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공예 LIBRARY/미술·디자인·공예 자료집

[스크랩] 한국미술사

sosoart 2019. 2. 12. 13:57

한국 미술사

 

구석기 시대

 

  선사시대 미술은 대체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로 나뉠 수 있다. 구석기 시대 미술은 생명력이 응집된 실제 보이는 것을 그대로 재현한 사실주의 미술이다. 이처럼 사실적인 묘사위주의 그림이 그려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원시공동생활을 이루었던 구석기인들에게 있어서 '사냥'은 생명과 종족을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사냥하는 기술이나 사냥도구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냥은 생명을 건 싸움일 수밖에 없었고 두려움과 공포가 함께 하는 것이었다.  구석기인들은 이러한 두려움과 공포를 이기기 위하여 동굴 벽에 사실적인 사냥감을 그려놓고 창을 찌르는 의식을 치른 후, 다음날 자신감 있고 용감하게 사냥터에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짐승의 그림과 의식에는 다음 사냥이 좀 더 잘 되기를 기원하는 소망도 함께 곁들여 있었다.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는 혈연에 기초한 씨족이 생활의 기초단위가 되었다. 씨족은 공동으로 사냥, 어로, 채집을 하고 함께 나누어 먹었다. 이러한 씨족사회는 평등하였고 생활전반에서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식량공급인 채집, 토기나 옷을 만드는 일들을 비롯하여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종족의 유지와 번식을 위한 출산이 여성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신석기 시대 후기에 인류의 생활을 가장 크게 변화시킨 일은 농경과 목축의 시작이었다. 농경은 인간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었고, 그 변화가 매우 컸기 때문에 농경의 시작을 '신석기 혁명'이라고 한다. 그 변화는 신석기인 들의 의식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들은 사물을 볼 때 점차 현상의 배후에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했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묘사하는 단계를 넘어서 어떤 특정한 양식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인간을 형상화하는데 있어서도 있는 그대로의 모양을 본뜨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지는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빗살무늬토기에 새겨진 무늬들 역시 단순한 장식적인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나 염원을 표현한 것이었다.

  자연의 섭리에 대하여 경외감을 가지고 태양신을 으뜸으로 숭배하고, 사람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내세관과 이를 매개하는 무당과 주술의 힘을 믿는 샤머니즘이 나타났다.     이러한 종교관은 주로 흙으로 빚어 구운 얼굴 모습이나 동물의 모양을 새긴 조각품, 조개 껍데기 가면, 조가비로 만든 치레걸이, 짐승의 뼈나 이빨로 만든 장신구 등을 제작하였고, 이들은 모두 식량의 풍요나 악귀의 축출을 비는 종교적인 필요성에서 만들어졌다.

 

청동기·철기시대

 

  기원전 10세기경에 인류는 필요한 도구를 좀 더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는 재료인 청동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농기구는 농사짓는 법에 큰 변화를 일으켜 많은 양의 생산물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점차 생산량이 많아지면서 잉여 생산물로 인하여 재산을 공동소유 하는 것에서 사유재산제도가 생겨나게 되었다. 신석기 말부터 본격화된 농업의 발달은 계급의 분화를 가져와 족장이라는 지배자 권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족장의 세력과 권위를 나타낸 것이 족장의 무덤인 고인돌이다.   

  신석기 시대에 비해 청동기, 철기 시대는 사회와 경제가 급격히 발전되었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예술 활동도 활발해졌다. 이 시기의 예술은 종교 및 정치적 요구와 밀착되어 있었다. 족장들은 신에게 소원을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청동거울과 청동방울을 흔들며 사람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며, 제사를 주관하였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곧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겨 제사와 정치가 일치하는 제정일치 사회를 이루었다. 이는 당시 제사장이나 군장들이 사용하였던 칼, 거울, 방패 등의 청동 제품이나 토제품, 바위그림 등에 반영되어 있다.

  본격적으로 농사를 통해 많은 양의 곡식을 수확했던 청동기 시대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암각화이다. 그림에는 거북, 사슴, 호랑이, 새 등의 동물과 작살이 꽂힌 고래, 그물에 걸린 동물, 우리 안의 동물 등 여러 가지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청동기인들의 사냥과 물고기 잡이의 성공과 풍성한 수확을 비는 염원의 표현이었다.

  또 다른 바위 그림형상으로는 동심원, 십자형, 삼각형등의 기하학 무늬가 새겨져 있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다른 농업 사회에서의 태양 숭배와 같이 풍요를 비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삼국 시대 4세기 전반-7세기 전반

 

  삼국의 문화는 역사·지리적 차이에 따라 다른 성격을 나타낸다. 거친 산간지대에서 출발하여 중국민족과 항쟁하며 성장한 고구려는 강인하고 웅장한 문화를 키웠고, 나지막하고 둥글둥글한 평야를 끼고 성장한 백제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에 비해 한반도 동쪽에서 비교적 외부와 접촉이 없었던 신라는 토착적인 고졸한 미를 지닌 문화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다양한 삼국시대에는 불교의 수용으로 인한 문화예술에 많은 업적들이 있었다.  

