 도입이라는 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10 day event’라는 주제아래 10개의 키노트를 제시해 러시아를 비롯해 각국에서 초청한 대학교수, 학자 그리고 언론인들이 기조연설을 실행했으며 10인의 작가들로 하여금 현장에서 작품을 제작하도록 했다. 또한 5명의 사진작가들이 10일 동안 모스크바의 삶을 다큐멘터로 제작했으며 50개 이상의 퍼포먼스와 영상물 상영 등이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들은 모두 자료화 되었고 10월 1일부터 11월 1일까지 베데엔하의 중앙파빌리온에서 다른 작업들과 함께 전시되었다. 10일의 기간동안 예술은 행동하는 사유의 영역(the sphere of thinking-in-action)이 되었다.  


Ⅵ. 비엔날레의 문화정치학

  이상에서 보듯 비엔날레의 정치적 역할은 비엔날레의 탄생에서부터 뿐만 아니라 모더니즘 시대, 그리고 세계화 시대의 모든 비엔날레 주체들(Institutions)에게 주어진 책무였다. 국제미술제로서 비엔날레는 예술과 정치 사이의 긴밀한 밀월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시대의 문제들에 다양한 전략으로 대응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해 왔다.

  정치가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이라면 비엔날레의 정치는 특정 지역 혹은 특정 국가가 권력을 얻기 위해 문화의 생산과 소비 활동을 전개하는 일이 된다. 비엔날레에 나타나는 문화 권력이 정치성을 강하게 띄게 되는 것은 현대 미술문화의 현전성, 즉 지금 여기를 문제시 하는 속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정권이 바뀌면 미술환경도 바뀌는 것이다. 이는 현대미술이 누리는 무한대의 자유를 민주주의나 자본주의와 분리시켜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는 세간의 평가는 일리가 있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이 정의하는 이데올로기28) 처럼 비엔날레의 주체들은 동시대의 삶을 수용하는 현대미술과 그것이 품고 있는 가치를 확장하는 담론이나 실천적 도전을 통해 권력을 취하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정치적인 것은 개인을 떠나 타자 혹은 공통의 삶과 관계하기 때문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불화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정치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딜레마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정치적인 것은 완성된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발명하는 것이다.”29)는 지적은 문화정치의 딜레마적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현대미술과 정치의 딜레마적 관계에 대한 연구는 신생독립국 싱가포르의 몇몇 지식인들 사이에도 이슈가 되고 있다. 2015년 50번째 독립 기념일을 맞이하여 발표한 글에서 웨른메이 용 에데(Wernmei Yong Ade)와 림 리 칭(Lim Lee Ching)은 “모든 미술이 정치적이며 모든 미술 형식이 정치적 관행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고 전통적으로 예술과 정치를 분리하는 경계를 재구성하는 방법을 조사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30) 이러한 태도에는 정치적 개입이 당파 정치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미적 차원과 미학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임을 주장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혁명기 아방가르드의 딜레마를 경험한 소비에트 미술의 차원에서 보면 이러한 주장을 이해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노릇이 아닐 것이다.31) 현대미술과 정치 사이에 나타나는 딜레마적 속성은 비엔날레의 속성으로 이어지며 그 자체로 부정과 긍정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모더니즘의 시대가 끝나고 세계화 시대가 도래되면서 비엔날레를 둘러싼 정치학은 동시대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다양한 담론들과 연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서구권 지역, 특히 아시아에서 탄생된 비엔날레를 중심으로 그 실험적 노정이 가속화 되었다. 그 사례를 가까운데서 찾자면 바로 광주비엔날레라 할 수 있다.32) 평론가 이준은 현대의 미술제도와 전시에 나타나는 문화정치학적 특성을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정리한 바 있다. 그는 모더니즘시대의 미술제도가 국가의 정책이나 미술관 제도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면 전지구화시대에 와서 비엔날레가 새로운 미술제도로서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되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비엔날레는 서구중심주의의 편향성을 극복하고 전지구화 과정에서 고민해야 할 다양한 과제들을 제시하였고, 그 때문에 짧은 시기에 국제미술계에서 강력한 예술주체로 강력히 부상할 수 있었다.   

