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onor Fini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과
나에게 복종하도록 만들려고 노력한다.
레오노르 피니 Fini, Leonor (1908-1996)
양성애자 아티스트인 레오노르 피니 Leonor Fini의 작업은 범주화에 저항한다. 종종 초현실주의와 결합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작업은 매우 개인적인 것으로, 여성에 의해 다스려지는, 신비롭고도 상상력을 일깨우는 세계를 나타낸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아르헨티나 혈통을 가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레오노르 피니는 1908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출생해 이탈리아의 트리스테 Trieste에서 자라났다. 독학한 예술가라고 할 만한 그녀는 십대 시절에 유러피안 박물관 European museums에서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양식을 배우고 트리스테 자료실에서 해부학 책을 보며 미술을 공부했다. 열세 살 무렵에 자료실에 출입하면서 그녀는 삶과 죽음, 부패와 재생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녀의 예술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녀의 그림 속에 보이는 해골과 뼈의 이미지는 덧없는 것과 영원한 것 사이의 긴장감을 드러내고 있다. 자립심과 자신의 직관에 대한 신뢰를 가졌던 그녀는 절친한 친구였던 레오노라 캐링턴 Leonora Carrington과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등 초현실주의 경향에 연관되어 있던 다른 여성 미술가들과 유대를 맺게 된다. 자신의 삶과 예술을 통해 피니는 아름답고 오만하면서 ‘열정에 의해 지배되는’, ‘ 자율적이고 완전한 여성’의 이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많은 구혼자가 있었지만 결혼을 거부했다
. 그녀는 공동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선호했으며 종종 두 남자와 함께 지내기도 했으며, 양성애와 같은 성적 자유를 누리고자 했다. 하지만 피니는 레즈비언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과 다른 여자와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을 명확하게 구별했다. 1982년 휘트니 채드윅 Whitney Chadwick과의 인터뷰에서 동성과의 사랑의 경험을 자유롭게 언급했지만, 레즈비언 정체성을 택하는 것은 거부하면서 “나는 여자이고 ‘여성적인 경험’을 했지만 레즈비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내적인 현실과 외적인 현실을 연결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피니의 강한 전념은 그녀를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앙드레 매종 Andre Masson, 한스 벨머 Hans Bellmer와 같은 초현실주의자들과 함께하게 했다. 1936년 그녀는 파리에서 초현실주의자들과 함께 전시회를 가졌고 이들과 제휴하게 되었다.
피니는 초현실주의의 관념들 중 일부를 공유했으며 충격적인 행동과 극적인 제스처에 대한 비슷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몇몇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녀의 그림을 처음 보고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그녀는 추기경이 입는 빨간 예복을 입고 나타나서 여자의 몸을 전혀 모르는 남자의 옷을 여자가 입는 불경스러움이 좋다고 설명한 것은 그 한 예이다. 하지만 남성 미술가들과의 이러한 제휴는 많은 부분 사회적인 것이었다. 피니는 앙드레 브레통 Andre Breton의 청교도주의나, 남성을 해방시키는 ‘척 하면서’ 여성의 자율성은 존중하지 않는 초현실주의자들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또한 채드윅이 지적하고 있는것처럼 피니는 여성의 이미지를 남성의 욕망에 예속시키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사실상 피니의 작업은 초현실주의의 가부장적 가정에 대한 응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피니는 그녀 자신을, 혹은 다른 여자들을 여성의 힘과 자율성의 이미지로 그림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그녀는 세밀하게 묘사된 현실과 판타지에 의해 고안된 극적 공간을 상징적으로 결합시킨다.
Impossible
<비밀의 향연>, 1964, 캔버스에 유채
형형색색의 접시와 사발, 찻잔과 컵이 진열된 그릇 매장을 거니는 여자들의 눈은 은은히 빛난다. 그녀들의 시선은 그릇의 몸체가 그리는 온유한 곡선과 화사한 빛깔, 매끄러운 광택을 음미하는 동시에 그들이 테두리 짓는 동그랗고 움푹한 작은 공간에 담길 향기로운 음식과 행복한 시간을 상상한다. 멋진 구두가 근사한 장소에 데려다줄 거라고 약속하듯, 그릇은 여성을 유혹한다. 넉넉한 그릇과 아름다운 잔을 마련해두면 삶의 포만감이 찾아오지 않을까 꿈꾸게 한다.
레오노르 피니(1908∼96)의 몇몇 그림에는 그릇(형태의 물체)을 앞에 둔 여자들이 등장한다. 또한 피니의 작품에서 여성은 그 자신이 강력한 영적인 힘을 담은 그릇이기도 하다. 백일몽과 변신 모티브를 즐겨 다루고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등과 교유한 피니를 미술사는 초현실주의 여성 화가로 분류한다. 하지만 본인은 그 명찰을 거절했다. 앙드레 브르통으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 그룹이 성적 욕구의 해방을 주창하면서도 여성혐오증과 동성애공포증을 드러내고 여성 아티스트한테 젊은 뮤즈의 역할만 기대하는 이중성이 그녀의 반감을 샀다. 피니가 그린 여성들은 아마조네스다. 지배적이고 아름다우며 변명을 모른다. 자비를 베풀거나 모성을 표현하는 일은 그녀들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종종 피니의 그림 속 여자들은 남자 없이 에로틱한 유희를 벌이곤 한다.
화가, 문인들과 교류하며 파리 예술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피니는 옷과 치장을 통한 ‘가면놀이’의 달인이기도 했다. 남장을 포함한 독특한 차림으로 각종 모임에 참석했고 파랑, 주황, 빨강, 금색으로 머리를 물들였다.* <비밀의 향연>의 오른쪽 전경에도 풍성한 오렌지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앉아 있다. 붉은 머리와 창백한 피부로 태양과 달의 기운을 한데 품은 여인 앞에는 여성성과 수용성을 상징하는 열 개의 잔이 놓여 있다. 혹시 마법의 약을 제조 중인 마녀일까? 꽃을 닮은 색색의 잔에는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들이 담겨 있을 듯하다. 실을 섞어 베를 짜고 재료를 섞어 풍미를 내는 일, 한 대상에 몰두하기보다 여럿을 엮어 관계를 창조하는 일은 여성의 특유한 재능이기도 하다. 고민에 잠긴 붉은 머리 여성의 뒤쪽으로 벌거벗은 당당한 여인이 들어서고 있다. 그녀의 손에는 분홍빛 구(球)가 들려 있다. 완벽하게 자족적인 형태의 구는, 온갖 변용의 가능성을 뭉뚱그린 우주의 알처럼 보인다. <비밀의 향연>은 여자의 생애를 함축한 일러스트인지도 모른다. 예쁜 잔을 하나둘 모으며 누군가가 채워주기만 기다리다가 어느 날 방문한 여신에게 그 자체로 완전한 수정구를 선물받는 이야기의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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