  불교는 삼국이 중앙집권적인 고대왕국으로 발전해 가면서 받아들인 종교이다. 삼국이 강력한 왕국으로 발돋움 하게되자, 이전의 부족 국가 단계에서 벗어난 확대된 국가체계를 통제할 수 있는 관념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삼국은 지배이념으로 불교를 도입함으로서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고구려는 기원전 1세기경 삼국중 가장 먼저 건국되어 중국대륙에서 위세를 펼쳤던 나라이다. 그리고 19대 광개토대왕 시기에 만주 통구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였다. 문화적으로는 만주와 한강유역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여 북방 문화적 요소가 많으며, 중국 화북지방과의 교류와 낙랑 문화와의 접촉으로 인하여 삼국문화의 선도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광대한 지리적 풍토와 외세의 영향을 받아 길러진 활달하고 분방하며 용맹스러운 고구려인의 기상은 그대로 미술에 반영되어, 어느 나라의 미술보다도 힘과 정열이 넘쳤다.

  백제는 고구려와 같은 종족인 부여족의 한 갈래로서 한강유역에서 고대국가로 성장하였으며, 중국 동진에 사신을 보내는등 국제적인 교류 속에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북방적인 것과 중국적인 것, 불교적인 것을 가미한 높은 문화를 형성하였다. 백제는 일찍이 중국의 남조와 해상교통이 열렸으므로 대륙의 감화를 받았고, 남으로는 일본의 아스카시대의 불교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백제의 미술은 부드럽고 모나지 않으며 인간미가 넘치고 세련된 것이 특징이다.   

  신라는 낙동강 유역 진한 12국 중의 하나로 주변소국들을 정복하면서 왕권국가를 이루었고, 7세기 중엽에 백제, 고구려를 정복하여 통일국가를 이룩하였다.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된 지역적 조건 밑에서 독자적인 미술문화를 형성한 신라는 중국의 남조 문화와 고구려, 백제 등과 접촉하면서 다양한 문화하게 발전하였다.

 

고분

  고분의 출현은 삼국 중 고구려가 맨 처음이었다. 고구려의 고분에는 돌무지 무덤(적석총)과 돌방 무덤(봉토 석실분)이 있다. 초기에는 주로 돌무지 무덤이 만들어졌으나 점차 굴식 돌방 무덤이 주류를 이루었다.

  고분에 그려진 벽화는 고구려 지배 귀족층의 세계관과 문화를 다양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그 사회를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이 풍부하다. 특히 다양한 인물풍속도는 풍습, 복식, 건축 양식등 고구려 사회의 생활상과 사회의 변화를 복원시켜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무덤양식이나 벽화 양식은 대략적으로 세 시기로 구분되는데,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의식변화로 이를 나누고 있다.

  초기(4세기-5세기초)의 벽화고분으로는 「안악3호분」과 「덕흥리 고분」으로 무덤 주인의 초상화가 그려져있다. 무덤주인 이외의 하인들과 부엌, 외양간, 마구간 등을 그려넣어 왕이나 귀족이 살던 주택을 재현하고 있다. 이러한 인물들은 신분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는 존대비소尊大卑小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주인공은 신격화되어 표현되었지만 얼굴은 사실적으로 묘사하려고 한 흔적이 남아있다.

  건국 초기 왕권확립과 체제정비의 시기를 지나 장수왕의 평양천도(427년)이후 고구려의 위력은 중국 북방까지 그 위력을 떨쳤으며, 경제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그 영향력이 일본에까지 미쳤다. 중기(5세기-6세기)의 벽화는 초기의 초상화에서 벗어나 풍속도나 묘주인의 평소 생활에 대한 것이 주제로 다루어졌다. 북방 민족적인 기질을 가진 고구려인들을 보여주는 「무용총」의 수렵도는 생동감 넘치는 표현으로 이 시기 대표적인 벽화이다. 사냥하는 모습의 속도감 넘치는 필치나 간결하고 활달한 묘사력 등은 이전 시기의 것보다 현장감이 한층 생생하다. 그밖에 씨름도나 무용도등의 풍속도나 주인의 생활도가 주로 그려질 수 있던 이유는 고구려의 힘이 팽창하는 시기인 당시의 지배층이 현실생활에 대해 강한 자신감과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후기(7세기)의 고분양식은 무덤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다실구조나 다양한 인물 풍속화가 사라지고 단실구조에 무덤의 네 벽에는 「사신도」가 그려지는 전형이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는 중국의 수통일(589년), 당의 통일(618년)등의 정세변화가 고구려에도 영향을 미치게된다. 7세기 전반에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통해 왕권을 누르고 정권을 장악하여 도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후기 벽화의 주제가 되는 상상의 수호신인 사신도는 고구려인의 죽음에 대한 의식의 변화와 도교의 유입과 관련이 깊다. 죽음은 지하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세계로 간다는 의식의 변화는 무덤 내부구조의 간소화를 이루게 된다. 대신 도교의 수호신인 사신은 통해 잦은 전란과 내외적으로 불안한 정세 속에서, 수호신에 의지하여 자신을 보호받고자 하는 당시 지배 세력의 변화된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표현양식은 이전보다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활달한 표현은 고구려 회화의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고분에서 벽화는 그 예가 많지 않은 편이지만 무녕왕릉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공예품들을 통해 백제인들의 예술감각이나 의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남아있는 고분의 사신도에서는 고구려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고구려의 것이 웅장하고 씩씩한 기상을 느낄 수 있는 반면, 백제의 것은 부드럽고 친근함을 느끼게 하는 차이가 있다.

