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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사랑을 위하여/ 김성호

sosoart 2020. 4. 29. 23:31


http://www.daljin.com/column/17618

궁극의 사랑을 위하여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원로 조각가 박찬갑은 1965년 첫 개인전 이래 올해까지 5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러 시리즈 작업을 통해서 조각에 천착해 왔다. 1965년부터 1980년까지 인간 존재를 불꽃에 빗대어 탐구했던 <불꽃>, 한국의 문화 정체성을 탐구한 1980년대의 <혼(魂)의 소리>, 1990년대 <아리랑>, 그리고 이러한 연작의 통합을 도모하는 <하늘 새>와 <하늘을 향한 창(窓)>을 통해서, 조각가 박찬갑은 인간 존재와 관련한 조형적 성찰을 거듭해 왔다.    
그렇다면, 그의 이러한 연작들이 공유하는 구체적인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박찬갑의 작품 세계가 일관되게 어떠한 주제를 탐구하고 성찰하는지를 묻는 말과도 연동된다. 그는 시(詩)의 형식을 빈 자신의 작가 노트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 누구인가? / 어디서 왔는가? / 어디로 갈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은 우리에게 후기인상주의 화가 고갱(P. Gauguin)의 한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D'où venons-nous? Qui sommes-nous? Où allons-nous ?)〉(1897)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고갱이 인생 최대의 고빗길에서 창작에 매진했던 것으로,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넘실댄다. 
이 세 가지의 질문은 조각가 박찬갑의 질문과 연동되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하나의 ‘철학적 사유’로 응축되고 이내 “나는 어떻게 살고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삶의 실천’에 관한 문제의식으로 귀결된다. 박찬갑은 이러한 질문에 ‘사랑’이라고 답한다: “나는 / 사랑의 씨앗이며 / 사랑으로부터 왔다가 /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혹자의 말대로 “삶이란 나에게 잠깐 맡겨진 사랑의 선물”인 까닭이다.  
이 글은 고갱이 순차적으로 던진 질문의 순서 위에 박찬갑의 ‘자문자답’을 얹어 놓고 ‘사랑’이라는 화두로 가득한 그의 조각 세계를 두루 살펴보기로 한다. 





II. 인간 - 사랑으로부터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에 대한 박찬갑의 답은 “사랑으로부터”이다. 사람을 표현하는 한자 인간(人間)은 ‘사람 사이’로 풀이된다. 인간이란 단독자 개인으로 사는 존재가 아님을 천명하는 것이다. 뜻이 이렇다면, 둘이 서로를 기대고 있는 형상의 한자 ‘인(人)’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왜 ‘간(間)’이라는 한자를 굳이 병기했을까? ‘인간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죽기에 이르기까지 사회 집단, 즉 ’사람 사이‘에서 존재하는 ‘사회적 인간(social man)’임을 표현하기 위함이었으리라. 박찬갑이 ‘돌로 만든 자신의 인간상’은 이러한 ‘사람 사이’, 즉 사회적 인간을 표현한 것임을 명확히 한다. 다음의 표현은 한 방증이다. “돌사람,  돌사람,  돌사람 / 사이로 / 속삭임이 들려온다.”
‘사람 사이’, 즉 ‘사회적 인간’의 현실계에는 집단 구성원인 주체가 타자와의 사이에서 형성하는 사회적 욕구가 작동한다. 우정, 배려, 존경, 시기, 질투, 미움 등이 그것이다. 박찬갑은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는 한 글에서 이러한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자신이 작업임을 말한다: “나의 작업은 자연의 섭리를 바탕으로 삼는다. 그것은 곧 인간에게 무한한 욕망과 욕구를 절제하는 일이다. 그것이 곧 자유이며 인간 생존의 길이다.” 그렇다. ‘무한한 욕망과 욕구의 절제’는 개체와 개체가 다투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섭리’와 같은 상태를 구현하는데 이른다. 인간이 이 욕망을 절제하지 않음으로써 고도의 문명을 이루었지만, ‘병리로 짓눌린 소외된 인간’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작가는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욕망 절제의 상태의 인간상을 작품으로 제시한다. 작가의 언급을 보자: “하늘로 향해 마음을 열고 서 있는 무애무구(無碍無垢),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직립(直立)된 군상은 인간성 상실 시대를 일깨우는 부동인물군(不動人間群)이다. 고도의 문명(文明)의 발달로 인간적 삶의 본질을 위협하고 우리 시대의 병리로 짓눌린 소외된 인간 모습을 되돌아보려는데 있다.” 
그는 오늘날의 시대를 인간성 상실의 시대로 바라보면서 인간적 삶의 본질을 회복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회적 욕망이 꿈틀대는 그 안에서 ‘사랑’이라는 화두를 제시한다. 그의 언급, “나는/ 사랑으로부터 왔다가 /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은 그래서 우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다. 박찬갑에게 있어 이 사랑은 ‘병리로 짓눌린 소외된 현대인’을 치유할 수 있는 해결책이다. 작가는 다시 질문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에 대한 박찬갑의 답은 여전히 “사랑으로부터”이다.

