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쁜데 웬 설사/ 김용택
소낙비는 오지요
소는 뛰지요
바작에 풀은 허물어지지요
설사는 났지요
허리끈은 안 풀어지지요
들판에 사람들은 많지요
- 시집『강 같은 세월』(창작과 비평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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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누구나 한두 번쯤 이런 긴박한 최악의 처지에 몰릴 때가 있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도 주위에서 이 같은 상황을 목격할 경우도 있는 것이고. 실제로 이 시는 시인의 어머니가 저 광경을 목격하고선 아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시인 말마따나 고스란히 받아쓴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가 바쁜 농사철 논두렁에서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깔짐 지게를 지고 소를 몰고 오는데 갑자기 똥이 마려운 폼이었단다. 소를 묶고 지게를 받쳐야 하는데, 지게를 받치자 깔짐이 넘어가버려 풀이 그만 허물어졌던 것이다. 그때 소가 펄떡펄떡 뛰는 광경을 보았다. 깔짐은 넘어가지, 소는 뛰지, 받치기는 힘들지. 설사는 나오려고 하지, 보아하니 삼베옷 허리띠는 잘 풀어지지 않는 것 같고 들판엔 사람들도 많았단다.
시인은 이 상황을 전해 듣고 그대로 베껴 썼다는 것이다. 어쩌면 ‘소나기’부분은 각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긴밀하게 가공 재구성한 것이 더욱 구체성을 띄고 있다. 하지만 그냥 평범한 산문적 사고에 머물렀다면 시가 되진 못했으리라. ‘소나기가 오는데다가 소도 뛰고 풀은 허물어졌다. 게다가 설사도 나고 허리끈도 안 풀어진다. 그리고 보는 사람도 많다.’ 정도가 되겠는데 재미와 감흥이 팍 떨어진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받혀주고 있는 것은 반복해서 서술하고 있는 ‘지요’라는 나열적 질서가 되겠는데, 시적 운율을 느끼게 하여 시를 시답게 하고 있다. 이런 형식의 리듬은 사실 특별할 건 없고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써먹는 말이다. ‘비는 오지요 갈 길은 멀지요 배는 고프지요...’ 따위의 익숙한 리듬이다.
이 시는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이 정도면 요즘 아이들에게도 먹혀드는 개그 수준이 될까. 전유성은 시집을 즐겨 읽는 개그맨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 이런 시를 만나면 반색하며 소재로 써먹으려고 할 것이고 그리해도 손색은 없을 것이다. 여섯 행에 불과한 이 짧은 시에서 어느 한 행이라도 빠져있다면 긴장감의 밀도가 떨어져 재미도 덜했을 것이다. 특히 ‘허리끈은 안 풀어지지요’란 대목이 누락된다면 아예 시의 꼬락서니가 안 되겠다. ‘바작’이란 낯선 농촌 물건도 살짝 시의 품격을 거들고 있다. 바작은 지게에 짐을 싣기 좋도록 하기위하여 대나 싸리로 조개모양의 걸어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만든 물건이다. 아무튼 시가 재미나긴 한데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시에서의 설사 만난 이는 저 극도의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였을까. 내 지난날의 어느 순간처럼 그냥 눈 감고 철퍼득 주저앉아버리고 말았을까.
권순진
The Way We Were/ Barbra Streis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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