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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시이야기] 나의 ‘애인’과 느티나무

sosoart 2013. 2. 14. 21:02

김용택의 시이야기] 나의 ‘애인’과 느티나무 김용택의 시 이야기 2013.02.08

나의 ‘애인’과 느티나무
출근을 할 때도 퇴근을 할 때도 나는 그 여자네 집 앞을 지나가야 했다. 징검다리를 건너 강 길을 갈 때도 있었지만, 그 여자를 본 후 나는 강 길을 택하지 않고 그 여자네 집 앞을 지나다녔다.
이웃 마을에 살던 그 여자는/내가 어디 갔다가 오는 날을 어떻게 아는지/내가 그의 마을 앞을 지날 때를 어떻게 아는지/내가 그의 집 앞을 지날 때쯤이면 용케도 발걸음을 딱 맞추어가지고는/작고 예쁜 대소쿠리를 옆에 끼고 대문을 나서서/긴 간짓대로 된 감 망을 끌고/딸가닥딸가닥 자갈돌들을 차며/미리 내 앞을 걸어갑니다./눈도 맘도 뒤에다가 두고/귀도, 검은 머릿결 밖으로 나온 작고 그리고 희고 또 이쁜 귀도 다 열어 놓고는/감을 따러 갑니다./커다란 느티나무 저만큼 서 있는 길/샛노란 산국이 길을 따라 피어 있는 길/어쩌다가 시간을 잘못 맞추는 날이면/그 여자는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를 높이높이 올라가서는 감을 땁니다./월남치마에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그 여자는 내가 올 때까지/소쿠리 가득 감이 넘쳐도 쓸데없이 감을 마구 땁니다./나를 좋아한 그 여자/어쩔 때 노란 산국 꽃포기 아래에다 편지를 감 홍시로 눌러놓은 그 여자/늦가을 시린 달빛을 밟으며 마을을 벗어난 하얀 길을 따라가다 보면/느티나무에다 등을 기대고 달을 보며 환한 이마로 나를 기다리던/그 여자/내가 그냥 좋아했던 이웃 마을 그 여자/들 패랭이 같고/느티나무 아래 일찍 핀 구절초 꽃 같던 그 여자/가을 해가 이렇게 뉘엿뉘엿 지는 날/이 길을 걸으면 지금도 내 마음 속에서 살아나와/저만큼 앞서가다가 뒤돌아다보던/단풍 물든 느티나무 잎사귀같이 살짝 낯을 붉히며 웃는,/웃을 때는 쪽 이가 이쁘던 그 여자/ 우리나라 가을 하늘같이 오래 된 그 여자



위 시는 ‘애인’이라는 나의 시 전문이다.


어느 초겨울 날이었다. 나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에서 퇴근을 하고 있었다. 작은 들길을 걸어 집으로 가고 있었다. 들판은 텅 비어 있었다. 11월의 들판처럼 쓸쓸한 들판은 없다. 곡식들이 막 떠난 자리는 유독 텅 비어 보인다. 두 번째 마을을 막 지날 때였다. 저쪽 들 끝 배추밭에서 한 여자가 배추를 뽑아 머리에 이고 들길을 질러오고 있었다. 소쿠리 속 배추는 춤을 추는 것처럼 너울거렸다. 텅 빈 들판 속에 싱싱한 배추를 머리에 인 여자의 모습은 싱그러웠다. 그 여자는 빈 논들을 지나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월남치마에 빨간 털 스웨터를 입고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여자였다. 나를 향해 씩씩하게 걸어오던 그 여자는 내 바로 앞에서 나를 비껴갔다. 눈을 아래로 깔고 내 곁을 비껴가던 그 여자의 ‘쪽 이’가 보이는 미소를 나는 보았다. ‘쪽 이’가 예쁘던 그 여자를 나는 그렇게 11월의 빈 들에서 처음 보았던 것이다.



학교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그 여자는 친구들과 함께 파라솔 밑에서 코스모스처럼 웃으며 운동회를 구경했다. 졸업생 달리기경기가 있어도 그 여자는 달리기 선수로 나오지 않았다. 출근을 할 때도 퇴근을 할 때도 나는 그 여자네 집 앞을 지나가야 했다. 징검다리를 건너 강 길을 갈 때도 있었지만, 그 여자를 본 후 나는 강 길을 택하지 않고 그 여자네 집 앞을 지나다녔다. 강변에나 학교 운동장으로 가설극장이 들어온 날이면 그 여자는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왔다. 그 여자네 집에는 은행나무가 있었고, 살구꽃이 피었다. 가을이면 그 여자의 아버지와 그 여자의 큰 오빠가 노란 초가지붕을 이었다. 그 여자네 집 노란 초가지붕에 하얀 눈이 쌓였다.

어느 날 밤이었다. 겨울이었다. 달이 떠 있었다. 내 창호지 방문에 무엇인가가 톡톡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서너 번 들리자 나는 살며시 방문을 열어보았다. 담 너머로 사람들이 보였다. 그 여자와 친구들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이웃마을 여자들은 어머니가 내어 놓은 감 홍시를 먹으며 놀다가 돌아갔다. 우리 동네 총각들과 이웃 마을 처녀들은 그렇게 밤이면 강가에서 만나 놀기도 하고 가설극장이 들어오면 만나 따로 놀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그 여자네 집과 우리 집 중간쯤 들 가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모내기 철이면 들에서 모네기를 하던 사람들이 그 느티나무 아래에서 밥을 먹었고, 여름밤이면 농부들이 그 나무 아래에서 밤잠을 자며 논에 물을 지켰다. 먼 길을 걸어 학교 갔다 오던 아이들도 그 나무 아래에서 쉬며 땀을 삭혔다. 오래된 그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 그 들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농부처럼 늘 든든하게 서 있었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그 여자네 집 앞을 지나 퇴근하고 있었다. 마을을 막 벗어날 때 그 여자가 저만큼 내 앞에서 걷고 있었다. 감을 따러 가는 것 같았다. 길을 가던 그 여자는 길가에 있는 감나무 아래 멈추더니, 감 망으로 감을 하나 땄다. 붉은 감 홍시를 손에 들고 가던 그 여자가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작은 돌멩이 위에 감 홍시를 올려놓고 나를 한번 뒤돌아보더니 자기 감나무가 있는 밭으로 들어갔다. 감 홍시에 눌러 놓은 것은 편지였다. 그날 밤 우리는 그 느티나무 아래서 만났다. 달이 높이 뜬 가을밤이었다. 느티나무 아래는 노란 산국이 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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