 


III. 입과 손 - 사랑의 씨앗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박찬갑의 답은 “사랑의 씨앗”이다. 인간이 “하늘의 사랑으로부터” 왔으니 이 땅에서 그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 살다가 갈 일이다.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나’의 복수 ‘우리’가 즐비하다.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단독자 개인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개 다수의 군집 인간상이 등장한다. ‘우리’는 한결같이 사랑을 주었던(주고 있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다. 둥그런 씨앗처럼 보이는 얼굴, 얼굴 아래로 상반신을 예각(銳角)으로 절단하듯이 깎아내린 가슴에는 마치 씨앗처럼 보이는 손 혹은 손들이 있다. 아니! 정녕 그것은 가슴에 품은 씨앗처럼 보인다. 어떤 면에서 품 안에 자리한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다른 명사들’로 확장된다. 
하늘의 사랑을 받아 ‘사랑의 씨앗’으로 태어난 ‘나(혹은 우리)’는 욕망으로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일 자체가 부질없이 보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작가 박찬갑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그는 1989년 한 작가 노트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오늘날의 작가(作家)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유(有)에서 무(無)를 찾아가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그 자체가 위대한 창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 존재로의 탄생 자체가 위대한 창조인 까닭에 더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것은 오늘날 미술가의 사명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박찬갑은 그저 비우기를 행하는 창작을 실천하고자 한다. 비우기의 창작? 그것은 20세기 이래 다른 이들의 작품과 차별화되고 나의 독창성을 찾기 위해 새로움을 찾아 예술적 실험을 마다하지 않는 오늘날의 예술가들에게 던지는 아포리즘(aphorism)이다. 이미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인데 이 안에 무슨 ‘남들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미(美)’가 있겠는가? 가톨릭 성경의 언명대로,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코헬 1: 9-10)
조각가 박찬갑은 이러한 예술가적 소명을 가지고 유(有)의 세계가 아닌 무(無)의 세계를 지향하면서 매우 단순화된 작품 세계를 펼친다. 장식하고 채우길 거부하는 ‘비움의 미학’을 제시하는 것이다. 마치 근대조각의 거장 김종영의 불각(不刻)의 미(美)’가 그의 돌조각 안에서 성취된 듯하지 않은가? 
하늘을 우러러보는 얼굴을 보라! 조각상에 눈은 없되 벌린 입을 통해 ‘하늘로부터의 사랑’을 관객은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벌린 입을 보라! 때로 코가 있기도 하지만, 벌린 입은 대개 얼굴의 이목구비를 단독으로 대신한다. 하늘로부터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인가? 하늘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인가? 하늘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인가? 그의 조각상에 나타난 ‘벌린 입’은 인간이 사랑을 받은 하늘과의 소통을 의미한다. 나아가 그것은 하늘로 열리는 또 다른 커다란 창(窓)으로 조각의 몸체에 발현되기도 한다. 작가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귀 기울여 보자: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 하늘과의 대화로 천진(天眞)의 새날, 오늘 이 순간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며 새로운 나를 찾아 무(無)로 돌아가려는 채찍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가슴 안에 품고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보라! 그것은 두 손이 하나의 손으로 합체된 모양이다. 때로 그것은 사랑의 씨앗처럼 가슴 안에서 막 발아하려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기도하듯 합장한 두 손은 하나가 되고 누군가에게 베푸는 마음처럼 가슴 속에서 발아하는 씨앗은 하나의 상징처럼 그의 조각상 안에서 함께 자리한다. ‘벌린 입’이 ‘사랑의 씨앗에 대한 메시지와 찬양’이라고 한다면, ‘모은 손’은 사랑의 씨앗을 발아시키고 타자에게 전하는 ‘사랑의 적극적 실천’을 상징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박찬갑의 답은 여전히 “사랑의 씨앗”이다.




