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푹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시집 『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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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의 연시를 연상케 하는 이성복 시인의 1980년대 작품이다. 다만 사랑의 부재와 상실감이 더 강열하게 표현되어 있고 동시에 무거워보인다. 상상력의 모던함 때문일까. 배반과 장미의 서로 이질적인 요소가 묘하게 어울리는 것처럼 여름과 백일홍은 장난과 절망에 명징하게 엮여있다. 서로 악수를 청하지도 등져있지도 않다. 그 여름은 뜨거웠으므로 따라서 폭풍이 몰아쳤으며, 붉은 꽃들을 피웠기에 나른하진 않았으리라. 그때 진실과 상관없이 사랑은 작동되었는데, 장난처럼 허술하게 조립된 것 치고는 꽤나 견고했고 오래도록 무사했다.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던 것은 기실 그 붉은 기운 때문이었으리라.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사랑은 그 체위를 바꿔가며 약속된 자전과 공전의 궤적처럼 관성으로 내달렸다. 돌고 돌아도 어질하지 않았고 지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꽃들은 지고 마는 법. 유효하지 않은 것은 지난 밤 마신 뒤 뒹구는 술병만이 아니었다. 그 여름의 끝 여관방 시트카버처럼 사랑은 조금씩 구겨지기 시작했고 찢긴 잔해는 하나씩 쌓여가며 방관되었다.
꽃을 피운다는 것은 곧 절정에 도달함이고, 그 절정은 결국 파국을 맞는다는 의미다. 비단 같은 꽃이 노을빛에 곱게 물들어 사람의 혼을 오래도록 빼앗으며 피었으나 계절이 필연으로 바뀌듯 그해 여름의 배롱나무 꽃도 그렇게 지고 말았으며, 어느 해 여름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며 전설처럼 다시 필 것이다.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도 끝을 보았음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뜨거운 태양을 온 몸으로 빨아들이면서 백일동안 세 번씩이나 피보다 진한 정열의 꽃을 피우는 동안 치유의 과정도 함께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새벽까지 기승했던 고뿔이 눈뜬 아침 거짓처럼 뚝 떨어지듯 절망은 그렇게 느닷없이 끝이 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여름 내내 그 처연한 붉은 빛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80년대 어느 해 그 여름날의 절망은 어쩌란 말이냐. 절망과의 싸움이 끝장나고 그 절망을 통해 희망을 간구받기라도 한 것일까. 하기사 권세도 십년을 넘지 못하고 꽃의 붉음도 백일을 넘지 못하며 사람도 늘 좋기로 천일이 갈 수 없거늘. 그 붉은 기억만 한결 같고 끝이 없기를.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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