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의 산책
(26)전문가를 버리고 친절만 생각한다면
윤철규
세계적 기상이변 때문인지 꽃샘추위도 한결 변칙을 부려 봄이 다소 늦은 감이다. 늦었어도 따사로운 햇볕과 훈풍은 다가올 새봄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게 한다. 더욱이 금년에는 정부도 새로 들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하는 설렘도 있다.
지난해의 일인데 서울에 있는 한 박물관에서는 이십 수 년 동안 전시기획을 담당해온 한 큐레이터가 인사 이동됐다. 새로 맡겨진 일은 관련 분야의 시민강좌. 즉 아카데미 담당이 됐다. 인사야 조직마다 원칙이 있고 내부 사정이 있다. 하지만 이 큐레이터는 그 분야를 통틀어 한두 사람 있을까 말까 한 전문가다. 많은 사람이 그래서 이를 의아하게 여겼으나 이내 ‘돈 되는 일을 하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말았다.
작은 에피소드인데 실은 미술계에서 바라는 일들이 대개 다 들어있다. 먼저 ‘수익 지상주의’다. 언제부터인지 문화도 제 앞가림은 제가 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나아가 수익까지 내달라는 주문이다. 문화에는 돈이 되는 문화도 있지만, 애초부터 돈하고는 무관한 것도 많다. 전통을 다루는 한국미술 쪽으로 가면 사정은 더 심하다. 여기저기서 블록버스터 타령을 하고 있지만, 한국미술의 둘러싼 환경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사람과 기획을 줄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미술에는 현재적 의미도 있겠지만, 후대를 위해 지금은 보존해야 하는 미래형 자산이란 뜻도 있다. 일하기는 편하겠지만 똑같은 잣대를 머리 위로 휘두르는 일은 이제 그만 둘 때도 됐다.
두 번째는 전문가를 우습게 보는 풍토다. 이 큐레이터의 이동은 의외였던 만큼 뒷얘기도 많았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그는 전문가였던 만큼 TV에 얼굴이 나오고 신문에도 자주 이름이 거론됐는데 내부에서 이것이 밉보였다는 것이다. 차마 그랬을까 하고 싶을 정도이지만 전문가를 하찮게 여기는 분위기는 공공 사이드에서는 이미 오래된 고질이다. 어디고 간에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 필요하다면 데려다 쓰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더욱이 유명 인사나 직함이 그럴싸한 사람을 불러오면 감사고 외부의 시선이고 흠 잡힐 일 없다는 생각들이다.
세 번째는 미술계의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은 좋은 말로 하면 수요자의 눈높이에 맞춘 서비스이다. 그런데 이 높이만 고집하면 수준이나 교양이 퇴보할 수도 있다. 앞서 큐레이터도 ‘남들이 이해 못 하는 어려운 전시는 제발 그만하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남들 다 아는 것만 늘어놓고서 문화의 고급화 운운할 수는 없다. 맹목적인 포퓰리즘 추종은 또 다른 혼란을 가져오기도 한다. 서울의 한 화랑에서는 얼마 전 조선 후기의 유명 화가들이 그린 화조화(花鳥畵) 전시가 열렸다. 이때 소개된 작품에는 모두 제목이 두 개씩이었다. <버드나무와 매미, 호박과 메뚜기>와 <草蟲圖>, <벼랑에 핀 국화>와 <怪石菊花> 등등. 한자를 모르는 관람객을 위해 친절하게 제2의 제목을 만들어 붙인 것이다. 한 작품에 두 개의 제목은 사람으로 치면 주민등록증 이름이 두 개인 것과 같은 셈이다. 앞으로 이들 작품 검색에는 혼란이 예상되는데 이는 당연히 과잉 친절에 속한다. 국립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위에 대고 모든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지만 위가 바뀌면 아래는 훨씬 바뀌기 쉬우므로 봄잠에 기대어 기대를 한번 해본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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