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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으로 접힌 바깥-이선영

sosoart 2012. 11. 19.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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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으로 접힌 바깥

이선영

전경 강임윤 전(8.23-9.23, 국제갤러리)
풍경 전 (8.31-2013.1.26., 하이트컬렉션)



멀찍이 바라본 광경은 대체로 아름답기 마련이다. 심지어 쓰레기 더미가 가득 쌓인 장면도 추상표현주의 풍의 알록달록한 얼룩으로 보일 수 있다. 매순간 어떤 결판을 내야할 필요성에 의해 구체적 현실과 지지고 볶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면 그만일 뿐인 방관자적 입장은 세상만사가 펼쳐지는 장을 심미적인 광경으로 만든다. 그것이 풍경의 매력 중의 하나이다. 사회가 고정시켜준 좌표라는 비좁은 입지에 머물러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딘가에 확실히 속하기를 원하면서도, 초월적인 여행자의 입장에 서보기를 원한다. 안정감과 속박을 동시에 주는 머무름을 거부하고, 여행만을 계속하기 원하는 사람은 그 대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정주와 유목의 두 가지 장점을 모두 취하기 힘든 유한한 인간의 운명은 비극이면서도 자연 고유의 근본적 평등을 예시한다. 이러한 여행은 쌓기를 통한/위한 전진, 즉 진도 나가기나 발전과는 다르다. 그들의 목표는 없거나 아주 멀리에 있다. 이 정처 없는 여행자들은 목표를 향한 가장 짧은 거리보다는 우회로를 택하고, 그 우회로는 길인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남들이 가지 않는, 또는 가려하지 않는 초행길을 마다하지 않음으로서 또 다른 길을 만들곤 한다. 아웃사이더들이 만들어 놓은 우회로들은, 모두들 같은 목적지에 가장 빠르게 가려는 맹목적 경쟁 때문에 무한히 느려진 여로를 터주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현실을 다시금 보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낯설게 하는 거리감이 필요하다. 생물학자의 현미경, 또는 천문학자의 망원경 같은 이러한 소격의 장치는 예술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형식이다. 이 점에서 풍경은 미술의 다양한 주제 중의 하나가 아니라, 거리두기라는 예술적 고유성의 정점에 있다. 풍경을 가능하게 하는 거리감은 현실도피의 방편일 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한 간격을 설정한다. 화가는 풍경에 속해 있으면서도 풍경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그들의 수단, 즉 그림을 가지고 있다. 국제 갤러리와 하이트컬렉션의 전시는 이 같은 풍경을 전면에 놓는다. 여기의 풍경은 자연의 풍광에 머물지 않고 마음, 동화, 신화, 역사까지 확장된다.

미국과 영국에서 각각 활동 중인 젊은 작가 전경과 강임윤의 작품에서 풍경은 인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변화무쌍한 무대이다. 여기에서 나라는 또 다른 자연은 동화나 신화의 풍경에 스며들어 있거나, 그것과 함께 짜여 있다. 미국에서 태어나 거주하고 활동하는 전경의 풍경화는 캔버스 위에 싸인 한지 위에 펼쳐진다. 한지라는 전통적 재료 위에 수채 물감 등으로 그려진 화면은 동양화 같은 담백함이 있다. 쫙 째진 눈이 영락없는 동양인인, 반나체의 소년 소녀로 캐릭화 된 인물들은, 하늘 또는 물이 연상되는 넓고 푸른 바탕 위에서 따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때로 연결된 갖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낙하산이나 연꽃잎 같은 비슷한 시각상을 가지는 매개물과 더불어 있는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동화적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하지만, 그들의 동화에는 인생의 어두운 모습 또한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천진하기에 더 잔인해 보일 수 있는 잔혹동화이다. 무심한 순진함은 누군가를 고의적으로 함정에 빠트리려는 계획된 음모 못지않은 비극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바람이나 물속에 잠겨 있는 듯, 모든 것이 유동적인 강임윤의 작품은 자연의 외관이 아닌 끝없이 변모하는 자연의 성질을 모사하는 풍경화이다. <이끼 위에 핀 달>, <숲을 삼킨 봄>, <낙엽 속 녹는 우리> 등과 같이 시적인 제목이 돋보이는 작품에서, 풍경에 투사된 마음은 마음이 투사된 풍경과 동격이다. 그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음악과 이야기의 계열에서 자연은 마음을 그리기 위한 바탕 면이 될 뿐이다. 강렬한 색과 붓질이 특징적인 풍경은 구상과 추상, 또는 재현과 추상을,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의 흐름으로 만든다. 서정적인 추상 풍경화라고도 분류할 수 있는 그림에는 알래스카 이누이트 족의 신화와 성경, 강임윤의 작품 영감 받은 영국 작가의 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서사에 내재한 선형적 시간성은 그림이라는 공간적 형식 속에서 해체되어 다성적으로 울려온다. 여기에서는 의미화 될 수 없는 잡음마저도 하모니의 일부가 된다. 서사는 고래, 곰팡이, 눈, 바람, 달, 숲과 계곡 등과 같은 지시적이면서도 은유적인 소재들과 어우러져 중층적인 표면으로 거듭난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요동치는 풍경화이다.