  광주비엔날레는 창설 이후 동시대가 주시하거나 요구하는 거대담론들을 비엔날레의 주제로 채택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광주비엔날레가 수용하거나 생산한 담론들은 앞서 언급한 ‘중심주의와 패권주의’, ‘탈중심과 복합문화주의’, ‘글로벌리즘과 지역주의’ 따위의 이념들이었다. 이러한 거대 담론들은 아시아를 비롯한 비서구권 신생비엔날레의 노정을 가늠하는 방향타처럼 채택되었다. 그것은 비엔날레 정치의 이념이자 포스트모던 이후의 새로운 미술기류를 해석하는 원리로 작동하면서 비엔날레의 정치학은 추진되었다.33)

  하지만 오늘날 비엔날레의 정치학은 딜레마에 여전히 노출된 채 도전을 받고 있다. 그 딜레마는 베니스를 기점으로 출발한 모더니즘 시대의 비엔날레 전통에 힘입어 초역사적 형식주의의 프레임 안에 머물러 있는데서 발견된다. 하나의 기관(Institution)으로서 비엔날레는 여전히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적 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조직위원회의 구성, 커미셔너 선임방식, 국가관 제도와 시상제도 따위는 세계화의 물결 앞에서도 비엔날레가 고수하는 전통적 프레임으로 남아 있다. 비엔날레의 주체들은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라는 이중의 목표와 역할을 위해 베니스비엔날레 패러다임을 추종하고 있다. 1930년대 베니스비엔날레가 파시즘의 선전도구로 전락해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었던 전례를 밟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34)

  비엔날레에 나타나는 딜레마는 1980년대 이후 사회적이고 비판적이고 정치적인 경향을 띠게 된 현대미술과도 연계되어 있다. 이는 냉전체제의 붕괴 이후 세계를 획일적으로 재편한 글로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였던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35)을 비롯한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샹탈 무페(Chantal Mouffe),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같은 사상가들의 활동에 연유된 것이다.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과 동시대의 문제에 대한 성찰의 결과로 등장한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 호미 바바(Homi Bhabha)의 탈식민주의나 자크 데리다의  탈구조주의 이론 역시 딜레마의 문화정치학을 파생시키는데 기여했다. 비엔날레의 기획자나 예술가들은 현대사회가 일으키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로서 공동체의 붕괴, 비정규직의 양산 따위의 문제를 자신의 기획이나 작품의 제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나아가 비엔날레가 정치, 인종, 윤리, 정체성, 글로벌화, 탈식민주의와 같은 문제와 씨름하는 플렛폼이 되면서36) 비엔날레가 이끄는 전시담론은 동시대의 사상가들이 내놓은 정치사회학적 이론들과 맥락을 같이하는 경향으로 심화되었다. 비엔날레를 둘러싼 딜레마의 문화정치학은 현대미술제로서 비엔날레가 취해야 할 불가피한 선택이 되었다.

  비엔날레는 세계화의 관점에서 각국의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화두로 삼아 토론과 논쟁을 시도하는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나 세계화는 비엔날레는 전쟁터가 되고 각국에서 모여든 전사들이 전쟁을 치루고 간 터에는 그들이 남긴 지역 정체성과 세계화 논쟁의 화두만이 공허하게 맴돌기도 한다. 조나단 해리스(Jonathan Harris)를 비롯해 세계화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지식인들이 현대미술과 연관된 세계화가 ‘진보적(evolutionary)’이거나 ‘발전적(developmental)’이라 부르기를 주저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37) 2015년 국내의 대표적인 비엔날레들이 내세운 모호한 주제들로서 ‘이성과 감성 사이의 경계 없는 세계’나 ‘혼성체로서의 현재’는 모두가 잡종과 혼성의 상황을 토대로 삼고 있는 현실에 관한 질문이자 불확실성으로 제시되는 미래에 관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엔날레를 둘러싼 정치와 문화적 헤게모니에 대한 논의는 비엔날레의 제도와 이념 등 다방면에 걸쳐 여전히 이슈로 남아 있는 셈이다.        