  신라고분의 경우 무덤 양식이 돌무지 덧널 무덤으로 내부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구조로 지어졌다. 무덤 내부의 공간이 없기 때문에 벽화제작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화려한 금관과 같은 금은 세공품이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무덤은 「천마총」, 「서봉총」, 「부부총」 등이 있다.   

  

조각

  삼국시대의 불상은 대체로 중국 남북조시대의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하였다. 고구려의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은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긴 얼굴이나 옷자락이 몸 양 옆으로 날카롭게 뻗어 있는 조각기법 등에서 중국 북조의 북위 불상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백제는 남조와 교류하여 「태안 마애삼존불」, 「서산 마애삼존불」 등의 따뜻한 미소나 자연스러운 곡선에서 한국적인 인간미와 부드러운 조형감을 느낄 수 있다.

  신라의 불상은 고구려, 백제양식에 영향을 받았다. 7세기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불상양식으로 발전하여 미륵신앙과 결합된 반가사유형 보살상이 삼국에 걸쳐 모두 유행하였다.

  삼국시대 불상은 몸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며,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서려있고 입체감이 도드라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같이 온화하고 친근감있는 미감은 삼국이 서로 경쟁하는 정복전쟁의 연속에서 백성들을 고통에서 구원해주는 정복왕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의도하고, 불교를 대중화하기 위한 것이라 추측된다.

 

공예

  고분이나 불교미술은 주로 신앙적인 측면, 중앙권력의 지배권력을 표현한 것이 많은데 비해 토기는 다양한 계층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고구려의 토기는 선이 강하고 진취적인 기상을 보이고 있다. 백제의 경우는 광택이 나는 검은 간토기와 연질토기등이 출토되었는데 느낌이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신라 토기는 굽다리와 목항아리등으로 화려한 권위를 느끼게 한다.

  토우등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목적에서 만들어져 무덤의 부장용으로 쓰였다.  웃는 얼굴, 우는 얼굴, 성기가 과장된 모양등은 당시 민중들의 삶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것으로 고분벽화나 불상처럼 양식화되어 있지 않고 자유로운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벽화나 토우가 사후세계를 위한 것이었다면 공예는 화려한 일상생활을 위한 미술로서 매우 정교한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제작하였다. 「백제금동대향로」나 신라의 무덤에서 출토된  금관, 귀걸이, 목걸이등에서 삼국시대의 금세공기술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다.

 

 건축

  불교전래로 인하여 많은 사찰과 탑들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불교를 널리 전파하여 조성하려는 지배층의 의도와 관련된 사회적 역할을 하였다. 백제의 미륵사지나 신라의 황룡사지같은 대규모의 사찰들은 정복전쟁 시기에 사상통일과 왕권강화를 위한 대규모 건축물이었다.    불교가 중국에서 들어오면서 초기 삼국의 탑들은 중국의 것을 모방하였으나 토착화되면서는 우리의 것으로 다듬어지기 시작하였다. 풍부한 화강암을 재료로 한 석탑이나 목탑등이 만들어졌는데 「미륵사지 석탑」이나 「황룡사 9층 목탑」등이 대표적이다.  

 

 

통일신라 시대 670-935년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수용하고 중국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여 전체적인 문화 수준의 향상을 이루게 되었다. 통일신라 시대의 미술은 삼국 시대에 비해 보다 화려하고 원숙하며 또 국제성이 강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불교가 신라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면서 통일 신라의 미술은 삼국 시대의 고졸함에서 벗어나 세련되고 풍요로워졌으며, 뛰어난 불교 미술품으로 현재까지도 당시의 미적 감각이나 미의식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 시대 미술은 비록 사실적인 기법을 쓰고 있지만, 이는 실물 그대로를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미의 세계를 구현하려는 것이었다. 숙련된 기교로써 이상적인 조화의 미를 창조하려는 것이 곧 통일신라시대 미술의 특징이었다.

 

불상과 탑

  새로운 통치질서의 확립은 이전처럼 단순히 군사력을 강화하고, 제도를 정비하여 전제 왕권을 확립하는 것만으로는 완벽할 수 없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하나로 통합된 백성들이 현실의 신라 사회를 이상향으로 생각하거나, 그들의 힘든 처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으로서 불교는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인과응보나 윤회사상은 백성들에게 현실의 신분질서나 고통은 인과응보에 의해 자신이 전생에 한 것에 대한 결과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기게 하였다. 현실의 고통은 싸워서 극복할 것이 아닌 참고 견디어 열심히 덕을 쌓아 내세에서의 삶에 희망을 걸 수 밖에 없는 것이 백성들을 위한 불교의 역할이었다. 신라의 지배층들은 이런 성격의 불교를 적극 장려하였으며, 이를 위해서 절과 불상, 탑들을 세우게 하였다.