IV. 발 - 사랑으로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박찬갑의 답은 “사랑으로”이다. 이 땅에서 하늘로부터 받은 사랑의 씨앗을 일구고 살다가 머지않은 미래에 모든 사람은 죽음에 이른다. 욕망에 허덕이다가 죽음을 목전에 둔 이에게 삶이란 끝내 부둥켜 쥐고 놓지 말아야 할 것이지만, 욕망을 비우고 죽음을 대비하는 이에게 삶이란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된다. 그의 말을 보자. “살아 있다는 것이 기쁘고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즐겁고 사랑을 남기고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이렇듯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초연한 그의 태도가 어디서 발원했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의 작가 노트에서 그의 작업에서 우리는 그것이 하늘로 상징되는 ‘절대자에 대한 신앙 혹은 우주적 원리 그리고 자연의 섭리’로부터 왔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개인이 끊임없이 집단과 관계하며 사는 모습을 일컫는 나의 작업은 자연의 섭리를 바탕으로 삼는다”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작가 박찬갑은 집단 군상을 통해 사회적 인간과 나(우리)의 삶을 추적하면서 ‘자연의 섭리’를 조각화하는데 골몰한다. 
자연의 섭리란 무엇인가? 순환(循環)의 비(非)가역적 시간 속에 모든 존재에 주어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자연법칙? 박찬갑은 이러한 자연의 섭리를 한마디로 ‘없음’으로 살피고 있다: “무(無)의 절대치는 자연(自然)인 것이며 마음의 절대치 또한 무(無)인 것이다. 이러한 번뇌(煩惱)가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아닐까?” 그렇다. 혹자의 말대로 ‘삶이란 유한한 시간을 사는 나에게 잠깐 맡겨진 선물’이지 않을까? 
그런데 박찬갑의 글 속에 담긴 무한 자유는 실상 ‘번뇌’ 가운데서 나온다. ‘없음’으로 가려는 자연 의지와 ‘있음’에 거하려는 인간 의지와의 쟁투 속에 나오는 ‘번뇌’는 실존적 인간이 아무리 수련의 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작가는 외려 이러한 ‘번뇌’ 자체를 ‘귀소본능’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 글이 그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고 해설하는데 있어서 주목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번뇌는 나는 누구인가를 매번 성찰하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매우 주요한 화두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인식 속에서 “예술가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데 있어서도 유효한 화두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에서 이렇게 질문해 보기로 한다: “예술가는 누구인가? 예술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술가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글은 박찬갑의 다음 진술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누가 나에게 예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예술이란 생활을 아름답게 하는 정신적인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술이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정해진 사람만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차별을 하지도 않습니다. 만드는 이와 보는 이가 소통하는 과정, 그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세의 삶을 툭툭 털고 일어나 미지의 세계인 내세를 향하여 떠나기에, 그의 조각상에 표현된 인물의 다리와 발을 보면, 아직은 세상에 할 일이 많이 있는 듯 보인다. 두 다리로 반듯하게 직립하고 있는 다리와 발의 자세는 헌재적 의지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물론 그것은 작가의 창작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단하는 필자의 해설일 뿐이다. 필자가 그렇게 보는 까닭은 예술가의 삶은, 모든 이가 그러하겠지만, 현재의 실존적 삶이 어느 무엇보다 더 주요하기 때문이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대우주의 시간 속에서 생로병사의 세월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예술가의 삶은 여전히 미시적 세계일 따름이지만, 그들이 창출하는 예술은 먼 훗날 미시계를 뛰어넘어 거시계를 향하는 담론으로 풍덩 뛰어들 여지가 언제나 가능태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삶의 궁극적 지향점을 말했듯이, 모든 것은 사랑으로 귀결된다. 
자!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박찬갑의 답은 여전히 “사랑으로”이다. 


V. 에필로그 
이제 글을 정리하자. ‘사랑을 준 하늘로, 자연 섭리의 세계’로 향하는 죽음마저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된 조각가 박찬갑의 예술가로서의 삶은 어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까? 타자와의 소통이다. “예술을 하면서 나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즐겁게 소통할 수 있는지를 가장 많이 연구합니다”라는 그의 말은 예술가의 당면한 실존적 활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소통에 있어 어려운 것도 없고, 감상에 있어 차별도 없는 ‘관객과의 소통’,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소통’을 유념하고 있는 원로 조각가가 자신의 작가 노트에서 들려주는 언명은 후배 예술가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박찬갑의 작가 노트에서 선택한 “나는 / 누구인가? / 어디서 왔는가? / 어디로 갈 것인가?”이라는 질문을 통해서 “예술가는 누구인가? 예술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술가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변경해서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그의 작품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사랑으로 시작되고, 사랑의 씨앗으로 유지되고, 사랑으로 종결되는’ 그의 인생관 그리고 ‘사랑과 소통’으로 시작하고 귀결되는 그의 예술관은 그의 작품 세계 곳곳에 투영되어 있다. 
따라서 그가 썼던 “나는 / 사랑의 씨앗이며 / 사랑으로부터 왔다가 /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작가 노트의 진술은 “궁극의 사랑을 위하여” 예술을 불태우는 조각가 박찬갑의 ‘아포리즘’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출전/
김성호,  「궁극의 사랑을 위하여」,  서문, 전시 카탈로그, 2019
(박찬갑展, 2019. 11. 15 ~ 12. 15. 갤러리 MOON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