Ⅶ. 결언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의 전시총감독이었던 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는 비엔날레 본전시의 제명을 “전 세계의 미래(All the World’s Futures)”로 정했다. 그 자신이 언급하고 있듯이 이 주제는 ‘현재 세계적으로 처해 있는 지구촌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방대한 에세이’였다.38) 폭력적인 혼란에 이어지는 경제 위기와 바이러스 성 괴혈병, 사막과 변방에 대한 유럽공동체의 인도주의적 재앙과 수천 명의 절망적인 리비아 이민자들에 대한 발언이었다. 베니스의 아름다운 섬에서 벌어지는 이 풍요로운 파티와 축제의 그늘에 담겨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감에 대해 주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오늘날 비엔날레는 ‘장르와 학제의 경계를 넘나드는 종합적인 문화 쟁의 장치’로 여겨지고 있다. 비엔날레의 주체들은 회화나 조각이라는 기존의 미술 범주를 넘어 국제사회가 직면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이슈들을 주제로 채택하고 논쟁을 벌인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은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막대한 양의 인쇄자료들과 비디오 모니터의 웅얼거림, 그리고 빔 프로젝터가 분출해내는 빛에 노출되어 당황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이 다양한 시각적 장치들의 행간에 숨겨진 의미들로서 폭력, 이념, 권력, 전쟁, 분쟁, 평화 따위의 메시지들을 찾아내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다. ‘장르와 학제의 경계를 넘나드는 낯선 세계’로의 여행은 그 자체가 비엔날레 탐방의 속성이 되었다.

  아시아와 서구의 신생 비엔날레들은 각각 고유한 이념과 방법론을 제시하며 지역 공동체의 결속과 문화적 헤게모니를 주도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자연과 도시의 공생을 모색하기도 하고 생태, 환경, 미디어, 역사 또는 특정 예술장르를 내세워 특화전략을 전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역의 문화적 특수성과 역사적 차별성을 고려하지 않는 일부 비엔날레는 ‘대중의 문화 향수권 신장’이나 ‘지역경제의 활성화’라는 구태한 목표를 내걸어 비엔날레의 위상을 소강상태에 빠트리고 있다. 오늘의 비엔날레가 관광 상품처럼 정형화되고 메뉴의 차별성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은 비엔날레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비엔날레를 둘러싼 문제는 미술행사로서의 기능이라는 측면에서도 제기된다. 과거의 비엔날레는 동시대 미술을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오늘날 비엔날레는 각국에 세워진 현대미술관들이 내보이는 동시대의 실험적 작품들과 큰 차별성을 보이지 않는다. 국제적으로 네트워크를 확대하는 대안공간들은 비엔날레의 역할에 위협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제 관객들은 많은 경비를 들여가면서 각국 비엔날레 현장을 방문하지 않아도 현대미술을 즐길 수 있다. 자국의 현대미술관과 대안공간들이 비엔날레의 기능을 대신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갤러리나 미술시장의 경우에도 현대미술의 실험적 경향들로 채워지고 있는 현실에서 비엔날레의 기능과 역할은 변화를 요청받고 있다.


국문초록 

비엔날레;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실험실    
김영호 (중앙대학교)            

  ‘비엔날레 천국’으로 불리는 우리나라의 경우 비엔날레에 대한 연구는 대학과 학술단체의 관심에 힘입어 왕성하게 진행되어 왔다. 연구주제 역시 다양한 영역들을 아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가령 비엔날레가 지역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에서 관광자원으로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이르기 까지, 도시재생과 디자인에서부터 관람객 연구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비엔날레를 둘러싸고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는 비엔날레의 기능과 역할에 관한 것이다. 비엔날레가 이 원론적인 질문에 당면해 있는 것은 비엔날레의 속성과 존립이유에 대한 본성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비엔날레에 주어진 질문에 답하기 위한 것으로 그 논지를 정치사회학적 맥락으로 정했다. 비엔날레는 무엇하는 곳인가? 이 글에서 주장하는 요지는 비엔날레란 ‘정치적 연대와 문화적 헤게모니의 각축장’이라는 것이다. 
  비엔날레의 정치사회적 맥락이란 비엔날레의 설립과 운영의 배경을 살펴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19세기 후반에 탄생되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 비엔날레는 유럽 모더니즘의 영향 아래 전지구적으로 파급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이르게 되면 비엔날레의 위상은 전과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이른바 냉전체제의 붕괴와 그에 따른 세계질성의 재편은 비엔날레의 탄생과 운영에도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때마침 부상한 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위상과 더불어 비엔날레의 위상도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비엔날레는 국가 혹은 지역간의 정치적 연대에 연관된 것이면서도 동시에 대륙 혹은 국가 각지역의 문화적 위상과 헤게모니 싸움으로 나타나면서 비엔날레의 정치는 보다 치열하고 복잡스런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 글은 비엔날레의 전개양상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두 개의 시기로 구분해 당대에 탄생한 신생비엔날레의 설립 목적과 취지를 정리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비엔날레의 정치사회적 기능에 대한 연구는 비엔날레의 본성에 대한 고찰이자 앞으로 지속될 비엔날레의 향방을 바로잡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이 글의 후반부에서는 2005년에 문을 연 모스크바비엔날레를 사례로 들어 신생 비엔날레에 부여된 역할과 과제를 살펴볼 것이다. 