국내외 작가 7명이 참여한 하이트 컬렉션의 풍경 전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나무들의 리듬이 있는 숲의 풍경들이 많다. 숲이라는 공통적인 배경은 각 작가의 개성을 확연하게 구별시켜준다. 널찍한 전시장에 드문드문 걸린 풍경화들은 여러 크기로 뚫린 창문처럼 저편의 풍경들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유리창 너머의 실제 풍경과 달리,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 대신에 칸막이 처진 하나의 공간 속에 세계가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하루에도 여러 계절이 있는 요즘 날씨처럼, 칸막이 처진 현실을 하나씩 접할 때마다 다른 바람, 다른 햇빛, 다른 냄새, 다른 소리를 만나게 된다. 그것들은 하나의 지구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여러 이상향을 지시한다. 자연이라는 사원을 지지해주는 기둥들인 나무 사이로 흐르는 공기는 제각각 다른 느낌이다. 어떤 숲은 천년을 묵은 듯 묵직하고 어떤 숲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생생히 기록한다. 어떤 숲은 보이지 않는 금줄이 처져 있는 듯 사람의 발길을 거부하며, 어떤 숲은 당장이라도 소풍 갈 수 있을 듯 친근하다.

각각의 숲이 주는 느낌의 차이는 계절이나 시간, 장소보다는 풍경을 보는 작가의 시선과 감성이 결정적이다. 각기 뚫려 있는 창들에는 주어진 광경을 다르게 걸러내는 서로 다른 필터들이 끼워져 있는 것이다. 성인의 죽음 같은 극적 서사가 포함되어 있는 헤르난 바스의 <Saint Sebastian>같은 작품을 제외하면, 하이트 컬렉션의 풍경들에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굳이 사건이 있다면, 조형적 어법의 강약을 통해서이다. 한지 위에 목탄으로 명암의 대조를 확실하게 만든 설원기의 풍경에는 산줄기와 나뭇가지를 형태화하는 에너지의 흐름이 각인되어 있다. 문성식의 숲은 엷은 베일을 친 듯 신비로움 속에 잠겨있으며, 엘리자베스 메길의 숲은 태피스트리처럼 표면 질감이 두드러진다. 이호인의 숲은 굵기와 명암이 다른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원근감을 사이로 축축한 공기층이 느껴지며, 다소간 황폐해 보이는 조지 쇼의 숲은 무섭고 기분 나빴던 개인적 기억이 투사된 무대이다. 임동식의 <길 없는 산행>이나 <스쳐 본 풀밭>은 길 없는 길을 걷다가 만났던 바깥의 풍경을 보여준다.


풍경은 안팎이 연결된 뫼비우스 띠처럼, 객관적 대상에서 주관적 감흥으로, 또 그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에너지의 도관을 마련한다. 이 흐름을 막힘없이 최대한 활성화시킬수록, 기계적 재현에 갇혀있는 통상적인 풍경들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양 전시에서 풍경은 안에서 바깥으로의 흐름과 바깥에서 안으로의 흐름이 얽히는 장이다. 서로 다른 흐름이 소용돌이치며 만나 형성 되는 자연의 주름은 반복되지 않는다. 이렇게 무한히 펼쳐지고 접혀지는 주름들 사이로 서사 또한 끼워 넣어진다. 서사는 풍경에 첨가되는 외부적인 것이 아니며, 풍경은 서사의 단순한 물리적 배경이 아니다. 묘사(description) 속에 서사(narration)가 접혀 있고, 서사는 묘사의 생동하는 맥락을 만들어낸다. 묘사의 폭은 서사의 깊이와, 묘사의 규모는 서사의 길이와, 묘사의 밀도는 서사의 강도와 연결된다. 또한 묘사의 복합적 층위들은 서사의 방향성을 결정한다.

묘사와 서사는 공간과 시간의 차원처럼 연동되면서 상보적으로 작용한다. 묘사의 풍경에 섞여든 서사는 개인의 경험과 기억부터 동화와 신화에 이르는 여러 계열을 가진다. 어떤 종류의 서사이든 명확한 플롯이 전제된 선형성은 벗어나 있다. 선형성을 단절시키는 공백은 채워지기를 요구한다. 풍경이 바깥으로 열려 있듯이, 이야기 또한 열려있다. 풍경화 된 이야기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림에 숨겨진 이야기를 추적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 위에 쓰게 한다. 독자(관객)로 하여금 읽기보다 쓰기를 유도하는 것은, 롤랑 바르트가 현대 예술을 작품(work)이 아닌 텍스트로 다시 정의할 때 강조하려던 것이다. 자연은 여전히 거대한 책이지만, 읽기를 넘어 쓰기까지 요구하는 책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입력된 것을 읽게 하기 보다는 자유롭게 쓰게 하는 것에 예술의 창조적인 역할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소비를 위해 코드화 된 문화는 예술과 반대 방향에 놓인다. 양 전시의 풍경들은 소비되는 작품이 아니라, 생산되는 텍스트의 방식을 통해서 코드화 된 풍경들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있다.


출전; 아트 인 컬처 10월호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