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수 미술칼럼
(84)정탁영과 수묵추상
오광수
정탁영하면 먼저 수묵추상을 떠올리게끔 수묵을 통한 추상의 세계를 생애에 걸쳐 추구해왔다. 그는 다재다능한 편이었다. 동양화가가 갖추어야 할 소양이라고 할 문인화, 서예, 시, 전각, 화론 등 영역을 고루 지니었으며 작은 공예품을 직접 만들 정도의 장인적 기질도 보여주었다. 그가 지난 11월 14일 75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그의 풍부한 재능을 생각하면 아직도 할 일이 많았는데 하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우리나라의 수묵추상은 몇몇 개별적인 작가들에 의해 시도된 바도 없지 않지만 집단적 의식에 의한 일종의 조형운동으로 출발한 것은 60년의 ‘묵림회’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보다 앞선 57년에 출범한 ‘백양회’가 전통적 화풍의 오랜 고식을 벗어나려는 현대적 조형운동으로 기록되긴 하나 형식의 타파에 있어선 어느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비하면 60년의 ‘묵림회’는 동양화의 형식의 타파와 더불어 방법의 혁신을 시도한 최초의 단체로 평가되어진다. 그것이 다름 아닌 내용상에서의 대상성을 벗어나 순수한 조형의 자율성을 구가한 추상세계의 추구였다. 회화가 다루어오던 대상을 화면에서 축출하려고 했을 때 회화 자체로서의 자각이 수반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따르는 혼돈은 치열한 작가의 의식에 의해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많은 작가들이 추상의 세계로 진입하였지만, 혼돈의 와중을 뛰쳐나오지못한 채 사라져갔다.
동양화에서의 추상적 경향을 흔히 사의의 세계에서 그 발현의 근거를 찾고 있으나 형식상에선 서구의 전후미술 특히 뜨거운 추상미술의 감화도 적지 않게 작용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수묵에 의한 방법의 고도한 자기완결성은 기술적인 서양화의 방법과 매체에서 오는 물질적 우위성을 전혀 볼 수 없는 독특한 영역임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다. 그것은 동양의 문화와 정서의 결정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그러기에 체질적인 것이라고도 감히 말할 수 있지 않나 본다. 극동에서만 볼 수 있는 독자한 영역임에도 사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개별적 모색을 떠난 집단적 의식의 운동으로서 전개된 적은 없다. 한국이 유일한 편이다. 이런
현상을 숙고해보면 정통적인 동양정신에 가장 밀착된 것이 한국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이른다. 정탁영은 ‘묵림회’의 창립 멤버로서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때의 정신을 누구보다도 오래 간직하였다.
수묵추상이 도달한 어느 경지
정탁영의 수묵추상은 수묵이 갖는 자연스러운 요체를 가장 적절히 구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종이에 스며들면서 나타나는 잔잔한 여운과 그 속에 잠겨있는 상상의 영역은 “망각속에 묻힌 느낌과 형상들을 찾아내서 즐기고 그 형상들 속에 작가의 마음을 띄워 유영하고 유희하는 것”(김병종)이라고 할 수 있다. 수묵이 잦아드는 속에 언뜻언뜻 떠오르는 미명과 같은 희부연 한 공간의 열림은 시공을 넘나드는 차원임에 다름아니다. 때로 언저리에 가해지는 옅은 색채의 잔흔은 잊어버린 것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을 떠올리게 하여 그 독자의 서정의 세계로 다가가게 한다. 먹과 여백이 어우러지는 깊이의 추상은 그의 수묵추상이 도달한 어느 경지를 말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먹은 맑고 투명하다. 투명 속에 작가독자의 투명한 의식을 추적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작가 스스로가 말한 “보고자하여 보는 것이 아니고 얻고자 하여 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있는 것을 버리고 묻어있는 때를 닦아낼 때 맑고 고요해져서 대천의 세계를 맞고 경무진을 볼 것이다. 곧 무심은 몰아일체가 되어 오가는 만상의 오묘함을 맞이할 것이다”(작가노트)란 경지가 아닐까.
삼가 명복을 빈다.
정탁영(1937.4.28-2012.11.14)
한국화가, 서울대 미대 졸업. 박수근 화백 선양회 및 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 국립현대미술관 작품수집심의 분과위원회 위원, 서울대 미술대학 명예교수 역임
출처: 김달진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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