주제어 
비엔날레, 국제미술제, 정치적 연대, 문화 헤게모니, 문화정치학, 베니스비엔날레, 모스크바비엔날레


Abstrait

Biennale as a Laboratory for Political Solidarity and Cultural Hegemony 

Kim Young-ho  
(Chungang Univ.)

  In case of Korea called 'a heaven of biennales,' the researches into biennales have been very active owing to the increasing concern on the parts of universities and academic institutions. The themes of research have also encompassed a variety of arts genres. For example, the biennales have been discussed widely, ranging from the effects on the local identities to the tourism resources affecting the local economy, and further, from the urban regeneration through the design to the audience. However, the theme that has lately been discussed importantly is about their functions and roles. The reason why the biennales have been facing such an original question is that people require us to introspect their attributes and raison d'etre. This essay designed to answer such questions about biennales was aimed at their politico-social contexts. What do people do at biennales? This essay argues that the biennales are 'a laboratory for political solidarity and cultural hegemony.'
  Biennales' politico-social context may well be equated with their establishment and operations. Biennales started in late 19th century, but by the 20th century, they would spread world-wide owing to the European modernism. By the late 1980s, however, they would feature quite a different topology than before. For the collapse of the so-called Cold War system and the reorganization of the international order therefore would affect even the biennales in terms of their birth and operation. Some Asian nations emerged just in time, affecting the topology of biennales. While biennales are closely related with inter-national or intra-regional political solidarity, they feature the struggles among continents or nations or regions for the culural topology and hegemony. In short, the biennale politics has been more fierce and complicated. 
  This essay divides the development of biennales into modernism and post-modernism, and thereby, discusses the purposes and causes of our new contemporary biennales. Any research into the politico-social functions of biennales would involve a discussion of their nature as well as a new alternative for the direction for their future. The latter part of this essay would discusses the roles and challenges facing a new biennale or Moscow Biennale open in 2005.
 
Keywords 
Biennale, International Art Festival, Political Solidarity, Cultural Hegemony, Cultural Po;itics, Venice Biennale, Moscow Biennale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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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비엔날레 http://www.labiennale.org
상파울로 비엔날레 http://www.bienal.org.br
카셀 도큐멘타 Info@documenta-de
인도 트리엔날레 http://www.pio.gov.cy
시드니 비엔날레 http://www.biennaleofsydney.com.au
휘트니 비엔날레 http://www.whitney.org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http://www.museennrw.de
이스탄블 비엔날레 http://www.iksv.org
나고야 비엔날레 http://www.lelab.fr/
아시아 태평양 트리엔날레 http://www.apt3.net
광주 비엔날레 http://www.gwangjubiennale.org
요하네스버그 비엔날레 http://sunsite.wits.ac.za/biennale/welcome.htm
마니페스타 http://www.manifesta.org  
플로렌스 비엔날레 http://www.florencebiennale.org/en
베를린 비엔날레 http://www.berlinbiennale.de  
몬트리올 비엔날레 http://www.ciac.ca
후쿠오카 트리엔날레 http://faam.city.fukuoka.jp 
에치고-추마리 트리엔날레 http://www.artfront.co.jp/art_necklace/jp
부산 비엔날레 http://www.busanbiennale.org/
요꼬하마 트리엔날레 http://www.jpf.go.jp/

