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가 질 때 어둑어둑한 산속에서 우는 새소리는 다급하고 불안한 느낌이 든다. 새들이 문득 울음소리를 그치면 산속은 물 밑처럼 고요해진다. 그러면 나는 산책하러 나간다. 해가 지면 강가에는 푸른 어둠이 살아난다. 천천히 오는 푸른 어둠은 늘 나를 긴장시킨다. 문득 알 수 없는 삶의 깊이가 나를 빨아들인다. 그 깊고 깊은, 그 어느 곳에서 나를 부르던 그 목소리에 내 얼마나 많은 날을 외로움에 떨며 지냈던가.
나무 중에서 가장 늦게 잎을 피우는 나무는 자귀나무다. 대추나무, 오동나무, 감나무, 배롱나무도 잎을 늦게 피우는 나무들이다. 그런데 모든 나무들이 잎을 다 피우고 났는데도 아직도 깜깜무소식인 나무가 자귀나무다. 단단한 나무일수록 잎을 늦게 피우는데 오동나무와 자귀나무는 나무가 단단하지도 않는데 잎을 늦게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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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송이를 따서 겨드랑이에 넣었을 때 밤송이 가시가 따끔거리면 모내기 철이 지났다는 것을 알았다. 새 울음소리를 듣고 그 해 농사를 점치고, 개미가 이사를 하면 비가 온다는 것을 알았다. 앞산에 참나무 잎이 하얗게 뒤집히면 사흘 후에 비가 온다고 했다. 그 바람은 비가 올 마파람이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 그들은 자기들이 몸담고 사는 자연의 변화들을 유심히 보고 살았다. 어머니들이 밭에서 일하고 오다가 자귀나무 가지를 꺾어 해를 가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자귀나무 가지를 호박구덩이에 놓아두었다. 자귀나무 잎이 떨어져 거름이 되고 호박넝쿨이 자귀나무를 감고 뻗어 갔던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하는 말과 하는 짓은 모두 과학적이다. 모두 근거가 있는 삶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그들은 생태와 순환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질 때 어디에 가면 다슬기를 많이 잡을 수 있고, 비가 와서 새 물이 나가면 어디에, 어떤 고기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서리가 내리면 작은 도랑에 가서 물에 잠긴 풀뿌리에 모여 겨울을 지내려는 새우를 잡았던 것이다.
그렇게 앞산에 자귀나무 잎이 피고 나면 이제 앞산은 푸르다 못해 녹음방초가 된다. 숲이 우거진 앞산에 새들이 운다. 꾀꼬리가 울고, 물까치가 울고, 어치가 울고, 박새가 울고, 쑥꾹새가 울고, 뻐꾹새가 울고 밤이 되면 쪽쪽새, 소쩍새가 운다. 해가 뜨면 울기 시작해서 해가 질 때까지 운다. 해가 질 때, 푸른 어둠이 서서히 산을 검게 물들이면 새들은 더욱 요란하게 울기 시작한다. 해가 질 때 어둑어둑한 산속에서 우는 새소리는 다급하고 불안한 느낌이 든다. 새들 중에 가장 크게 우는 새는 물까치다. 회색 몸에 연미복 같은 날개를 단 이 새의 울음소리는 유난스럽게 소란스러워 어두워지는 산속을 휘젓는다.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유난스럽게 울어대는 이 새들이 문득 울음소리를 그치면 산속은 물 밑처럼 고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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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나는 산책하러 나갔다. 앞산에서 물까치들이 유난스럽게 지저귀더니, 뚝 그쳤다. 수런거리던 앞산이 문득 고요해지자 글 한 구절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새들이 조용할 때’라는 말이었다. 나는 강가로 갔다. 물속에 산들이 조용하게 내려와 있었다. 강가 바위에 가만히 앉았다. 고개를 들어 앞산을 바라보았다. 산도 고요했다. 해가 지고 새들도 집을 찾아들자 고요와 적막이 흘렀다. 내 얼마나 많은 날을 이렇게 저문 물가에 앉아 마음을 다스렸던가. 문득 알 수 없는 삶의 깊이가 나를 빨아들였다.
그 깊고 깊은, 그 어느 곳에서 나를 부르던 그 목소리에 내 얼마나 많은 날을 외로움에 떨며 지냈던가.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내 오래된 방에 불을 밝히고 시를 썼다. 검은 치마 폭 같은 산자락 끝을 끌어당겨 그 위에 시를 썼다. 새들이 조용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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