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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영 / 집을 짓고 고치를 짓고 공간을 짓다- 고충환

sosoart 2013. 2. 23. 19:15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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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영 / 집을 짓고 고치를 짓고 공간을 짓다

고충환

기하학적 형태, 집을 짓다. 작가는 처음에 종이박스와 종이테이프를 이용해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종이박스를 자잘한 조각들로 오려서 부분 부분을 조합해나갔다. 면과 면이 만나지는 접합부분에는 종이테이프를 이용했다. 그렇게 만든 형태는 접합부위에 선이 여실한 기하학적 각 면들로 이루어진 추상적인 형태였다. 그리고 재료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플라스틱 패널을 오려 만든 평면 위에 광목천을 배접해 고착시켰다. 그리고 그 조각조각을 붙이고 세우고 연잇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형태를 만들었다. 면과 면이 만나지는 접합부분에는 아크릴을 이용해 가녀린 선을 그려 넣었고, 더러 실리콘으로 선을 대신하기도 했다. 실리콘으로 그려 넣은 선은 아크릴 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성이 강조되는 편이었다. 대개는 재료 그대로의 재질을 살리는 편이었지만, 때로 조형에 색채를 도입하기도 했다. 재질 그대로를 살린 쪽이 모노톤에 연유한 관념적인 인상이 강하다면, 색채를 도입한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장식적이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이처럼 재료가 종이박스에서 광목천을 덮씌운 패널조각으로 바뀌면서 기본적인 베이스는 같지만 디테일한 공정도 분위기도 사뭇 달라졌다. 그렇게 달라진 경우로 투명성에 연유한 빛의 질감을 들 수가 있겠다. 종이박스는 불투명한 재질 탓에 빛을 차단하지만, 플라스틱 패널조각은 그 표면에 덮씌운 광목천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광목천 탓에 오히려 은근한 빛을 투과하는 성질이 있다. 면과 면이 만나지는 선과 함께, 빛과 그림자가 조형의 결정적인 요소로 도입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선으로 치자면, 작가가 애써 그려 넣어 강조한 선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 실체가 없는 것이다. 선은 말하자면 면이나 사물대상의 가장자리로서 일종의 경계에 가깝고, 감각적 실체로서보다는 관념적 실체에 가깝다. 부재하는 것 혹은 최소한 존재와 부재와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랄 수 있을 터이다. 이로써 작가는 관념적 실체를 감각적 실체의 층위로, 그리고 부재를 존재의 층위로 불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일부러 선을 그려 넣어 강조한 것은 바로 그런 의미 내지 실천논리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만든 형태는 평면과 입체를 하나로 아우르면서 조형의 일부가 평면 위로 돌출돼 보이는 일종의 저부조 형식의 작업을 보여준다. 평면처럼 벽에 걸리기도 하고, 입체조각처럼 공간이나 공중에 설치되면서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어 일종의 공간설치작업으로까지 표현영역이며 범주를 확장한다. 입체를 사각의 틀 속에 가두어 평면을 강조하는가 하면, 무슨 고치처럼 공중에 매달아 조각의 본성이 두드러지게 한 것이다. 여기에 조형물에 덧붙여 조형물이 만든 그림자가 가세하면서 표현영역을 재차 확장한다. 각 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조형물의 구조적인 특성 탓에 그림자 역시 또 다른 각 면처럼 보이고, 흡사 조형물이 연장된 조형물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조명이 가세하면서 작업은 좀 더 복잡하고 섬세해진다. 조형물과 그림자와 조명(혹은 빛)이 상호작용하면서 관객의 시점과 시선에 반응하는, 그리고 그렇게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식의 비결정적인 작업이며 열린 작업을 실현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보다 적극적으로 조명은 아예 조형물 속에 내장돼 일종의 등처럼 제시되기도 하는데, 조형물 자체를 일종의 라이트박스처럼 사용하고 변용한 경우로서, 작가의 일반적인 작업들과는 또 다른 지점을 짚어낸다고 생각한다.

고치로 치자면, 작가는 고치 형상의 조형을 집 혹은 집짓기에다가 비유한다. 실제로 각 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조형은 비록 지붕도 없고 창문도 없지만 방과 방이 그리고 집과 집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연속된 건축물 내지 건조물을 떠올리게 한다. 감각적 실제 그대로를 재현했다기보다는 집의 관념을 추상적인 형태로 옮겨놓은 경우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처럼 추상적인 형태와 집의 관념이 만나지는 것은 꽤나 의미심장한데, 그 자체가 예술의 근원 내지 어원에 맞닿아 있는 점이 그렇다. 알다시피 예술의 어원은 아르스(ars)와 테크네(techne)로 알려져 있다. 이 중 테크네는 무슨 일을 해내는 능력을 포괄적으로 지시하는 말이었고, 특히 새와 벌 거미와 개미의 집짓는 능력에서 착상된 개념이었다. 이런 어원도 그렇거니와 어쩌면 예술 내지 조형행위란 저마다 일종의 집을 짓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 속에 저마다의 아이덴티티가 보이지 않는 형태로 탑재된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재현적이고 상징적인 집을 짓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최소한 무의식적으로 이런 예술의 본질 문제에 맞닿아 있다.

