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김용택의 시 이야기] 새들이 조용할 때

sosoart 2013. 7. 23. 10:53

[김용택의 시 이야기] 새들이 조용할 때 김용택의 시 이야기 2013.07.12
새들이 조용할 때
해가 질 때 어둑어둑한 산속에서 우는 새소리는 다급하고 불안한 느낌이 든다. 새들이 문득 울음소리를 그치면 산속은 물 밑처럼 고요해진다. 그러면 나는 산책하러 나간다. 해가 지면 강가에는 푸른 어둠이 살아난다. 천천히 오는 푸른 어둠은 늘 나를 긴장시킨다. 문득 알 수 없는 삶의 깊이가 나를 빨아들인다. 그 깊고 깊은, 그 어느 곳에서 나를 부르던 그 목소리에 내 얼마나 많은 날을 외로움에 떨며 지냈던가.
어제는 많이 보고 싶었답니다./그립고/그리고 바람이 불었지요./하얗게 뒤집어진 참나무/이파리들이/강기슭이 환하게 산을 넘어 왔습니다./그대를 생각하면/치마 단이 닳아진 산자락들이 내려와/내 마당을 쓸고 돌아갑니다./당신을 사랑했지요./평생을 가지고 내게 오던/오! 그 고운 손길이 내 등 뒤로 돌아왔지요./풀밭을 보았지요./풀이 되어 바람 위에 눕고/꽃잎처럼,/ 날아가는 바람을 붙잡았지요./온 몸이 다 꽃이 되었지요./사랑이 시작되고/사랑이 이루어지기까지/그리고 사랑하기까지/내가 머문 마을에는/닭이 울고/나는 수도 없이/그대에게 가는 길을 만들어/아침을,/저문 날을 걸었지요./사랑한다고 말할까요./바람이 부는데/사랑한다고 전할까요./해는 지는데/새들이 조용할 때/물을 보고/산을 보고/나무를 보고/그리고 당신이 한없이 그리웠습니다./사랑은/어제처럼/또 오늘입니다./여울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물을 만들고/오늘도 강가에 나앉아/나는 내 젖은 발을 들여다봅니다. - ‘새들이 조용할 때’ 전문, 김용택 지음



 

봄 산에서 제일 일찍 피는 꽃나무는 생강나무다. 생강나무라고도 하고, 쪽동백이라고도 하고, 지역에 따라서는 동백꽃이라고도 한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은 사철 푸른 동백이 아니라 이 생강나무를 말한다. 생강나무꽃은 산수유꽃하고 비슷하다. 꽃송이도 그렇고 꽃 색깔도 그렇다. 노란색인데 산수유꽃보다는 색깔이 순하고 연하다. 생강나무꽃이 피고 나서 산 아래 마을에서는 산수유꽃이 핀다. 매화, 산수유꽃, 벚꽃, 진달래꽃이 핀 다음 산벚꽃이 피면서 봄꽃들이 산천을 물들인다. 그리고 잎들이 돋아난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꽃을 봄꽃이라고 한다. 봄꽃 중에서 제일 늦게 피는 꽃이 오동나무꽃이다. 오동나무는 꽃을 피우면서 잎이 살짝 돋아난다. 그렇게 모든 봄꽃이 피고 나면 우리나라 산천은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건너간다. 그러면서 초여름의 꽃들이 피어난다. 초여름의 꽃들은 거의 흰색이다. 이팝나무, 층층나무, 때죽나무, 산딸나무, 노린재나무, 찔레나무의 꽃이 다 흰색이다.

나무 중에서 가장 늦게 잎을 피우는 나무는 자귀나무다. 대추나무, 오동나무, 감나무, 배롱나무도 잎을 늦게 피우는 나무들이다. 그런데 모든 나무들이 잎을 다 피우고 났는데도 아직도 깜깜무소식인 나무가 자귀나무다. 단단한 나무일수록 잎을 늦게 피우는데 오동나무와 자귀나무는 나무가 단단하지도 않는데 잎을 늦게 피운다.



