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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와 실험, 변방의 이단아들/ 윤진섭

sosoart 2020. 5. 22. 12:24

www.daljin.com/column/17902

전위와 실험, 변방의 이단아들

윤진섭

전위와 실험, 변방의 이단아들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내가 한국의 퍼포먼스에 관한 정보를 처음 접한 것은 1971년 이었다. 당시 시골의 한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이었던 나는 독서신문이라는 주간지의 합본호에 실린 해프닝에 관한 기사를 깊은 관심을 가지고 퍽 흥미있게 읽었다. 그것은 제4집단이 행한 <기성 문화예술의 장례식>이란 해프닝이었다. 이 해프닝은 1970년 8월 15일 정오에 서울의 사직공원에 모인 일단의 젊은 전위예술가들이 행한 도전적이며 저항적인 성격의 전위미술이었다.

 

해프닝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본론에서 개진하도록 하겠다. 이 글에서 나는 이제까지 해온 것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한국의 퍼포먼스 역사에 대해 서술할 생각인데, 그것은 내가 겪은 시대를 배경으로 나의 삶에 녹아든 체험들을 진술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술에 대한 나의 취향이랄까 기질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나는 이상(李箱) 김해경(1910-1937)의 문학을 접하고 어렴풋이나마 전위예술에 대해 눈을 떴다. 나의 시골집 서가에는 큰 형수가 시집올 때 가져온 한국문학전집 중 한 권이 꽂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상 김해경의 소설과 시가 실린 책이었다. 1920-30년대에 다다(Dada) 풍의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문학을 추구한 이상은 한국문학사상 전위문학의 선구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나는 ‘오감도’를 비롯하여 ‘날개’로 대변되는 그의 시와 소설을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에 접했다. 그리하여 문학서적을 탐독하고 글을 쓰는 한편,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에 있었던 나는 중학교에 입학을 하자 미술반에 들어가 그림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시기가 한국현대미술사에서 본격적인 전위미술이 출범한 것으로 기록된 1967-8년 무렵이었다. 한국 최초의 해프닝인 <가두시위>가 벌어진 1967년은 1961년에 5. 16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소장이 민정이양기 (民政移讓期)를 거쳐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해였다.

 

나의 기억 속에 이 시기는 그 이전, 그러니까 1960년대 초반 박정희 군사정권이 행한, 화폐개혁과 같은 희미한 기억과 함께 선배들의 경험담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훗날 내가 성장하여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이벤트와 퍼포먼스를 직접 행할 때까지 약 10년간은 책을 통한 정보나 선배들의 체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매개항>이라는 실험적인 사진작품으로 화단에 데뷔한 197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 퍼포먼스 역사는 나의 체험과 정보에 의한 기술(記述)이 가능하다. 즉,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작가적 경험을 필두로 1980년대 후반 이후의 진시기획 경험, 그리고 1990년 이후의 비평가로서의 글쓰기 경험이 녹아든 한국 펴포먼스의 역사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Ⅱ.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Parasite)>이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수상하여 지금 전 세계가 떠들썩하다. 작년 10월에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포즈난에서 독특한 디자인의 <기생충> 포스타를 구해서 그 위에 드로잉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나의 기억 속에 이 기생충은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은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나의 유년기에 한국의 어린이들은 횟배를 많이 알았는데, 이따금씩 마을 앞의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에서 휘발유가 타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아이들은 이 고소한 냄새를 좋아했는데, 어른들은 아이들의 뱃속에 든 회충이 그 냄새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천안 같은 도회지로 미술실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갔다. 그때 눈에 들어온 택시나 기차, 버스 등 각종 자동차들과 사각형 모양의 높은 빌딩들(빌딩이라야 4-5층에 불과했지만), 호화스런 쇼 윈도우 등이 지금 생각하면 신기한 근대성(modernity)의 체험이었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근대성의 전환은 1960년대에 비롯되었다. 1963년에 미터법 사용을 규정, 서서히 정착이 이루어졌으며, 정부는 해마다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한국의 근대성과 관련하여 이 미터법의 실시와 정착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이행(移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밥 한 번 먹을 동안에 걸어서 가는 거리’를 위미하는 ‘한 식경’에서 국제적 표준인 미터(m)와 킬로미터(km)로의 이행은 곧 근대적인 제도의 정착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진적인 서구 행정제도를 비롯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제도와 문물의 도입과 정착이 이루어지기까지에는 해외 박사들의 공이 컸다. 당시 한국의 주요 일간지들은 사회면에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재들을 작은 인물사진과 함께 소개하여 국민들의 교육열을 부추겼다.

