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심마(패랭이꽃)/1992/87X129/한지에 수묵채색 / 김대열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이생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 태어나서 문학 할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데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백석白石
1912. 7. 1 평북 정주~1963(?).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북방 정서를 통해 시화(詩化)한 시인. 본명은 기행(夔行).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
본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
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 定州
城〉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
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
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
면서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민족주의 지도자 고당
조만식의 비서를 지내며 솔료호프의 〈고요한 돈 강〉등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으며 6.25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의 현지파견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1936년에 펴낸 시집〈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시 〈여승 女僧〉
에서 보이듯 외로움과 서러움의 정조를 바탕으로 했다. 〈여우 난 곬족〉(조광,
1935. 12)· 〈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처럼 고향인 평안도의 지명이나 이
웃의 이름,그리고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
는데, 이것은 이용악 시의 북방 정서에 나타나는 것처럼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남한에서 시집 〈백석 시전집〉(1987)과 〈흰 바람벽이 있어〉(1989) 등이 출간
되었다.
자야子夜
백석에 의해 자야라 불리웠던 김영한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파산하게
되자, 당시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에 조예가 깊었던 琴下 河圭一(1867~1960)이
이끌던 정악전습소와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다. 기생이라고는 하지만 경성
관철동의 꽤나 개화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동경의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
던한 취향의 엘리트 여성이었으며 몇편의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른바 문학
기생이기도 했다.
백석과는 백석이 함흥의 영생고보 교원으로 있던 시절에 만났으며, 그 후 두 사
람은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우여곡절의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는 자신의 글에서 '힌 바람벽이 있어'를 포함한 백석의 많은 시가 자신을 염
두에 두고 씌여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진위를 알 수는 없으나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라는 시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라
는 부분과 당시 두 사람이 단성사에서 상영하던 '전쟁과 평화' 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점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긴 하다.
[내 마음의 강물-사.곡:이수인/ 테너:임응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