자귀나무 잎이 피면 우리나라 산은 이제 진초록이다. 자귀나무 잎이 피고 나면 바람이 불 때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새순이 다 돋아나고 잎이 살이 찐 것이다. 옛날 농부들은 나뭇잎이 부딪쳐서 소리가 나지 않을 때를 잘 알고 있었다. 살이 오르지 않은 새순에서 돋은 나뭇잎을 베어다가 모내기할 때 논에 뿌렸다. 나뭇잎들이 부딪쳐 소리가 나지 않을 때의 나뭇잎은 그 해에 썩어 거름이 되지만 나뭇잎이 서로 부딪쳐서 소리가 나게 살이 오르면 그 해에 거름이 되지 않고 그 다음 해에야 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은 생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과학적으로 판단해 가며 농사를 지었던 셈이다.
밤송이를 따서 겨드랑이에 넣었을 때 밤송이 가시가 따끔거리면 모내기 철이 지났다는 것을 알았다. 새 울음소리를 듣고 그 해 농사를 점치고, 개미가 이사를 하면 비가 온다는 것을 알았다. 앞산에 참나무 잎이 하얗게 뒤집히면 사흘 후에 비가 온다고 했다. 그 바람은 비가 올 마파람이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 그들은 자기들이 몸담고 사는 자연의 변화들을 유심히 보고 살았다. 어머니들이 밭에서 일하고 오다가 자귀나무 가지를 꺾어 해를 가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자귀나무 가지를 호박구덩이에 놓아두었다. 자귀나무 잎이 떨어져 거름이 되고 호박넝쿨이 자귀나무를 감고 뻗어 갔던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하는 말과 하는 짓은 모두 과학적이다. 모두 근거가 있는 삶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그들은 생태와 순환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질 때 어디에 가면 다슬기를 많이 잡을 수 있고, 비가 와서 새 물이 나가면 어디에, 어떤 고기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서리가 내리면 작은 도랑에 가서 물에 잠긴 풀뿌리에 모여 겨울을 지내려는 새우를 잡았던 것이다.

그렇게 앞산에 자귀나무 잎이 피고 나면 이제 앞산은 푸르다 못해 녹음방초가 된다. 숲이 우거진 앞산에 새들이 운다. 꾀꼬리가 울고, 물까치가 울고, 어치가 울고, 박새가 울고, 쑥꾹새가 울고, 뻐꾹새가 울고 밤이 되면 쪽쪽새, 소쩍새가 운다. 해가 뜨면 울기 시작해서 해가 질 때까지 운다. 해가 질 때, 푸른 어둠이 서서히 산을 검게 물들이면 새들은 더욱 요란하게 울기 시작한다. 해가 질 때 어둑어둑한 산속에서 우는 새소리는 다급하고 불안한 느낌이 든다. 새들 중에 가장 크게 우는 새는 물까치다. 회색 몸에 연미복 같은 날개를 단 이 새의 울음소리는 유난스럽게 소란스러워 어두워지는 산속을 휘젓는다.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유난스럽게 울어대는 이 새들이 문득 울음소리를 그치면 산속은 물 밑처럼 고요해진다.



 

그러면 나는 산책하러 나간다. 나의 산책은 늘 해 질 때였다. 해가 지면 강가에는 푸른 어둠이 살아난다. 천천히 오는 푸른 어둠은 늘 나를 긴장시킨다. 문득 찾아온 고요 때문일 것이다.그러면 나는 강가로 간다. 나의 산책은 늘 물을 따른다. 새들이 조용하면 물은 바빠진다. 아침 물은 유유하고 저문 물은 서두른다. 물을 따르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릴 수 있는 일이다.

그날도 나는 산책하러 나갔다. 앞산에서 물까치들이 유난스럽게 지저귀더니, 뚝 그쳤다. 수런거리던 앞산이 문득 고요해지자 글 한 구절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새들이 조용할 때’라는 말이었다. 나는 강가로 갔다. 물속에 산들이 조용하게 내려와 있었다. 강가 바위에 가만히 앉았다. 고개를 들어 앞산을 바라보았다. 산도 고요했다. 해가 지고 새들도 집을 찾아들자 고요와 적막이 흘렀다. 내 얼마나 많은 날을 이렇게 저문 물가에 앉아 마음을 다스렸던가. 문득 알 수 없는 삶의 깊이가 나를 빨아들였다.
그 깊고 깊은, 그 어느 곳에서 나를 부르던 그 목소리에 내 얼마나 많은 날을 외로움에 떨며 지냈던가.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내 오래된 방에 불을 밝히고 시를 썼다. 검은 치마 폭 같은 산자락 끝을 끌어당겨 그 위에 시를 썼다. 새들이 조용할 때.
 
출처: KBSTORY(국민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