  또한 삼국의 통일은 새로이 수용되는 여러나라 문화의 수용과 중국 당나라, 인도, 서역과의 교류로 불교미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석굴암 불상」은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에서 발달한 불상양식이 신라적으로 수용, 변형되어 한국적 특징이 잘 나타나있다. 특히 석굴암 불상들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숭고미와 완벽한 조각기술은 뛰어난 예술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신라후기에 들어서면 불상과 탑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불상에서는 석굴암의 본존불과 같은 이상화된 모습은 사라지고 권위적인 표정, 화려하고 장식적이면서 균형미가 흐트러진 탑들이 만들어진다.

 

건축

  통일을 이루고 난 후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사천왕사」, 「고선사」, 「감은사」, 「불국사」등 활발한 사찰이 조영된다.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창건한 것으로, 토함산을 배경으로 넓게 트인 앞을 내려다 보고 세워졌는데, 석조물과 기단은 지금까지 남아 있어 신라 불교 예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불국사」는 3개의 영역으로 구성되는데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이 그 중심건물이다. 이들 각 영역은 이상적 피안세계인 불국을 형상화한 것으로 불교적 해석에 의하면 대웅전 영역은 석가여래의 피안세계를, 극락전 영역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그리고 비로전 영역은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를 나타낸다고 한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석가, 다보의 두 탑이 마주하고 있어 이탑식 가람배치의 구성을 하고 있다.

 

공예

  범종은 사찰의 종루에 걸어놓고 당목으로 쳐서 때를 알리거나 대중을 모을 때 사용하는 큰 종으로 불교의식 법구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종은 「오대산 상원사종」과 크기와 형태미를 대표하는 「성덕대왕 신종」등이 있다.

 

 

고려시대 943년-1392년

 

  신라말 민중의 경제적, 정치적 성장을 수용하지 못한 진골 중심의 신라 지배층은 후삼국이라는 세력다툼을 부르고, 결국 고려의 왕건이 신라의 항복을 받고 후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왕실은 지방호족세력과 연합하면서 점차적으로 중앙집권국가를 정비하게 된다. 고려는 신라와 같은 봉건적 신분구조와 귀족 중심의 사회체제는 크게 바뀌지 않았으나 지방문화의 성장은 이전과 다른 고려문화의 특색이다. 고려의 문화는 중앙의 귀족문화, 지방의 유력자들이 향유하였던 문화 할 것 없이, 전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중의 의식을 한층 많이 반영하고 있다.  

   고려태조는 그 자신이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며, 또 불교를 국교로 하고 국력을 기울여 많은 사찰과 탑을 세웠다. 신라의 미술을 계승한 고려의 미술은 근 200년간 불교미술의 발달과 송나라 미술의 영향으로 섬세하고 정교한 귀족적인 미술문화를 남겼다.

  그러나 후기의 270년간에는 밖으로는 몽고의 침략, 안으로는 여러가지 내란 등에 의해 나라안이 편할 날이 없었다. 특히 무엇보다 우리 역사상 큰 타격을 입게 된것은 25대 충렬왕 이후로 고려의 자주력이 줄고 원의 간섭하에 들어간 것이다.  이 시기는 거란·여진·몽고등 북방 민족들의 침략이 잇달았던 혼란한 시국이었다.

  고려미술은 이 시기에 들어 무수한 전쟁 속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집착, 정치적 투쟁의 격정과 원한, 인생에 대한 감상적 정서, 고통 등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들은 현실과 이상을 분류시키고, 예술가의 심리적 경향은 현실 도피로 기울어지고 아름다움에 탐닉해 들어감으로서 예술에 나타나게 되는 경향은 탐미적이었다. 전체적으로 통일적인 힘보다는 개별화되는 개성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입체성보다는 선적인 표현이 두드러져 나타났다.

 

고려 불화

 

  불화佛畵는 불교의 교리를 알기쉽게 압축하여 묘사한 그림으로 불탑이나 불상, 불경 등과 함께 불교신앙의 대상이 된다. 불화는 여러가지 용도로 쓰이지만 크게 장엄하기 위한 단청과 일반 대중에게 어려운 불교의 교리를 알기 쉽게 전달해 주고자 그리는 교화용, 그리고 의식때 예배하기 위한 예배용으로 나뉠 수 있다. 불화의 종류에는 벽화, 탱화, 경화등이 있는데, 벽화는 50-100년정도 지나면 퇴색하여 덧칠을 하게 됨으로써 제작 당시의 모양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기는 거의 어렵다. 현재 고려벽화로서는 부석사의 조사당 벽화가 전해지나 당시의 실상을 파악하기는 어렵고, 약 1백여점 정도 남아 전해지는 두루마리 그림인 탱화와 사경 변상이 당시 고려 회화의 수준을 짐작케한다.  이러한 불화의 대부분은 일본에 소장되어있다.

