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담긴 가치
고서나 족보를 보다 보면 이름 위에 비단 천 조각이 붙어있는 경우를 가끔 볼 수 있다. 이는 조상의 이름을 보기조차 황송하여 가린 조처였으니,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일은 더욱 삼갈 일이었을 터이다. 또한 고서점에서는 장서인(藏書印) 부분이 검게 칠해져 있거나 아예 도려내진 옛 책을 간혹 발견하는데, 후손들이 집안 어른의 이름이 남에게 함부로 읽히거나 불림을 꺼려한 조처였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름은 개인을 나타내는 상징어이자 언어부호이다. 여기에는 직·간접적으로 개인이 속한 집단을 비롯한 민족의 가치관과 세계관 등이 녹아 있다. 예컨대 가족, 종족, 종교, 국가 등 다양한 문화가치를 담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수명천고(垂名千古)’, ‘만고유명(萬古留名)’등의 어구를 만들어 이름에 의미를 부여해 왔다. 즉 이름이 한 사람이 살아가는 시대뿐 아니라 그 이름 속에 담긴 공과(功過)가 오랜 시간 역사로 남는다는 교훈이라 하겠다. 이와 반대로 ‘취명소저(臭名昭著)’, ‘신패명렬(身敗名裂)’과 같은 부정적 의미의 성어도 있는데, 자신의 이름에 오점을 남기지 말자는 훈계가 담겨있다. 또한 전근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입신양명 이현부모(立身揚名 以顯父母)’는 자신의 이름을 드날려 부모나 가문을 드러내는 일을 효의 궁극적 가치로 보는 인식을 잘 보여준다. 살아 있는 동안의 영예도 중요하지만, 빛나는 이름이 길이 후세에 전해지기를 더욱 바랐다. 훌륭한 이름을 후세에 전하는 일을 개인사 최고의 이상이자 효도의 최고 순위로 여겼던 인식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생애 최초의 이름을 특별한 이상이 없는 한 사망 때까지 사용한다. 그러나 전근대의 이름은 생애의 여러 주기마다 바꾸어 나가는 방식이 관례였다. 태어나면서 아명(兒名)을 지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관명(冠名)이 주어졌다. 이름을 존중한 동양문화의 관념으로 자(字)를 두어 이름을 대신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여러 별칭을 써서 사람의 인격을 대신했는데, 아호(雅號)·당호(堂號)·별호(別號)·택호(宅號) 등이 그 예이다. 또한 사후에는 시호(諡號)를 두어 죽은 이에게 인격과 공과의 의미를 부여했다.
인장, 존재를 증명하는 도구
인장(印章)은 ‘개인과 집단의 표식으로 삼기 위해 단단한 물체에 문자를 새겨 증명하는 도구’ 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인장은 같은 의미를 갖는 ‘인(印)’과 ‘장(章)’이 결합된 합성어로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두 글자 모두 오랜 시간을 통해 관인(官印)과 사인(私印)을 포괄하는 용어로 정착했다. 문자가 생겨난 이래 여러 기록 매체들이 등장하고 사라졌지만 인장의 가치와 의미는 현재까지 유효하다. 또한 서명(署名)과 함께 믿음을 증명하는 도구로서 법적인 효력을 가진다.
인장은 문자를 역상(逆像)으로 제작하여 찍어낸다는 측면에서 활자와 유사하지만 기원은 활자보다 앞선다. 인쇄술이 탁본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지만 표면에 안료를 바르고 압력을 이용해 찍어내는 방식이나, 문자를 거꾸로 제작한다는 점에서 인장이 좀 더 유력한 모태로 여겨진다. 따라서 인장의 제작과 사용은 인쇄술의 기원보다 앞선다 하겠다.
인장의 기원은 기원전 약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둥근 인장의 몸통에 무늬를 새기고, 이를 진흙에 굴려 요철을 만든 방식이 시초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원통형 인장 이후로도 인장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다. 고대 이집트의 풍뎅이 모양 인장, 고대 인도의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인장, 그리스·로마에 이은 유럽의 반지형 인장, 태국의 상아로 만든 불탑 인장, 이란에서 발견한 페르시아 제국의 원통형 인장 등 전 세계적으로 각양각색의 인장문화가 있어왔다.
다양한 세계의 인장들이 어떤 경로를 따라 전파되었는지는 규명하기 어렵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첫째, 견고한 물질에 문양이나 글자를 새겨 요철을 만든다는 점, 둘째, 인장을 찍을 때 진흙을 사용하였다는 점, 셋째, 개인이나 집단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한 점, 넷째, 물건이나 문서의 봉인을 목적으로 하였다는 점 등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초기 인장의 모습은 대부분 원통형으로 진흙에 굴려 요철을 만드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인장사의 출발점에 있는 중국의 경우 이러한 사례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인장의 밑면에 새겨 찍는 방식만이 나타난다. 또한 현재까지 인장을 사용하고 있는 나라는 동아시아 3국을 비롯하여 베트남·인도네시아·라오스·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 남아시아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중에서도 인장이 문서나 서화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각(篆刻)이라는 독립적 예술 및 학문 분야로 이어지고 있는 나라는 한국·중국·일본 등에 불과하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한편 우리 시대와 직·간접적 영향이 큰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자신의 이름 외에도 여러 용도의 인장을 제작하여 사용했다. 성명은 물론 자(字), 호(號), 관향(貫鄕) 등을 새겼고, 자신이 좋아하는 경전구절이나 시구를 새겨 인장으로 쓰기도 했다. 또한 서책이나 서화에 자신의 소유임을 밝히기 위한 수장인(收藏印)이 있고, 편지봉투에 봉함의 목적으로 쓴 봉함인(封緘印)도 모두 우리 선조들이 곁에 두고 애용했던 인장들이다.
글. 성인근(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미술·공예 LIBRARY > 미술·디자인·공예 자료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품과 검증된 블루칩에 집중하며 융합형 컬렉션 만든 ‘투톱’ 이건희-홍라희/ 이영란 (0) | 2018.09.10 |
---|---|
가을 보양식, 한 그릇의 추어탕 (0) | 2018.09.06 |
장대일 조각전 (0) | 2018.09.06 |
책 속의 화가전 (0) | 2018.09.06 |
장두건: 삶은 아름다워라!전 (0) | 2018.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