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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뜻-(40)베염굴, 땅의 입술 그 황홀한 지옥 풍경/ 최열

sosoart 2012. 8. 14. 17:29

최열 그림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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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베염굴, 땅의 입술 그 황홀한 지옥 풍경

최열

그림의 뜻(40)

진 베염이랑 진 고냥데레 호로록 긴 배암일랑 긴 구멍으로 호로록
자른 베염이랑 자른 고냥데레 호로록 짧은 배암일랑 짧은 구멍으로 호로록
가시락 불 살랑 늴 죽이레 감져 까끄라기 불 살라 널 죽이러 간다
칼 갈고 도치 갈고 늴 죽이레 감져 칼 갈고 도끼 갈고 널 죽이러 간다
-강숙(康淑), <배암>, 김영돈,《제주도민요연구 (상)》, 일조각, 1965, 377쪽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구좌읍 동김녕리에 이르면 베염굴(金寧窟)이 있는데 650m나 된다. 굴에는 거대한 구렁이가 살고 있었다. 뱀은 무려 300m 길이였는데 굴의 절반이나 되고, 커다란 귀를 가진 기이한 모습이었다. 풍우를 일으켜 농사를 망치는가 하면 주민에게 재앙을 퍼붓는 까닭에 해마다 꽃다운 15살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했다.


19살 젊은 제주판관 서린(徐燐 1494-1515)이 부임해 와서 저 요상한 뱀을 처치하고자 뱀이 처녀를 삼키려고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뱀의 허리를 찔렀다. 죽은 뱀을 불에 태우고 관아로 향하던 중, 등 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구름을 헤치고 죽은 뱀이 추격해 오는 것이었다. 귀가한 서린은 의식불명 상태로 두 해나 앓다가 겨우 22살에세상을 떠났다.


그 베염굴에서 남쪽으로 380m 가면 거멀굴 또는 만쟁이굴이있는데 행정지명에 따라 만장굴(萬丈窟)이라고 부르는 굴이다. 만쟁이굴은 그 길이가 무려 13,422m에 이르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긴 동굴이다. 이곳에는 거대한 거북이가 살고 있어 거멀굴이란 이름을 얻었다. 처음엔 베염굴과 거멀굴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심지어는 제법 멀리 떨어진 조천면 와흘리(臥屹里) 하동(下洞)에 있는 와흘굴이 바로 이 베암굴, 거멀굴과 이어져 있다는 이야기며, 해안 당처물굴과 이어져 있었다는 이야기가 은밀히 흘러다닌다. 또 만약 이 네 개의 굴이 이어져 있었거나 또 이어진다면 상상할 수 없을, 끝도 없이 길고 긴, 바로 저 아득하여 넋마저 빼앗길 황홀한 지옥일까.


김남길이 남긴 걸작 <김녕관굴>에는 굴구일(窟口一), 굴구이(二), 굴구삼(三)이라고 써 놓은 세 개의 굴이 벌린 입인 듯, 뜬 눈인 듯 미묘한 모습을 하고 있다. 땅을 찢어 벌린 듯, 복판에 별천지인양 커다란 구멍 하나를 배치해 두었다. 이로부터 오른쪽으로 붕 떠오르는 듯 솟았고 또 위로 치솟아 반쯤만 보일 듯 말듯 세 번째 굴이 멀리 사라져 가는데 이와 같은 점층구도(漸層構圖)를 구현한 화가의 솜씨가 놀랍다. 화폭 상단은 아름드리소나무가 춤추는 듯 어울리고 굴 입구 위쪽 입술에서 자란 소나무 뿌리가 동굴 천장을 뚫고 들어와 매달린 모습도 신기하다. 굴 밖 빈터엔 이형상 목사 일행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지금은 베염굴(김녕굴)을 막아둔 채 만쟁이굴(만장굴)만 열어두었는데 만쟁이굴도 두 번째 입구에서 거대한 용암 기둥까지 1km만 관람할 수 있을 뿐이다. 그저 열어두면 사람들이 숨을 내뿜어 상처를 입히니 아예 막아버렸다. 사람들은 ‘보존이냐, 개발이냐’를 두고 다투는데 어느 쪽을 골라야 할까. 닫아두면 지금 볼수 없지만 개발하면 그 모습은 사라진다.
어린 시절도 그렇지만 지금도 어둠이 무섭고 뱀도 싫다. 굴은 어둠과 뱀이 섞인 모습이라 지금도 오싹하니까 닫아두면 좋겠다. 보존 때문이 아니라 무서워서 닫아두길 바란다. 옛 사람들 모두 그랬을까. 제주시 삼도동

여성 강숙(康淑)이 부르던 노래 <배암>가락을 들어보면 그랬던 것 같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