  불화는 검은 비단에 금이나 은을 수은에 녹여 그림을 그린 것인데, 섬세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불화는 원나라와 결탁하여 권력을 잡고 특권을 누렸던 권문세족들의 주문을 받아 그린 것으로, 권문귀족들의 소원을 빌기 위한 개인용 사찰인 원당에 걸었다. 「아미타래영도」는 서방 극락세계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이 죽은 사람을 극락으로 인도하려고 협시보살인 관음, 세지보살과 마중 나오는 장면이 있다.  아미타여래는 눈의 안광을 죽은 귀족에게 보내 죽은 권문 귀족들을 극락으로 데리고 가는 장면을 그려넣어 권문 세족들의 소망을 간절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관음보살은 수월관음으로 그렸는데 달을 뒷배경으로, 버드나무 가지를 든 관음보살에게 선재동자나 왕, 귀족이 설법을 듣거나 보물을 바치는 것을 그렸다. 관음보살은 천수관음이라고 이야기되듯이 중생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분으로 현세에서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소망하는 권문세족의 바람을 담고 있다.

 「지장보살도」는 지장 보상 독존상이나 지옥 10왕을 대동하고 있는 모습으로. 특히 지옥 10왕을 대동하고 있는 경우를 보면 지장보살에게 죽은 사람의 명부를 고려의 신하가 전해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빠진 중생을 소생시키는 힘을 갖고 있는 구세주인데, 권문세족은 이러한 불화를 보면서 죽은 뒤의 극락왕생을 희구하였다.

  고려시대의 전기에는 호국불교가 성행했던 데에 반하여 후기에는 내세의 구원과 행복을 비는 구복신앙과 관련이 깊은 아미타여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등이 널리 신봉되고 또 자주 그려지곤 하였다.

  불화들 중에서도 1286년 제작된「아미타여래입상」, 동경 천초사 소장의 「양류관음상」, 서구방이 1323년에 그린 「수월관음보살도」등은 고려시대 불교회화의 높은 수준과 독특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그림들은 한결같이 금빛과 채색이 찬란하고 의습과 문양이 정교하며 자태가 단아하여 고려적인 특색을 짙게 풍긴다.

  일본 동경의 천초사에 소장되어 있는 혜허의  「양류관음도」는 현존하는 고려 시대의 불교 회화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의 하나다. 비단 바탕에 아름다운 색을 써서 그린 이 작품은 관음상의 유연하고 곡선진 몸매, 부드러운 동작, 투명한 옷자락, 호화로운 장식, 가늘고 긴 눈매, 작은 입, 섬섬옥수와 가냘픈 버들가지등이 고려적인 성격을 너무나도 잘 드러내 준다. 관음의 이목구비는 물론, 옷자락과 문양 하나하나까지 완벽하리만큼 정교할 뿐만 아니라, 소홀히 다루어진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공예

  호국적 성격을 띠는 불교 국가로서의 고려사회는 교종과 선종의 대립과 조화로 신라와는 매우 다른 성격의 신앙으로 전개되어 미술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왕실 및 가문과 문벌을 중시하는 고려의 귀족사회는 우아하고 장식적인 공예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전의 신라토기에서 청자로 발전한 것은 도자사에서 혁명적인 일로 고려시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유약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비색이라고 극찬하는 청자의 푸른 빛은, 청자의 태토 속에 있는 철분이 환원기법으로 구워져서 생기는 것으로 청자의 미는 자연을 옮겨 놓은 미였다. 그래서 고려청자를 불교의 선과 무의 깊이를 지니면서 5월 신록, 비온 뒤 푸른 하늘의 미라고 하였다. 순청자의 아름다운 비색은 중기로 가면서 좀 더 독창적이고 고려화된 문양과 기법으로 상감 청자를 만들게 되었다. 상감 기법이 등장하게 된 사회적 배경은 무신집권 이전과 다른 새로운 문화를 모색하고,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주적 문화를 창조하려는 시대적인 분위기에서였다. 또한 이 시대에 발달한 나전기법은 상감기법을 여러 가지 공예품에 응용한 것으로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은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다.

 

건축

  고려 시대의 목조 건축은 주심포양식과 다포양식의 두 계열로 구분되는데 이것은 공포의 형태로 분류한 것이다. 공포란 처마의 무게를 안정되게 받치기 위해 기둥 머리위에 짜맞추어 댄 나무 쪽들을 일컫는 말이다. 현존하고 있는 고려의 건축물로는 주심포계의 경북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충남 예산의 「수덕사 대웅전」 등이 남아있다.

 

  고려 탑은 신라 시대에 비해 전체적으로는 쇠퇴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말기에 원나라의 영향으로 대리석을 이용한 「경천사 10층 석탑」을 세우기도 했다. 그 밖에도 지혜를 밝힌다는 석등과 고승의 유골을 봉안한 석조 소탑인 부도가 많이 제작되었다.

