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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뜻[2012.04] 제주도의 속살, 구럼비 바위 눈물

sosoart 2012. 4. 27. 12:37

 
 제주도의 속살, 구럼비 바위 눈물         최열/ 미술평론가    2012.04
 

그림의 뜻(37)



저 산 넘어 높은 절벽
바람이 분들 무너지며
청송녹죽(靑松綠竹) 푸른 대가
눈이 온들 변하리야
-민요, <절벽>, 김영돈, 《제주의 민요》, 신아문화사, 1993




서귀포시 강정동(江汀洞) 염둔(廉屯) 또는 고둔(羔屯) 마을에 고원(羔園)이라는 이름의 과원(果園)이 있었다. 고둔과원은 용흥동에 예전부터 있던 귤나무 밭으로 조선시대 때 관아에서 조성한 것인데 과원 왼쪽 끝 부분에 왕자구지(王子舊址)라는 표기가 있다. 왕자의 옛 터라는 이 곳은 제주도가 고려에 복속 당하기 전, 탐라의 유적이다. 탐라출신으로 고려왕조에 출사한 영곡(靈谷) 고득종(高得宗 15세기 전반)은 이곳 왕자구지에 집을 지어 명문가의 위세를 과시하기도 했으니 이 왕자골은 탐라인에게 유서 깊은 장소였던 게다.

강정동 일대는 오랜 옛 왕국의 왕성이 있던 곳으로 가래현(加來縣)이란 이름을 지닌 역사의 땅이었다. 강정동은 물이 많고 땅이 좋아 쌀농사가 잘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제일강정(第一江汀)’이라 하였는데 어디 물만 좋아 그랬을까. 군주의 기운이 흐르는 땅으로 천하 제일의 터전이었기에 그렇게 불렀을 게다. 물산이 풍부한 강정동엔 저 가래현의 궁궐과 관청 그리고 남문(南門), 동문(東門)이란 땅이름이 남아있고, 강정동 윗동네 동쪽 들판엔 옥드르라고 해서 감옥터가 있으며 또 강정동에서 동쪽으로 한참을 가서 서홍동에 대궐터가 있고 호근 또는 서호 마을에는 북문터가 있다. 또 강정엔 큰내라고 불렀던 도순천과 악근천이 쌍을 이루어 흐르고 그 동쪽에 396m의 고공산(古空山) 또는 고근산(孤根山)이 있는데 여우가 난다는 뜻의 호근산(狐根山)이라고도 하여 전설을 머금은 채 우뚝한데 아마도 탐라왕성의 진산(鎭山)이 아니었을까 한다. 고근산 서쪽으로 큰내가 있는데 월산마을에는 20m 높이의 바위 절벽에서 떨어지는 엉도폭포 또는 엉또폭포가 아름답다. 엉은 바위, 또는 문이란 뜻으로 한라산 가는 길을 막고 선 바위의 문 같은 폭포라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큰내가 끝나는 해안에 샛벌포 또는 새불포(世佛浦)라는 강정포구가 있어 한 나라가 도읍하기에 아주 적절한 땅이었던 이곳에는 또한 삼성물이라는 못이 있다. 물을 떠다가 삼신할망에게 빌던 신성한 곳이며 탐라왕국 개국 시조인 양(梁), 고(高), 부(夫) 세 성인이 나타난 성소였다. 그런데 정작 삼성혈은 저 제주시에 있으니 겹침이 기이하다. 뿐만 아니다. 강정동 북쪽 하원동에 왕자무덤이 있고 또 왕자묘가 있으며 서쪽 끝 상예동에는 왕자가 귀양살이를 하던 왕자굴과 왕자굴사(王子窟寺)란 절이 있고 더불어 하원동에 거대한 법화사(法華寺) 절터가 있으며 강정 포구 동남쪽으로 왕불덕, 돗부리암, 멧부리암과 같은 아홉 채 초가 절집이 있어 이 곳을 구암비(九庵比)라고 불렀으니 그러므로 이곳이 불교문화의 중심지임을 알겠다.

그림 <고원방고>는 옛 왕자골을 유람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색채, 구도가 눈부시게 아름답다. 제주시 감귤농장을 그린 <귤림풍악>과 더불어 서귀포시 감귤농장을 그린 <고원방고>는 구도의 단순성이나 깔끔함이 돋보이는 걸작이다. 무엇보다 둥근 울타리 안에 줄지어 선 귤나무에 단아하고 빨간 점으로 맺힌 열매가 살아 움직이는데 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앉은 인물이며 왼쪽으로 치우친 네모 칸의 왕자구지에 버티고 앉은 이형상 목사를 둘러싼 악공의 연주 장면까지 더불어 화폭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특히 화폭 상단에 양옆으로 늘어선 17그루의 나무는 텅 빈 공간 배열과 옅은 담채 묘사가 돋보이고 화폭 하단엔 좁은 공간을 밀도 있게 꽉 채운 깃발 행렬에 가옥이 강렬한데 이렇게 상단과 하단이 서로 호응하면서 자칫 담담해질 뻔한 그림에 무게의 변화와 공간의 유동을 부여해 주었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멀고 가까움, 채움과 비움의 멋을 연출 해버렸던 것이다.

이곳 고둔과원에서 아래쪽 해안으로 내려가면 샛벌포(강정포구) 동쪽 해안선을 따라 구럼비 바위가 장엄한 제 모습을 드러낸다. 구럼비 바위 동쪽으로 저 멀리 외돌개가 있는 삼매봉(三梅峰)까지 해안선이 이어지는데 어리석은 자의 눈엔 흔한 바닷가 풍경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구럼비는 까마귀쪽나무를 뜻하는 말로 그 나무가 주위에 많다고 해서 이곳 바위를 구럼비 바위라고 불러 왔다. 구럼비를 아홉 채 암자에 있는 비구니란 뜻의 구암비(九庵比)라고도 하는데 이는 소리가 같아 자연스레 섞어 쓴 것이다. 어느 쪽이면 어떤가. 모두 맞는 말인 것을.

구럼비 바위는 해안을 따라 길이 1.2km 너비 250m로 흙이 굳어 바위가 되었으니 맨발로 걸으면 부드럽고 포근하기 그지없을 뿐 아니라 특히 멸종위기의 야생동물인 붉은발말똥게, 맹꽁이와 희귀종 식물인 층층고랭이 서식지여서 그렇게나 소중한 자연임을 알 수 있다. 올레길이 소문나 그 많은 이들이 걷기 시작한 게 그리 오래지 않았어도 한 번 걸어 본 사람이라면 그 미묘한 감촉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하는 구럼비 바위였는데 어쩌면 이제 다시는 걷지 못할 기억의 길일지도 모르겠다.

2012년 3월 7일 11시 20분 대한민국 해군은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며 바위 서쪽 200m지점을 시작으로 6차례에 걸쳐 폭파를 감행했다. 폭약 터지는 굉음 뒤에 구럼비 바위 속살로부터 흙이 흘러 그 맑은 강정포구가 흙탕물로 변해버렸다. 9일 아침의 일이니 꼭 사흘 만에 흐르는 눈물이야 구럼비 바위가 쏟아내는 눈물이겠지.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