 

부패한 자유당 정권을 무너트린 4.19혁명에 뒤이어,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군사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듬해에는 전후 피폐해진 경제를 일으키기 위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 5차에 걸쳐 추진하게 된다. ‘새마을운동’을 구심점으로 수출 100억불 달성과 같은 국가적 차원의 아젠다가 실행에 옮겨졌다. ‘무’동인과 ‘신전’동인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작가들이 [청년작가연립전]을 중심으로 해프닝을 발표한 1967년에는 대망의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이 박정희에 의해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공표되었다.

 

1967년 12월 11일, 당시 중앙공보관 전시실에서 열린 [청년작가연립전] 1) 에 참가한 작가들이 행한 <가두시위> 해프닝과 12월 14일의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보수적인 사회에 전위예술의 새로움과 충격을 주었다.

 

 

Ⅲ.

한국의 퍼포먼스를 논할 때, 자생적인 것이냐, 외국에서 도입된 것이냐 하는 논란이 일곤 한다. 물론 그 단초를 말한다면 서구로부터 유입된 것이 맞다. 그러나 1960년대 한국에서 유행했던 해프닝(Happening)에 대해 언급할 때면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자생성이 강하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경우이다. 나는 이를 가리켜 우스개 소리로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았다”고 쓴 적이 있는데, 이는 물론 장점만을 노린 반농담조의 소리이다.

 

60년대 한국 해프닝의 기수인 정찬승의 회고에 의하면, 자신은 당시 해프닝이란 용어 자체를 몰랐다고 한다. 그 용어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오히려 신문사의 외신부 기자들이었다는 것이다. 해외 정보에 밝다보니 자연 해프닝을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 전위미술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김구림은 자신이 해프닝을 비롯한 서구 전위예술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된 것은 해외의 잡지를 통해서였다고 말한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TIME’이나 ‘LIFE’와 같은 잡지를 통해 해외의 전위미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2)

 

정찬승이나 김구림의 증언은 한국의 해프닝을 논의할 때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당시 김구림은 서울의 명동, 중국대사관 앞에 있던 해외미술서적을 파는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여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어에 익숙하지 못하다보니 도판을 위주로 보게 되었고, 그것이 오히려 독특한 해프닝의 형식을 낳는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가령, 한국의 해프닝에는 앨런 캐프로(Allen Kapraw)의 <여섯 파트로 이루어진 18개의 해프닝(18 Happenings in 6 Parts)>과 같은 칸막이식의 구조를 지닌 해프닝이 없었는데, 이는 한국의 독특한 해프닝의 성격을 말해주는 예이다.

 

1968년에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한강변의 타살>이나 1970년에 서울의 사직공원에서 열린 제4집단의 <기성 문화예술의 장례식>과 같은 일종의 사회적 고발의 성격을 지닌 해프닝들은 당시의 사회현실을 통렬히 풍자하거나 비판하였다.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 3인의 해프너가 벌인 전자는 당시 만연된 국전비리를 고발하는 전위적 형식의 해프닝이었으며, 비단 미술인들뿐만 아니라, 연극, 판토마임, 의상, 영화 등이 망라된 제4집단이 행한 거리해프닝인 후자 역시 사회를 고발하는 해프닝이었다. 이 해프닝에 참가한 멤버들은 거리 행진 중 경찰에 연행, 경범죄로 구류를 살고 이튿날 훈방되었다. 3)

 

 

Ⅳ.

