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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숙 미술-(36)4,000년 세월이 도큐멘타를 감동시키다/ 이성낙

sosoart 2012. 12. 11. 16:18

내마음속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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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000년 세월이 도큐멘타를 감동시키다

이성낙

‘도큐멘타(Dokumenta)’하면 필자에게는 행사 주최지 카셀(Kassel)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원래 현대적 문화 풍토와는 거리가 한참 멀고 생동감이라곤 별로 없는 조용한 ‘시골 도시’가 어느날 갑자기 현대미술이라는 바람을 안고 기적을 일군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1955년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5년마다 아방가르드(Avantgarde) 미술 흐름을 이끄는 메카로 자리매김한 카셀도큐멘타는 올해 13번째로 6월 9일부터 9월 16일까지 100일간의 전시 기간 중 근 90만 명의 세계 미술 애호가들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였다. 이 사실만으로도 카셀도큐멘타가 얼마나 성공한 전시회인지 잘 알 수 있다.


카셀은 오랜 역사를 지닌 전형적이고 고풍스러운 중세 도시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공중 폭격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전후 다시 복구된 독일의 여러 도시 중 하나이다. 1960년대 초 필자가 처음 찾아갔을 때는 ‘조용한’ 도시라는 인상이 강했다. 그처럼 ‘잠자던’ 작은 도시가 지난 나치 독일의 어두운 악몽에서 능동적으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하나로 도큐멘타에 모든 것을 걸었다. 독일 패망의 전흔(戰痕)이 채 가시지 않은 1955년에 이미 오늘의 ‘도큐멘타’라는 세계적인 예술 행사를 개최하기 시작한 것이다.



온 도시가 전시장인 카셀도큐멘타에는 볼거리가 즐비하다. 그중 카셀 행사장을 상징하는 프리데리치아눔(Fridericianum)이라는 고풍스러운 건물을 빼놓을 수 없다. 그곳 2층 전시장에서 필자는 손바닥 크기만 한 멋스럽고 깜찍하기도 한 돌 조각품들의 군상을 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작품이라 필자의 눈에 띄었는지도 모르겠다. 작지만 위엄스럽게 꼿꼿이 앉아 있는 여인을 묘사한 조각품이라기보다 어린아이 장난감 같은 소품이었다. 그런데도 그 소품에서 풍기는 ‘위용’이 예사롭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몸을 굽혀 나란히 진열된 조각품의 설명 명패(名牌)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Baktrische Prinzessinnen? Baktrisch? 무슨 뜻인지 빨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명패에는 기원전 약 2,500년의 조형물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무려 약 4,5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인가?” 그건 또 다른 놀라움이었다. 박트릭(Baktric) 문화재? 그때 문득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남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한때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다가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문화권이라고 어렴풋이 떠오른 기억을,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의 도움을 받아 확인하면서 “박트릭 문화유산을 여기서 보다니!” 순간, 감탄의 소리가 입에서 맴돌았다.


<박트릭의 공주들(Baktrische Prinzessinnen)>이라는 작품은 7개의 작은 석조각 군상(群像)이었다. 얼굴은 하얀색 돌에 모자와 의상은 검은색이나 밝은 밤색의 테라코타를 입힌 조형물처럼 보였지만 실은 두 가지 다른 색의 석재를 혼용한 작품이었다. 소품에 새긴 섬세한 손길이 매우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위풍당당한 모습을 끌어낸 예술적 표현력과 더불어 오랜 옛날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당시 패션 감각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시 기획자는 초현대 미술 전시장에 약 4,000년 된 문화재를 왜 함께 전시한 것일까? 100만 억년 넘는 인류 역사를 감안하면 5,000년의 시공간은 극히 짧은 순간이며 문화 역사라는 시공간에서 시대적 구분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을까?


그런데 필자는 전시 기획자의 의도가 <박트릭의 공주들>의 ‘출처’와 무관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프가니스탄’ 하면 우리는 전쟁에 시달리는 그곳 사람들의 삭막한 참상만을 떠올리는데 익숙하다. 요컨대 그런 우리에게 보내는 일종의 ‘나무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네들도 오랜 문화적 배경을 가진 민족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 의도는 바로 적중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번 카셀도큐멘타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역사적 예술품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로 ‘문화의 힘’을 되새겨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출처: 김달진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