부드러운 조각, 고치를 짓다. 종이박스를 조합하든 아니면 플라스틱 패널조각을 조합하든 그 자체는 일종의 견고한 지지체 역할을 했다. 그렇게 조형물은 작가가 처음 만든 형태 그대로의 원형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지체가 사라지면서 작가의 작업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국면을 맞는다. 광목천을 박음질하는, 그리고 때로 그 표면에 색을 입힌 천 조각을 박음질하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원하는 형태를 얻는다. 벽에 걸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건다기보다는 공중에 매달아 늘어트리는 식의 이 작업은 기하학적이기보다는 유기적인 조각이며 부드러운 조각을 향해 열린다.

알다시피 부드러운 조각은 조각을 이전의 조각과 이후의 조각으로 분기하는, 지금까지의 조각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을 열었다. 주지하다시피 조각의 본질 곧 조각을 조각이게 해주는 장르적 특성으로 치자면 양감과 질감과 물성을 들 수가 있겠고, 그 중 결정적인 것이 양감이 되겠다. 바로 그 양감 탓에 조각은 작가가 최초 제시한 원형 그대로의 결정적인 형태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속이 없는 조각, 속이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조각, 흘러내리듯 하늘거리는 조각, 실체감이 희박한 조각으로 대변되는 소위 가벼운 조각이 무거운 조각을 대신한 것이다. 그 자체가 좌대 위에서 조각을 내려오게 만들었고, 덩달아 조각의 표현영역과 범주를 공간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시키는 계기가 됐고, 무엇보다도 비결정적인 형태며 이행 중인 형태를 새로이 조각의 이름으로 등재해 조각을 변질시키는 계기가 된다.

작가의 작업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조각의 혁신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렇게 박음질된 조각, 늘어트려진 조각, 흘러내리듯 하늘거리는 조각, 빛을 투과하는 조각이 무슨 고치 같고 허물 같다. 기하학적 조각에서 고치는 이미 의식적인 형상이며 소재였지만, 광목천을 박음질해 만든 일련의 작업들에서 조형은 더 고치답다. 그렇게 형상은 고치를 떠올리게 하고, 파충류가 벗어놓은 허물을 떠올리게 한다. 얼추 기하학적인 형태로부터 유기적인 형태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형태로부터 생물학적인 형태로의 이행과 변태가 확인되는 대목이다. 여기에 여성주의를 대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전자를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형식논리로 본다면, 후자는 여성주의적인 자의식을 반영한 경우가 되겠다. 더불어 천과 박음질을 이용한 조형은 전통적으로 공예 내지 마이너 장르로 여겨져 도외시되어졌었던 것인 만큼이나, 오히려 답보상태에 빠진 현대미술의 물꼬를 터주는 생산적인 계기이며 기폭제로서의 의미 있는 역할을 한 것으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천에 박음질한 조형에는 직선이 없다. 박음질 할 당시에는 직선이 있었을지 모르나, 유기적인 소재 탓에 최종적으로 조형을 세팅하는 과정에서 직선은 휘어지기 마련인 것. 결국 직선보다는 곡선이 결정적인 조형요소랄 수 있을 것인데, 일련의 부드러운 조각에 나타난 유기적이고 생물학적인 본성에도 부합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 본성은 기실 자연의 본성에 다름 아니다. 신비주의 사상과 은둔 예술가로 알려진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Regentag Dunkelbunt Hundertwasser) 는 직선을 문명의 선으로, 그리고 곡선을 자연의 선으로 매치시킨 적이 있다. 이렇듯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 오직 곡선이 있을 뿐. 작가는 그렇게 곡선으로 이뤄진 조형을 매개로 유기적이고 생물학적인 본성을, 결국 자연의 본성을 작업의 형상 위로 밀어올리고 있었다.