1970년대는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언론 탄압과 인권의 유린이 자행되던 혹독한 시대였다. 김지하의 <오적> 사건이 말해주듯, 사회에 만연한 부정과 부조리는 성실히 살아가는 평범한 서민들에게 정부에 대한 불신감을 안겨주었다. 한편으로는 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 그 열매를 따먹는 시기였지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평화시장의 노동자인 전태일의 분신자살로 대변되는 이 시기 한국사회의 암울한 현실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서울시내의 상업화랑 수가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열악한 수준이었던 미술계에서 첨단의 전위미술 형식인 이벤트(Event)를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무렵에는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상파울루비엔날레와 같은 국제전에서 퍼포먼스가 강세였기 때문에 이를 의식한 한국의 작가들 사이에서 전위미술(avant-garde art)이 인기가 높았다.

 

'Event‘란 이름의 퍼포먼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5년에 백록화랑에서 있었던 이건용의 발표에서 였다. 그는 <실내측정>과 <동일면적> 등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훗날 이건용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논리적 이벤트(Event Logical)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1년 앞선 1974년의 [S.T]그룹 정기전에서 성능경은 전시기간 동안 매일 동아일보 신문지를 벽에 부착한 후 기사를 오려내는 행위를 하였다. 신문이란 매체를 통해 검열의 문제를 제기한 성능경은 모더니즘 일변도의 미술계 상황에서 사회적 이슈를 다룬 작가였다. 그 만큼 이 시기에는 대다수의 작가들이 60년대의 해프닝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약한 사회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1977년, 견지화랑에서 열린 [S.T]전에서 발표한 윤진섭의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We stroke)>은 80년대의 퍼포먼스를 예고한 놀이적 성격이 강한 유목적 이벤트였다. 관객참여를 시도한 이 퍼포먼스에서 윤진섭은 귀틀집을 짓거나 울타리를 만드는 등 삶의 문제를 행위를 통해 제시하였다.

 

 

Ⅴ.

1979년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은 민주화의 봄을 가져왔다. 비록 꽃이 활짝 피지 못하고 단명하였지만,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로 대변되는 3김씨의 시대는 전두환 소장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의 등장으로 인해 단명의 막을 내렸다. 이어서 전두환 장군의 11대 대통령 취임이 이루어졌다. 때마침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 상징하는 경제적 풍요가 일어 군사정권의 통치로인한 암울한 분위기가 가시는 듯 했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은 급기야 1987년 ‘6.29민주화 선언’을 이루어냈다.

 

80년대의 퍼포먼스는 장르의 융합을 통한 예술의 토탈화(Total) 경향을 추동하면서 한국행위예술협회4)를 결성하는 등 조직화되는 추세를 보이기도 했다.

 

1980년대 초반은 70년대를 점유한 단색화(Dansaekhwa) 중심의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이 대립각을 세우던 시기였다. 이러한 정서가 본격적으로 촉발된 것은 1981년에 동덕미술관이 주최한 [현대미술워크숖]전이었다. 모더니즘 진영의 ‘S.T’와 ‘서울80’과 민중미술 진영의 ‘현실과 발언’ 그룹이 초대된 이 전시의 주제는 ‘그룹의 발표양식과 그 이념’이었는데, 이는 80년대 화단의 변화와 전개를 가늠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되었다.