(출처 : 현대미술학논문집, 제21권 1호, 현대미술학회, 2017, pp.113-149)

21) Anthony Gardner & Charles Green, 앞의 책, p.111
22) 이용우, “한국비엔날레 실태와 문제점”, 경향신문, 2006년 10월 17일자
23) “And finally, this biennale would become the next step in developing the image of Moscow as one of the world's major cultural capitals, as well as to satisfy the very different economic, political and geopolitical interests of Russia.' Sabine B. Vogel, 앞의책, p.97에서 재인용.
24) 1934년 소비에트작가동맹 제1회 대회에서 채택된 예술사조. 규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에 있어어 올바르게 역사적 구체성을 가지고 묘사할 것을 예술가에게 요구한다, 그때 예술적 묘사의 진실성과 역사적 구체성은 근로자를 사회주의정신에 있어서 사상적으로 개조하고 교육시키는 과제와 결부되지 않으면 안된다,”
25) 캐서린 데 제거는 벨기에 코트레이크의 카날미술재단 공동설립자 겸 디렉터로 활동. 캐나다 토론토 온타리오갤러리 디렉터 및 뉴욕 드로잉센터 큐레이터와 디렉터를 거쳐 현재 벨기에 컨트미술관 디렉터로 재직하고 있다.
26) 이훈석, “제5회 모스크바비엔날레”, 월간 아트인 컬쳐, 참조
27) 비엔날레 장소로 채택된 베데엔하는 소비에트연방 50년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공간이다. 전-러시아 전시센터(All Russian Exhibition Center)로 소개되기도 하는 이곳은 소비에트연방에 속해 있는 다양한 민족과 지역의 문화를 한곳에 집중해 종합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조성된 대규모의 공원이다. 최근 모스크바 시정부는 이곳에 대한 대대적 보수 계획을 수립해 미래의 문화재로 활용하기로 결정 했다. 현재 거대한 공원에는 항공박물관, 핵에너지박물관 등의 박물관과 파빌리온들이 들어서 있으며 주말에는 50만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다이나믹한 공간으로 변신했다.
28) 테리 이글턴은 이데올로기를 ‘특정한 사회집단이나 계급에 특징적인 일련의 생각, 지배적 정치권력의 정당화를 돕는 사고, 담론과 권력의 결합, 의식적 사회행위자들이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행동 지향적 신념체계’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 테리 이글턴,『이데올로기 개론』, 여흥상 옮김, 한신문화사, 1994, pp.1-2   
29) 김장언, 『미술과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현실문화, 2012, p.359
30) Ade, Wernmei Yong, Ching, Lim Lee, 『Contemporary Arts as Political Practice in Singapore』, Palgrave Pivot, 2016
31) 이브 미쇼, 『예술의 위기: 유토피아, 민주주의와 코미디』, 하태환 옮김, 동문선, 1999, pp.93-103
32) 이준, 「한국의 미술제도와 전시의 문화정치학–광주비엔날레를 중심으로」, 『기초초형학연구』, 한국기초조형학회 12권 4호 2011, pp.291-303
33) 정준모, 「비엔날레의 정치학 : 광주비엔날레를 되돌아보며」, 『내일을 여는 역사』, 2016년 겨울호, 통권 제65호, 2016, pp.140-160
34) 1930년 베니스에 음악비엔날레가 1932년에는 영화비엔날레, 1934년에 연극비엔날레가 추가로 신설되었을 때 이들을 감독하는 주체는 베니스시가 아니라 이태리 정부의 파시스트였다. 무솔리니의 재무장관이자 경제자문이었던 귀셉 볼피(Giuseppe Volpi)는 비엔날레의 대표(pesident)였다.
35) 리처드 세넷,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조용 역, 문예출판사, 2001(원서1998)
36) 김기수, 「현대미술에서 ‘예술적 형식’과 ‘정치적 공간’의 문제: CMCP 전시를 중심으로」, 『현대미술학 논문집』
제18권 1호, 현대미술학회, 2014, pp..8-11
37) Jonathan Harris,  ‘Globalization and Contemporary Art’, Wiley-Blackwell, Oxford, 2011
38) Okwui Enwezor, The State of things, 『All The World’s Future』, Catalogue of 56th Venice Biennale, Marsilio Edition, 2015, pp.1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