기하학적 환원, 공간을 짓다. 근작에서 작가는 또 한 번 변신을 시도한다. 플라스틱 패널 위에 광목천을 덮씌워 만든 평면을 소지로 한다는 점에선 기하학적 형상을 테마로 한 일련의 입체조형작업과 같지만, 이번에는 입체가 아닌 평면인 점이 다르다. 그래서 전작이 입체와 조각의 특성이 강하게 어필되는 경우였다면, 근작에선 현저하게 회화 쪽으로 무게중심이 실린다. 광목천의 표면에 펜으로 일일이 새김질하듯 그려 메우거나, 종이의 표면에 연필심을 곱게 갈아 만든 가루를 고르게 묻혀 어둔 화면을 연출한 프로세스 역시 근작을 회화로 읽게 한다. 더불어 기하학적 형태에 착안한 것이면서도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킬 만큼 간결하고 단조로운 최소한의 형상에 한정한 것이나, 빛과 어둠을 대비시켜 그림의 구성이며 구조가 한눈에 드러나 보이게 한 점이 특징이랄 수 있겠다.

이처럼 심플한 대비가 강조된 화면에선 무엇이 보이는가. 그것은 그저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최소한의 구조며 구성에 대한 형식실험의 소산인가. 아니면 그 무엇인가를 재현한 그림인가. 아니면 최소한 어떤 형상을 암시하거나 상기시키는, 마치 어떤 추상적인 관념을 옮겨 그린 기호와도 같은 그림인가. 설핏 그림은 그저 기하학적 형태를 다룬 형식실험의 결과로 보인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빛과 어둠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점차 건축물의 구조가 드러나 보인다. 건물의 모서리가 보이고, 건물의 출입구가 보이고, 건물과 건물 사이의 빈 공간이 보이고, 건물 안쪽으로 길게 연이어진 어두운 통로가 보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한갓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화면이 건물의 구조며 풍경, 이를테면 일종의 건물이 있는 풍경을 암시하고 드러내는 것은 정작 그린 부분이 아닌 그림에서의 여백에 해당하는 부분에 의한 것이다. 미처 그리지 않은 채 남겨둔 빈 부분이 건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인데, 일종의 역설에 대한 이해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고선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정리를 하자면 작가가 실제로 그린 것은 배경에 해당하는 부분이지만, 정작 이를 통해서 드러나 보이는 것(그리고 덩달아 배경 또한 추상에 빠지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은 미처 그려지지 않은 부분, 이를테면 건물이 있는 풍경이다. 말을 만들자면, 아예 그리지도 않은 그림을 위해서 그린 그림이라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

여기서 재차 기하학적 형태와 함께 작가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조형요소로서 의미기능하고 있는 선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선은 다만 사물대상을 한정하는 경계일 뿐, 원래는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없는 선을 굳이 그려 넣으면서까지 강조한 이면에는 관념적 실체를 감각적 표면 위로, 부재를 존재의 표면 위로 불러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관념으로나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며 부재하는 것들을 부각하려는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다. 마찬가지로 작가의 근작 역시 미처 그려지지 않은 것, 그래서 어쩌면 부재하는 것들을 그리고 드러내고 강조하는 기획에 그 초점이 맞춰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기하학이란 그저 추상적인 형식논리의 소산에 그치기보다는, 어떤 관념적 실체를(이를테면 자연의 본성과 같은), 그리고 때로는 감각적 실체를(이를테면 집과 고치와 건축물과 같은) 드러내고 부각하고 강조하기 위한 구실이며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나에게 기하학은 날을 세운 차갑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어떤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직접 만들어주신 나무블록세트 상자 속에 들어있던 삼각, 사각, 원 모양의 입체 도형으로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만들어낼 수가 있었다. 사람, 자동차, 나무, 집, 심지어 천사까지도. 나는 칸딘스키의 이론을 배우기도 전에 이미 추상놀이를 하고 있었다고 작가는 작가노트에 적고 있다. 기하학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나 작업이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인지를, 그리고 기하학이 자신의 작업에서 어떤 의미기능을 담보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작가의 기하학적 형상에는 각각 직선과 곡선이 등장한다. 직선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형태를 위한 것이라면, 곡선은 자연을 의미하고 유기적인 생명을 암시한다. 이를테면 사막과 능선과 골짜기와 같은 자연풍경을, 고치와 벌집 같은 생물학적인 형태를, 그리고 달과 별과 하늘처럼 일정한 주기로 순환하는 것들이며, 결국 자연의 본성이랄 수 있는 자연성을 표상하는 것. 이로써 얼추 작가의 추상작업이 그저 순수한 혹은 단순한 형식논리의 결과에 머물지는 않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외관상 추상적인 형태 속에 형상적인 이미지며 서사를 함축하고 있는 일종의 절충형식으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그 절충을 가능하게 해주는 계기 곧 추상과 형상을 매개시켜주는 역할을 기하학이 도맡고 있는 것.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기하학은 기하학 본래의 수학적인 근원(이를테면 도형 같은)을 가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혹은 그보다는 그 이면에 유기적 생명력을 함축하고 있는 일종의 유기적 기하학(혹은 유기기하학)과 조형이 만나지는 접점의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