1986년, 아르꼬스모미술관이 주최한 [86행위설치미술제]는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전국의 행위에술가들을 결속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어진 [86 여기는 한국전]은 야외설치와 행위미술이 전국적인 규모로 펼쳐진 축제적 성격의 행사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은 드디어 국제화 시대에 진입하였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치룬 후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은 높아가기 시작했다. 80-90년대 한국 퍼포먼스는 2000년대의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국제적 교류를 위한 전단계로서의 위상을 수립하였다. 60-7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성을 갖추는 한편, 인적 증대도 두드러졌다. 강용대, 김준수, 김재권, 남순추, 문정규, 방효성, 성능경, 신영성, 심홍재, 안치인, 이건용, 이두한, 이불, 이이자, 임경숙, 육근병, 윤진섭, 조충연 등이 이 시기에 활동한 작가들이다. 5) 한편, 이건용, 성능경, 안치인, 윤진섭, 방효성, 김용문, 임택준, 심철종, 한건준, 조충연, 이두한, 박창수, 고상준, 전일국, 김정명, 김명순, 강정헌 등은 [대전행위예술제](1987)에 초대되었다.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이 시기 한국 퍼포먼스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1989년 3월 26일부터 4월 2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89청년작가]전([젊은 모색]전의 전신)에서 열린 퍼포먼스 발표는 재야적 성격이 강한 퍼포먼스가 제도권으로 진입한 첫 사례이다. 따라서 이 행사는 1981년 창립 이래 퍼포먼스 작가를 초대한 첫 전시회이자 마지막 전시가 되었다. 당시 커미셔너인 미술평론가 윤우학은 안치인, 윤진섭, 이두한, 이불을 초대하였는데, 이들은 엄숙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중앙 전시장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두한은 곤로에 꽁치를 굽고, 알몸의 전신에 석고를 바른 뒤 국부에 경광등을 대고 돌아다니는 소동을 부렸다. 최근에 만난 자리에서 이두한은 이 때를 회고하며 당시 몸을 조이는 석고의 압력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공포감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6) 윤진섭은 중앙전시장의 정면에 난 대형 유리창을 향해 180개의 계란을 투척, 행위 드로잉을 행했다. 이불은 몬스터를 연상시키는 기괴한 봉제 의상을 입고 전시장을 누비고 다녔고, 안치인은 요란한 음악에 맞춰 수 백 장의 카드를 뿌렸다. 당시 이 장면이 KBS TV의 ‘문화가 산책’에 소개됐는데, 이 프로를 본 한 국회의원이 이경성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런 게 예술이냐”며 항의를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행위예술 달걀 투척싸고 미술관과 시비」, 『세계일보』, 1989. 3. 30

 

 

Ⅵ.

90년대의 한국 퍼포먼스를 특징짓는 성격은 사적인 담론, 즉 내러티브의 강세와 에이즈를 비롯하여 신체, 젠더, 페미니즘, 홈리스 등과 같은 사회적 주제들과 관련된다. 이는 70년대의 독재정권 시기를 관류한 사회적 억압과 갈등이 해체되면서 집단에서 파편화된 개인으로 이행해 나가는 데 따른 일종의 과도기적 징후로 볼 수 있다. 7)

 

또한 90년대의 퍼포먼스는 청각과 시각적 체험이 강조된 80년대의 퍼포먼스와는 달리, 그로테스크한 미감이나 나르시즘 등 극단적인 개인적 성향이 두드러진 특징을 보여주었다.

 

1999년 12월 31일 밤 10시를 기해 홍대 앞에 있는 씨어터 제로에 한 무리의 행위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난장, 밀레니엄 퍼포먼스 1999-2000]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의 전역에서 온 약 30여 명의 작가들은 순서에 따라 각자 준비한 퍼포먼스를 발표하였다. 내가 기획한 이 행사는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인데, 야유, 개그, 소란, 무질서, 즉흥, 우연이 뒤섞인 ‘난장쇼’였다. 개막 작품은 불이 타들어가는 부채에 적힌 제문을 낭독한 성능경의 퍼포먼스였다. 이승택은 녹색의 대형 포도주 병에 든 막걸리를 관객들에게 따라 주었는데, 손잡이가 달린 병의 주둥이에는 과장되게 묘사한 남성기 모양의 조각이 붙어있었다. 김석환은 하얀 연기가 연신 뿜어나오는 방제용 소독기를 관속에 집어넣은 채 어깨에 둘러메고 수원성을 한 바퀴 돈 다음, 트럭을 타고 서울의 행사장에 도착해서 관을 불태웠다. 그의 퍼포먼스는 20세기의 종언을 맞이하여 구시대의 종식과 더불어 사악한 인간들을 제거하자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2천년대는 한국 퍼포먼스의 국제화 시대로 요약된다. 2000년 서울국제행위예술제(SIPAF)의 창설을 필두로 김백기가 이끄는 코파스(KoPAS) 그룹, 부천의 홍오봉이 창설한 부천국제행위예술제(BIPAF), 문재선이 이끄는 ‘SORO'와 그 확장으로서의 PAN ASIA(Performance Art Network, ASIA/2008년 창설)가 이 시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국제행사 및 단체들이다.