 

 

조선시대 1392년-1897년

 

전기

  권문세족의 특권을 옹호하던 고려는 몰락하게 되고 새로운 지배자층으로 신진사대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새로운 왕조를 세운 이성계와 그를 뒷받침해 준 사대부들은 유교적인 이상정치를 표방하여 고려의 불교와는 다른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취했다. 이는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유교적 신분제도의 확립과 학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기풍의 진작, 특히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성리학에 대한 수많은 선비들의 심도있는 연구는 한국 사상계의 독자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성리학의 중요한 역할은 당시 양반 지배층에 대한 권위의 부여와 농민, 천민층의 억압에 기초한 신분질서의 옹호에 있었다. 성리학은 현실적인 신분적 불평등을 철학적으로 옹호하며 상하, 존비, 귀천의 차이를 불가피하게 인정하고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것, 교화하는 것, 복종하고 공양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하였다.  이러한 유교윤리의 전파를 위해 《주자가례》,《삼강행실도》등의 책들이 왕명으로 간행되어 중앙 관서, 지방 군, 현에 배포되어 유교적인 윤리의 모범으로 장려하였다.  유교윤리는 조선사회 전반에 걸쳐서 일반백성을 지배, 내면화시키는 원리였다.

 

건축  

  조선의 문화는 종교적인 면보다는 현실적이고 직접 생활에 관계된 생활문화가 발달하였다. 유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생활의례에 관계된 것이나 생활 속에서 이용할 수 있는 것, 감상할 수 있는 문화가 중심이 되었다. 이는 종교적인 장엄함이나 화려함보다는 절도 있는 기풍이 중시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양반 중심의 봉건적 국가 질서 성립을 반영하는 것으로 위엄과 권위를 내세우려는 의도가 깔린 건축물과 그에 관련된 것들을 들 수 있는데 「궁궐」, 「종묘」, 「사직단」, 「성균관」등이 대표적이다.

 

회화

  조선의 회화는 고려와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고려의 회화가 불교적 색채를 띠면서 예배나 기원의 뜻을 담고 있는데 비해, 조선의 회화는 주로 양반 사대부들의 감상을 위주로 한 그림으로 그려지면서, 소재가 다양해졌다. 불화에서 보이는 화려함보다는 유교식의 절제와 격조를 내세운 그림들이 선호되었다. 조선초기의 회화는 양반 사대부들의 취향에 맞추어 감상을 위해 그려졌으며 이러한 그림들은 그들이 지향했던 성리학의 지향과 이에따른 중국 화단의 영향을 받았다. 그림은 그린 사람의 신분에 따라 화원 그림과 문인 그림으로 나누어지는데, 조선의 사대부들은 수신과 교양 과목으로 시, 서와 함께 그림도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강희안, 양팽손 등 수준급의 선비화가들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이다.

  도화서는 전문적인 화원들이 모여 그림을 그리는 관청으로 화원들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과 왕족이나 사대부의 감상을 위한 그림을 그렸다. 이는 유교적인 교양을 기반으로 하는 문인이나 궁정의 취향에 맞추어져 있었지만, 화원 개개인의 개성과 능력도 어느 정도 발휘될 수 있었다. 도화서 화원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안견, 이상좌등을 들 수 있다. 안견은 유명한 「몽유도원도」를 그렸는데, 그 소재는 중국의 무릉도원에서 빌어온 것으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 사대부들의 이상향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북송의 곽희파 계통으로 웅장하고 신비스런 느낌의 화풍을 소화하여 나름대로의 일가를 이루어 이후 조선 산수화의 큰 맥을 이루었다. 16세기 초에는 유교문화가 정착되어 안견화풍을 계승하면서 내용과 형식면에서 더욱 조선적인 특성을 지니는 산수화가 그려졌다. 산수화 이외에 주제에 따라 화조, 동물화등의 감상화도 부분적으로 그려졌다.

  또한 기록화로서 초상화와 계회도가 있는데, 특히 초상화는 유교의 조상, 성인숭배와 관련된 것으로 건국 초기 임금의 얼굴인 어진과 공신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초상화 양식에는 전신사조 傳神寫照가 중시되었다. 전신사조란 인물의 겉모습만 그림에 담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인품을 화면에 담아내는것을 말한다. 계회도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특정한 인물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기념하는 그림으로 궁중행사나 국가적인 사건을 주로 그렸다.

 

공예

  분청사기는 청자와 같은 회색 또는 흑회색의 태토위에 백토로 분장하여 회청색 유약을 발라서 구운 자기이다. 조선건국 시기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진취성을 가지고 민중들의 지지를 받던 초기 사대부들의 기상을 엿볼 수 있는 튼튼한 소박함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분청사기는 전국적으로 구워졌는데 고려말 유약의 청색이 부족하여 문양이 살아나지 않게 되어 백토로 분장하게 되면서 분청사기가 구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분청사기는 이후 지배층 내부에서 좀 더 유교적인 격식과 의례를 선호하면서 백자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조선 백자는 사대부 문화가 뿌리내린 성종 연간 이후부터 본격화되어 민중성, 검소함과 소박성을 지닌 분청사기에서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지배층인 사대부의 미의식을 반영하는 백자가 등장하게 된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으로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내느냐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등도 포함된다.

