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스크랩] 오미자 술/ 황동규

sosoart 2013. 9. 25. 21:19

 

 

 

오미자 술/ 황동규

 

 

오미자 한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

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分子)가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

매일 색깔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가볍게 떫고 맑은 맛!

욕을 해야 할 친구 만나려다

전화 걸기 전에

내가 갑자기 환해진다.

 

 

- 시집『몰운대 행』(문학과지성사,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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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비전 등에서 비의도적 간접광고에 노출되지 않으려고 상표나 상호가 붙은 옷과 배경 따위가 오만상 부옇게 처리된 찝찝한 광경을 자주 보게 되는데, 시는 이런 것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다 ‘구체적’으로 부은 것은 물론 체험의 사실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막소주’ 정도로 해도 되겠지만 그냥 소주에다 오미자를 병에 넣고 식이면 맛이 떨어진다. 보해소주 ‘30도’를 꼭 밝힌 것은 독한 희석식 소주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사실 과일주를 담글 땐 미지근한 소주로는 맛이 안 난다.

 

 ‘빈 델몬트 병’도 선명한 그림을 위해서다. ‘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에서 시인의 감상은 ‘예쁘다’ 한마디면 충분했다. 오미자 술을 빚는 과정에서 실제로 이처럼 어여뿐 색이 나온다고 한다. ‘막소주 분자가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이란 표현도 재미있다. 이어서 ‘내가 술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막힘없다가 이 지점에서 잠시 멈칫하게 되는데, 사실 이 대목이 초점이자 핵심이었다. 독한 자존으로 남을까 갈등하다가 화학적 결합의 길을 텄다.

 

 두어 달가량 기다리는 동안에 시인의 마음이 순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 익은 오미자 술을 한 잔 마실 때 그 맑고 떫은맛이 기가 막혔다. 그즈음 시인은 어떤 친구와 다투었던 모양인데 한번 야단칠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무슨 사연인지는 짐작할 수가 없다. 내용을 조금이나마 내비쳤더라면 더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아무튼 전화를 걸어서 내일 만나자고 해놓고서 한 잔 마셔본 뒤 마음이 환해졌다. 그러고서 에라, 용서를 하자고 변해 버린 것이다. 그 변하는 체험을 오미자술로 말미암아 형상화한 시이다.

 

 화학적 발효란 둘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과정이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침투하여 굴복시키는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오미자 술처럼 너는 내게로, 나는 너에게로 스며들어가 야릇한 빛깔로 어우러지는 것도 거듭나는 승리의 모습이다. 그냥 떫고 신 맛을 ‘가볍게 떫고 맑은 맛’으로 바꾸어 주는 것. 사랑의 화학반응이다. 성질이 다른 두 사람 혹은 집단이 화학적 결합을 통해 새로운 가치의 시너지 창출을 해내는 경우도 종종 본다.

 

 

권순진

 

Gino D' Auri, flamenco guitars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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