 

김백기가 이끄는 [한국실험예술제]는 2002년에 ‘한국 퍼포먼스 30년’을 테마로 첫 행사를 가진 이래, 홍대 앞을 거점으로 매년 개최하였으며, 제주도로 본부를 옮겨 [제주국제실험예술제]로 명칭을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재선의 PAN ASIA는 2019년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서울의 일민미술관에서 창설 10주년 기념 퍼포먼스 페스티벌을 개최하였다.

 

 

Ⅶ.

한국 행위미술 50주년을 맞이하여 2018년에 대구미술관에서 개최한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 전시 도록에는 행위예술의 뿌리줄기 개념도가 실려 있다. 리좀적 구조를 지닌 이 개념도는 원래 내가 2012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한국의 단색화]전에서 ‘단색화(Dansaekhwa)’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맨 처음 고안한 도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도형의 가운데에 행위예술(Performance Art)이 있고 그 바깥으로 두 개의 원이 퍼져나간다. 가운데 원이 과거, 그 밖에 있는 원이 현재, 그리고 그 밖이 미래이다. 크고 작은 점들을 연결하는 가는 선들이 사방으로 얽혀있는 가운데 선들은 밖으로 뻗어나간다. 그곳은 미래이며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지점이다. 그 곳은 크게 4차 산업혁명이라 일컫는, 현재와 미래가 속한 영역이다. 그 밖에 포진해 있는 점들과 용어들을 살펴보자. 사이보그,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살, 로봇공학, 휴머노이드, 사회적 관계망(SNS), 인공지능(AI) 등등은 현재와 미래의 퍼포먼스가 직간접적으로 만나거나 융합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개념들이다. 과거와는 양상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맞이하여, 퍼포먼스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정립이 요구된다. 이 도형을 통해 독자들은 “오늘의 행위예술이 단순히 예술의 한 장르나 매체가 아니라, 미래에 전개될 ‘행위예술학(Performology)’의 씨앗을 그 안에 품고 있음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8)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와 인종, 문화권을 초월하여 범세계적인 논의와 실행이 필요하다.

 

<ART AND DOCUMENTATION/POLAND>

 

 

ㅡㅡㅡㅡㅡ

1) [청년작가연립전]에 참여한 단체와 회원은 다음과 같다.

‘무’동인 : 최붕현, 김영자, 임단, 이태현, 문복철, 진익상

‘싡전’동인 : 강국진, 양덕수, 정강자, 심선희, 김인환, 정찬승

‘오리진’동인 : 최명영, 서승원, 이승조, 김수익, 신기옥

 

2) 김구림, <해프닝과 이벤트 :1960-70낸대 한국의 행위예술, ACC((Asia Culture Center) , 16-17쪽.

 

3) 제4집단은 무체사상을 이념적 배경으로 삼아 김구림이 주도해 만든 토탈아트 지향의 전위단체였다. 회원은 미술의 정찬승, 연극의 방태수, 의상의 손일광, 판토마임의 고호, 영화의 이익태 등이다. 또한 이들은 대통령에서 ‘대’자를 뺀 통령(김구림), 부령(정창승) 등 정부조직을 풍자하는 직책을 설정하고 지방조직을 갖추는 등 당국을 자극하여 탄압을 받았으나 몇 달 못 가 스스로 해산하였다.

 

4) 1988년에 결성되었다. 초대회장에 윤진섭, 부회장에 한상근(무용), 이두한(미술), 자문위원에 강국진, 김구림, 무세중, 성능경, 심우성, 이건용, 이만방 등이 위촉되었다.

 

5) 나우갤러리 기획의 [예술과 행위, 그리고 인간, 그리고 삶, 그리고 사고, 그리고 소통전](1989.7.7-17)의 참여 작가들임.

 

6) (2018. 3. 20. 이두한과의 대화 중에서

 

7) 윤진섭, 저항과 도전, 전위와 실험-변방의 이단아들 : 한국 행위미술 약사(略史), <한국행위미술 50년 : 1967-2017/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 2018, 대구미술관 도록, 35쪽.

 

8) 윤진섭, 앞의 도록, 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