 

후기

  조선후기에 접어들어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봉건 양반사회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농업에서는 이앙법의 보급, 농법의 개량, 농기구, 시비법 등의 발전을 바탕으로 농업 경영상의 혁신적인 변화가 전개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경영형 부농', '서민 지주'가 등장하였다. 생산력의 발달을 통한 민중들의 사회·경제적 지위향상은 궁극적으로 신분질서가 와해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민중들의 경제적인 여유는 그들 나름의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조선후기의 토지개간과 농업기술개발등의 생산력 발달은 농민들의 사회적인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동시에 광범한 농민층이 토지로부터 이탈되어 유리방랑하는 현상도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삼정의 문란으로 상징되는 수취체제의 문란과 더불어 가속화되었다. 이시기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여 소농 경제를 안정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개혁을 구상한 사상이 실학사상이었다.

  이와 같은 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문화·예술적인 면도 새로운 움직임을 보인다. 회화 부분에서는 중국의 것이 아닌 우리의 산수를 그린 정선의 진경산수는 회화사의 새로운 업적을 남겼고, 성장하는 민중의식을 반영하는 풍속화와 민화등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이들은 당시 경제적인 부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나타난 이른바 요호 부민들과 민중들의 사회, 경제적, 의식적 성장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 후기는 전체적으로 봉건사회가 해체되며 민중의 사회, 경제적 지위의 상승에 따른 민중 의식의 성장으로 새로운 문화 양식이 대두하였다.

 

회화

  18세기에는 주자 성리학을 중국으로부터 수용하였으나 후기로 오면서 조선 성리학으로 간주하려는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사상의 흐름이 문화예술 전반에 발현하게 된다. 영, 정조 연간은 문예부흥기라고 일컬어지듯이 화단의 변화, 발전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등 국학과 실학, 애정 소설, 사설시조 등의 문학과 판소리 음악 등 주체적 의식이 싹튼 학문과 예술이 크게 융성하여 한국적 화풍이 보다 뚜렷하게 나타난 시대이다.

  이 시기 유행한 '진경산수화'의 진경眞景이란 말 그대로 실제의 경치를 뜻하는 말로서 단순한 실제경치뿐만 아니라 선경仙境의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진경이란 용어가 새롭게 자주 등장하는 것은 산수 표현의 대상을 중국식 산수화풍을 통해서가 아닌 조선땅에서 찾고 그것을 조선 산수화 양식으로 정형화했음을 시사한다. 물론 실경을 바탕으로 산수화를 제작한 전통은 그 이전부터 있어왔지만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가 절대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는 종래의 관념화된 중국적 양식의 산수화풍에서 벗어나 진정한 의미의 조선산수화로서, 조선 산천의 서정성을 담아내는 예술적 전형을 창출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주자가 꿈꾸었던 무이구곡을 중국이 아닌 우리 땅에서 찾으려고 하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표출하고 있다. 이러한 진경산수화의 발달은 봉건 양반 문화의 성장에 의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진경산수에는 주체적 입장이 분명히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절대적 영향을 받아 온 중국 산수화가 갖는 양식이나 이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여 19세기로 가면서 다시 사대부 문인화의 보수적 성향속에 쇠퇴하는 시대적 한계를 보이게 된다.  18세기 이후 성장한 민중 문화인 장승, 판소리, 산조 음악, 탈놀이등은 지배계층의 위기의식을 고조시켜 문화면에서 보수 반동화된 현상을 보이게 된다. 김정희의 「세한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등 문기와 사의, 정신의 강조는 바로 이러한 조선 사회의 구조적 모순속에서 나온것이다.

  풍속화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생활의 정경을 묘사하여 당시의 삶을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이전까지 회화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던 민중들의 모습이 화폭에 담겨져 있어 성장된 민중 의식의 반영으로 주목할 수 있으며, 전문적인 화가나 사대부의 손에서 독점되어 지배층의 의식을 표현해내던 회화가 서민의 손에 옮겨지게 되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민화民話는 정통적인 화풍의 틀을 벗어나 이념 추구의 감상화가 아니라 조선색이 풍부하여 일상생활 공간을 장식하는 생활화로서 깊은 의미를 갖는다. 그림의 내용은 사대부층의 성리학적 지배이념이 깔린 산수화보다 삶의 정서를 반영하는 그림이나 부귀. 장수, 벽사 邪를 비는 세화와 민간신앙적 그림이 많이 제작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 경제적 변화를 반영하는 소비계층의 확대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장식 그림 등은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기반인 생산력 발전이 만들어 낸 새로운 부민층의 성장과 함께 하는 것이다. 즉 자신들의 자주적 삶을 마련해 보려는 노력 속에서 당시 지배층과 다른 자신들만의 문화를 창조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 회화에는 재미있고 풍부한 내용과 민중적 서정성을 거칠고 자유분방하게 표현하고 있다. 민화는 일반회화보다 묘사의 세련도나 품격이 뒤떨어지지만, 익살스럽고 소박한 형태와 대담한 구성, 현란한 색채로 특징지워지는 양식은 오히려 한국적인 미의식을 강하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공예

  청화백자는 분청사기와 함께 조선시대 도자기의 두 주류를 형성한다. 그러나 분청사기는

조선왕조 중기 이후 자취를 감추고 이후 청화백자가 대종이 되었다. 청화백자는 순도높은 순백의 그릇 표면에 코발트계의 청색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순백자와 마찬가지로 잡물의 함유가 없는 순도 높은 장석계 유약을 씌워 구워 낸 것이다. 조선 전기의 청화백자에는 고려 청자의 형태가 남아 있었으나, 임란 이후의 시기에 만들어진 그릇의 형태는 넓은 어깨의 위치가 내려와 전체 모양이 주珠형에 가까운 양감이 나타나면서 조선 시대 청화백자의 특징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완전히 조선적인 발상과 조형감각으로 제작된 것이다. 또한 일용잡기가 많이 만들어지고, 여기에 서민의 소박한 염원이 표현된 문양이 나타났다.

