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수 미술칼럼
(88)네 사람의 미술가를 떠나보내면서
오광수
영국의 시인 엘리엇이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하였지만, 한국미술계야말로 지난 2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유리지, 이두식, 박노수,여운 등 네 사람의 미술가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미 오랫동안 병상에 있었던 이도 있지만 갑작스럽게 간 이도 있다. 3일전에 만났는데 3일 후에 부음이 날라온 황당한 경우도 있다. 각기자기분야에서 왕성한 일을 해오던 작가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가고보니 그 빈자리가 유독 크게 보일 수밖에 없다. 박노수 화백만 빼고는 세 사람이 60대 중반이니까 예술가로선 이제 제대로 물이 오를 때라는 점을 상기하면 안타까움이 앞선다. 생이란 자기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만큼의 일을 다하고 간 것인지도 모른다. 안타까워하는 것은 인간적인 상정일 뿐이다.
사람은 죽어 관 뚜껑을 덮을 때 온전히 평가된다는 말이 있다.비로소 객관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박노수(1927-2013) 화백은 해방 후 1세대 작가다. 서울미대를 나와 이화여대와서울대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작가생활과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평생을 보낸 셈이다. 작가는 개인으로서의 위상에 앞서 시대와 사회에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가 중요한 평가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그가 어떤 의식으로 시대와 사회에 맞서왔는지는 그의 작품세계가 시대와 사회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가를 따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해방 후 1세대 작가로서 ‘새 술은 새 부대에’란 격언에 맞게 새 출발에 섰던 작가이다. 일제 강점기를 통해 피폐화된 정신은 물론이려니와 무엇보다 일본적 정서와 양식에 물든 이른바 왜색을 탈피하고 새로운 한국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이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단순히 복고적 양식의 재현이 아니라 고유한 정신세계와 시대에 부응한 감성의 결정체로서의 양식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1세대 작가들은 각기 독자한 방법을 통해 이 창조의과업을 수행해나갔다.
박노수의 작품은 문인화의 정신과 현대적 감성을 융합한 것이었다. 내용에 있어선 고답적인 정신세계를 염원하면서도 형식에 있어선 강한 색채의 대비와 활달한 운필을 구사한 것이었다. 호젓하게말을 타고 산길을 가는 선비의 모습이나 휘영청 수양버들 바람에 쏠리는 강가에 앉아 산천을 바라면서 홀로 명상에 잠겨있는 소년의 모습은 바로 그가 추구했던 정신세계의 한 단면이다. 문인화가 지니는담백한 구도와 속도 있는 운필의 구사는 전통적인 양식의 현대적 해석의 하나의 모범적인 대안이지 않나 생각된다.
박노수, 산, 80년대 중반, 한지에 채색, 114×158㎝
유리지(1945-2013)는 금속공예로서 독자한 세계를 추구한 작가이다. 현대생활과 공예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 그의 작업은 지금까지의 공예가 지닌 장식적 관념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공예가 기능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순수한 작품으로서의 위상을 강조함으로써 공예의 지평을 열어나간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서울대를 정년퇴직하면서 ‘치우금속공예관’을 경영한 것은 공예가로서의 더욱 원숙한 경지의 탐구와 더불어 공예의 시대적 의미를 꾸준히 천착한 것이었다. 특히 만년에 집중한 장례문화에 대한 현대적 해석과 구현은 독특한 분야의 개척으로서 주목된 바였다. 이두식과 여운은 개별적인 작가활동에 못지않게 미술가 사회의 조직과 활동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두식(1947-2013)은 미술협회 이사장으로 만년엔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자신을 투자하였다. 여운(1947-2013) 역시 민족미술인협회의 장으로 활동했으며 미술의 시대적 발언을 앞세운 집단의 논리를 펼쳐 보여왔다. 작품에 있어선 퍽 대조적인 측면을 보이고 있다. 이두식은 현란한 색채를 통한 분방한 표현의 세계에 자적 하였는가 하면 여운은 목탄, 파스텔을 구사한 흑색 톤으로 한 시대의 내면풍경을 구현하려고 하였다.
관뚜껑이 닫힘과 동시에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예술세계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인간적인 면모, 삶의방식은 그런대로 일정한 잣대로 가늠될 수 있을지 모르나 예술세계에 대한 평가는 더욱 오랜 시간을 두고 이루어질 수밖에 없지 않나본다. 예술은 길다란 것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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