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김용택의 시이야기] 겨울 사랑의 편지

sosoart 2013. 2. 14. 21:03
[김용택의 시이야기] 겨울 사랑의 편지 김용택의 시 이야기 2013.01.11

겨울 사랑의 편지
따듯한 이불 속으로 들어간 나는 엎드려 그 여자에게 편지를 썼다. 그때 나는 편지가 유일한 세상의 통로였다. 내 가슴속에 쌓여 있는 생각들을 나는 편지로 풀어냈다. 달빛 아래 나는 너무 오래 홀로 외로웠다. 아름다운 자연을 홀로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산 사이/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가만히 있는 곳/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논과 밭과 함께/가난하게 삽니다./겨울 논길을 지나며/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보면/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이 겨울에 믿습니다./달빛 산 빛을 머금으며/서리 낀 풀잎들/스치며 강물에 이르면/잔물결 그대로 반짝이며/가만가만 어는/살 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땅을 향한 겨울 풀들이/몸 다 뉘인 이 그리움/당신,/아, 맑은 피로 어는/겨울 달빛 속의 물풀/그 풀빛 같은 당신/당신을 사랑합니다.’
-시집 <섬진강> ‘섬진강 15-겨울 사랑의 편지’ 전문, 김용택 지음

우리 집에서 차를 타러 나가려면 들길을 따라 30분쯤 걸어가야 한다. 몇 뙈기의 산비탈 밭과 작은 논다랑이를 지나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작은 들 가를 지나가면 낮은 산 아래 들 가에 있는 마을이 나온다. 그 마을 앞을 지나가면 멀리 외지로 나가는 신작로 길이 하얗게 보였다. 한쪽 길은 순창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한쪽 길을 전주로 나가는 길이다. 그리고 붓끝 같은 산 아래 작은 초등학교가 보였다. 나는 그 길을 따라 초등학교 6년을 걸어 다녔고, 오랜 세월 그 길을 따라 학교 선생으로 오갔다. 그 길은 내 평생이었다. 나는 그 길에 있는 돌멩이가 사라지고 다른 돌멩이가 새로 나타난 것도 알았다. 벼가 익고, 보리가 익고, 개구리가 울고, 제비들이 날아다니는 그 논과 밭에 자라는 곡식을 알았고, 그 길가에 피어나는 풀꽃들을 다 알고 있었다. 누구 집 밭에 무슨 곡식이 주로 심어지는지도 다 알고 있었다.

들 가운데로 난 그 길은 아름답고 때로 고왔다. 그 길은 내게 학교였다. 봄이면 사람들이 들로 나와 못자리를 하고 보리밭을 매고, 여름이면 푸른 들판에서 사람들이 하얀 옷을 입고 모내기를 하고 논을 맸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못밥을 얻어먹고, 못줄을 잡아주기도 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벼를 베면 나도 벼를 벴다. 이른 여름 아침이면 농부들이 들에서 풀을 베어지게 가득 짊어지고 안갯속에서 나타났다. 겨울이면 텅 빈 들에 하얀 눈이 쌓였다. 들 끝에서는 늘 부산한 강물이 하얗게 부서지며 흘렀다. 들 끝에 우리 밭이 있었다. 밭에서는 어머니가 하얀 수건을 쓰고, 땅에 엎드려 일을 했다. 감자를 캐고, 고추를 따고, 배추를 뽑았다. 내가 선생이 되어서도 나는 그 길을 따라 학교로 오갔다. 때로 재잘대는 아이들과 걷기도 하고, 눈에 발목을 묻으며 홀로 걸어 학교로 집으로 오갔다.


 



그 작은 들길을 오가던 나는 어느 해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전주로 나가 책을 사보기 시작했다. 월급을 타면 공부하는 아우들에게 돈도 주고 밀린 책을 사기 위해 나는 전주로 갔다. 전주에 가면 헌책방과 새 책방을 오가며 책을 보고, 살 책을 골랐다. 나는 늘 책에 목이 말랐다. 주로 헌책방에 가서 토요일과 일요일을 보내고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전주까지 버스로 두 시간이 걸렸다. 작은 정류소에 내려 우리 집까지 걷는 밤길은 늘 고요했다.

어느 해 나는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 토요일이 되면 나는 그 여자를 만나러 전주로 갔다. 전주에서 책도 사고 그 여자와 놀기도 하다가 늘 막차를 탔다. 막차를 타고 집으로 걸어가는 들길은 내게 평화였다. 어둔 밤은 어둔 밤대로 달이 환하게 뜬 밤은 또 그런대로 좋았다. 멀리 검은 산 아래 작은 마을 불빛들은 늘 산이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았다. 검은 산속에 있는 마을의 불빛은 내게 늘 신비로움을 주었다. 달이 뜨고 소쩍새가 울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내렸다.

 



그 여자를 만나고 돌아오던 어느 겨울밤이었다. 막차는 나를 들 가운데 작은 정류소에 내려놓았다. 막차에서 내린 나는 늘 막막했다. 한참을 서서 나를 두고 달려가는 막차를 바라보다가 나는 걸었다. 이발소가 있는 정류소 작은 가게에 불이 꺼져 있었다. 세상은 고요했다. 세상에 달빛만 가득하였다. 몇 권의 책이 든 가방을 메고 들길을 걸었다. 11월이었다. 달빛이 가득한 들에는 어린 보리들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새끼손가락 길이보다 짧은 보리들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였다. 어린 보리 잎들을 바라보니, 하얗게 서리가 슬어 있었다. 하얀 서리에 젖은 보리 잎들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쭈그려 앉아 그 어린 보리 잎들을 바라보았다. 파랗게 얼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을 앞을 지났다. 마을은 달빛을 받은 검은 산속에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고요와 적막을 머금은 들과 산과 마을은 내게 익숙하지만 늘 새로웠다. 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마을 앞 징검다리로 갔다. 달빛에 죽고 사는 강물, 나는 징검다리를 건너갔다가 되돌아왔다. 달빛 속을 흐르는 강물 속에 물풀들이 흐르는 강물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내 방에 불을 켜 방 가득 쌓인 달빛과 어둠을 몰아냈다. 따듯한 이불 속으로 들어간 나는 엎드려 그 여자에게 편지를 썼다. 그때 나는 편지가 유일한 세상의 통로였다. 내 가슴속에 쌓여 있는 생각들을 나는 편지로 풀어냈다. 달빛 아래 나는 너무 오래 홀로 외로웠다. 아름다운 자연을 홀로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편지를 다 쓴 나는 불을 끄고 누웠다. 물소리가 들렸다. 나는 늘 물소리를 따라가며 잠이 들었다. 물소리를 따라 달빛이 방 가득 밀려들었다.

이튿날 편지를 부치고 난 나는 다시 그 편지의 내용을 떠올려보았다. 편지가 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어제 보낸 편지를 되돌려달라고 편지를 썼다. 며칠 후에 편지가 다시 되돌아왔다. 나는 그 편지를 원고지에 쓰기 시작했다. 그 편지가 시가 되었다. ‘섬진강15 -겨울 사랑의 편지’는 그렇게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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