  고려의 문양이 귀족적이고 장식적이며 정교한 면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조선시대의 문양은 대체로 문양을 그린 필선이 대담하여 회화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소박하고 구수한 멋을 지닌다.   

 

목공예

  조선 시대의 목공예품들은 나무가 지니는 아름다움이 마음껏 발휘되어 있으며, 기능의 섬세함과 조화의 아름다움 또한 완벽에 가깝다. 생활용구로서의 문방구, 가구로서의 반다지, 궤, 소반, 찬장 등 무수한 종류의 목공예는 그 다양성과 합리적인 기능, 장식성이 풍부하며, 하나 하나의 개성이 뚜렷이 살아있다. 정교하고 화려하면서도 아담한 안방에 놓이던 장롱이나 세련되고 문기文氣가 서린 선비들이 사용하던 문방구에서는 절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지고 서민들이 사용했던 목기들에는 질박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장승

  장승은 원시 시대 이래의 토속적인 풍물로 집대, 사목, 신당, 돌무더기, 선돌 등과 함계 세워 외부의 흉액을 막아주고 마을의 풍어나 풍년, 화평등을 불러주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였다. 또한 나그네에게 길을 안내해주는 이정표 구실을 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마을 장승의 표정은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장승은 전문적인 장인이 개인의 예술적 창의력을 동원하여 만든 명품이 아니다. 그 지방에서 나고 자라서 자기 삶의 터전에 애정을 가진 마을 사람들 공동으로 정성들여 제작한 신앙의 대상물이다. 소박한 민중들의 신앙을 보여주는 장승에 표현된 미감은 무형식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다양하다. 민중들의 예술은 개인의 미적 쾌감을 위한 감상용이 아니라 마을의 공공적 목적을 위해 제작되었다. 장승의 얼굴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였으며 조선시대 미술을 다양하고 풍요롭게 장식하였다.

 

근대미술

  19세기 후반은 조선왕조가 해체되는 시기이자 근대를 준비하는 개화기라고 할 수 있다.  외세의 소용돌이속에 우리 민족은 20세기 전반기를 식민치하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근대적 자의식이 형성되어, 근대적인 사상과 혁신적인 자기 정체성을 위해 노력하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외세침략이 강도를 더해가던 19세기 말,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삼아 고유 전통미술의 발흥이 이뤄졌다. 고전성을 등에 업은 장승업의 활발한 활동은 안중식에게 대물림되어 고전적 형식주의 화풍을 이루고 있다. 채용신의 사실적인 인물화는 동시대 위정척사 사상과 이념을 구현하는 것으로 보수 민족주의 미학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대상에 충실한 창작태도와 방법은 한국적 사실주의 초상화를 이루게 되었다.

  한국의 근대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이것은 우리 힘이 아닌 외세에 의한 강압에 의해서였다. 우리의 자주적인 사상이 뿌리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한국의 근현대미술은 일본유학생들에 의해 유입된다. 그러나 이들이 배운 서양미술도 일본을 거쳐 일본화된 미술이었다.  이런 시대적 한계상황속에서도 일본 유학파 작가들의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어 1920-1930년대에는 다양한 양식이 혼합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신고전주의와 인상파 양식이 절충된 아카데미즘, 야수파, 표현주의, 추상미술 등이 우리식으로 변화 수용되어, 보다 자주적인 의식적 각성이 보여졌다. 전통을 계승하려는 한국적 미술, 사회주의 이론에 입각한 무산계급 미술, 향토 미술, 유학생이 중심이 된 전위미술, 선전 중심의 아카데미즘 미술등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회화와 조각

  조선시대의 산수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표현한 이상범, 전통적인 한국적 남종화에 능했던 허백련을 비롯해, 거친 필치의 적묵법을 사용해 진경산수의 금강산을 그린 변관식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새로운 표현 양식으로 창조적이고 독자적인 모습의 화풍을 이루었다.

  1908년 고희동의 동경 유학으로 최초의 서양화가 도입되어 김관호, 나혜석이 초기 서양화를 전개하였으며 야수파적 성향의 이중섭, 두터운 표면의 질감으로 소박한 한국적 정서를 표현한 박수근, 전통적 인상파를 우리의 정서로 해석한 오지호, 한국 근대회화의 추상적 방향을 여는 데 선구자 역할을 한 김환기등이 근대 한국미술에 공헌하였다.  

  한편 조각에서는 한국 최초로 서구적 조각을 시도한 김복진과 이후 현대조각의 도입과 정착에 힘쓴 김종영, 권진규등이 있다.

[출처] 진상용의 서양화

출처 : 월간전시/전시가이드
글쓴이 : exman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